사실은 사랑한단 말이었어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단순히 제목만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영화(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전형적(?)인 일본 영화의 감성을 품고 있는 영화이다. 처음 일본의 문화 콘텐츠가 한국에 개방되었을 때의 신선함과 참신성은 이제 어느덧 우리에겐 흔해졌으므로 과연 이 영화가 그 익숙함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의문과 기대를 품고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제목이 워낙 자극적이기 때문에 제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야겠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처럼 공포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제목이 자극적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 너의 사랑도 아니고, 너의 관심도 아니고,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 라니. 다른 이성으로부터 저런 말을 듣는다면 어느 누가 태연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게다가 사실 우리는 췌장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의대생이나 의사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나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내 췌장을 먹고 싶다니.
그러므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음... 그러니까 누군가 누군가의 몸속에 있는... 여기까지만. 상당히 무섭군요).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이 상당히 아름답고 슬프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청춘물이다.
풋풋한 소녀와 소년이 등장해서 그것보다 더 풋풋한 감정들을 그것보다 더더 풋풋하고 아름다운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렇게 풋풋한 영화에 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섬뜩한 제목을 붙였을까?
사실 이 영화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원 소설의 작가인 "스미노 요루"에게 물어봐야 정당할 것이다.
작가 "시미노 요루"는 이 질문에 신인 작가로서 관심을 끌고 싶었다, 라는 다소 쿨한 대답을 했다. 그렇다. 이 작품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그의 데뷔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이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큰 논란거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래전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부위를 낫게 하기 위해 동물의 같은 부위를 먹으면 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이 어느 정도의 충격을 줄여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제목에 대한 호불호만큼이나 장점과 단점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기대가 컸던 사람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장정중 하나는 "집중성"에 있다.
이 "집중성"은 등장인물의 수와 주제를 이끌어나가는 소재의 일관성에서 나타난다.
우선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등장인물은 많이 쳐봐야 세 명이다. 주인공인 하루키(나)와 여자 주인공 사쿠라. 그리고 그녀의 절친인 쿄코까지. 그 외에 등장한 인물들은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일본 드라마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영화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역할도 매우 크고,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 영화는 쉽게 말해서 상당히 보기가 편하다. 물론 이 영화는 나름의 복선을 감추고는 있지만 관객은 그저 주인공들의 시선과 감정만 따라가면 별 다른 고민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의 처음부터 여자 주인공 사쿠라가 췌장의 병으로 인해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커다란 비밀을 떡 하니 드러낸 영화이다. 많은 비밀들을 숨긴 채 그것이 유발하는 긴장감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쪽을 포기하고, 어쩌면 눈에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하 나아가는 제한된 인물들의 감정으로 영화를 풀어나가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괜히 무언가를 숨긴 채 비밀을 품을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는 "하루키"와 "사쿠라"가 정해진 시간을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주제를 풀어낸 영화의 집중성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장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풋풋했던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시절 속의 첫사랑을.
사실 우리의 첫사랑이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주인공 "하루키"와 "사쿠라"의 그것도 서툴고 어설프다. 하지만 그것들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낯 뜨거움이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스크린 속에서 인물들이 펼쳐낸 것은 풋풋함이었다. 그리고 그 풋풋함은 그 시절 분명 우리에게도 있었다.
영화의 주제도 어쩌면 뻔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 있고, 그것을 이끌어 가는 서사도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시절의 기억들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종종 이불 킥을 날리게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내고 있느니 말이다.
이런 아련함과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라는 행복한 상상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좀 더 따듯하고 착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필자도, 그리고 함께 영화를 봤던 Y도 분명 한 뼘만큼 더 따듯하고 착해졌다,라고 생각한다.
'어, 이거 어디선가 한 번 본 장면 같은데?'라는 걸 "기시감"이라 하고, 작품 내에서 기민한 개연성 의한 서사를 흔히 "핍진성"이라고 한다.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기사감"과 "핍진성"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우선 필자는 이 영화를 봤을 때 단번에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러브 레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주제는 분명 약간은 상이하겠지만 영화에서 그것을 통과하고 있는 감성이 위의 두 영화와 무척 닮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주인공이 과거의 연인을 회상하고 그것을 추적해나가는 서사의 방법까지 무척이나 비슷하다. 쉽게 말해서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멜로물과 청춘물의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굳이 그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해마다 비슷한 감성과 비슷한 패턴들의 영화가 쏟아져 나오지만 분명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이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이미 검증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할 만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리 큰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핍진성"이 부족하다. 영화를 보면서 필자도 느꼈던 아쉬움이었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만남부터 상당히 개연성이 부족하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여자 아이가, 학교에서 존재감도 없는 남자아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 남자가 우연히 여자 아이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점. 타인과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고 그럴 의지도 없는 남자가 자신의 가슴속에 담긴 이야기를 어린 학생에게 털어 논다는 점. 마지막으로 결국 여자 아이는 자신의 병 때문이 아니라 묻지 마 살인을 당한다는 점.
일일이 열거해본다면 핍진성의 부족은 몇 가지 더 찾아낼 수 있다.
누군가는 스토리의 진행상 어쩔 수 없지 않으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꼭 그래야만 했었나?라는 아쉬움도 어쩔 수 없다.
남자 주인공 "나(하루키)"의 시선으로 영화는 풀려 나간다.
나는 타인과 관계를 맺기 어려워한다. 아니, 사실 관계를 맺으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 항상 혼자 다니며 소심하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왕따에 가깝다.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이 좋고, 혼자만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캐릭터다. 하지만 진지하고 생각도 깊다. 사람의 본질을 알아내고 그것을 존중하는 예의바름도 가지고 있다.
그런 나의 평온했던 삶에 어느 날 불쑥 그녀가 나타난다. 나와는 정 반대편에 서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그래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그녀가 이상하게도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내 삶에 들어와 나를 흔들어 놓는다. 그 뒤로 나는 자꾸만 삐걱거린다.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의 모습들이 자꾸 내 중심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그 혼란스러움들이 그녀 때문에 싫지가 않다.
"하루키"의 평온했던 삶에 어느 날 "사쿠라"가 불쑥 등장한다.
따듯한 봄날 세상 모두를 아름답게 뒤덮는 벚꽃처럼 그녀는 그의 삶을 뒤덮는다. 세상에 가장 예쁜 미소를 그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밝은 모습과는 반대로 그녀의 남은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자신의 커다란 비밀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숨겼지만 그에게는 들켜 버린다. 그런데 비밀을 들켜버린 것이 오히려 즐겁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함께 채워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즐겁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와 하나씩 해나간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그 시간들이 더욱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삶의 마지막 즈음, 그녀는 그에게 묻는다.
"진실, 혹은 도전."
우리는 누구나 풀지 못하고 표현해내지 못한 감정들을 어딘가 깊숙이 숨겨놓은 채 살아간다.
그것들은 때론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무너뜨리고 마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영영 감춰지기도 하도 누군가로 인해 봇물 터지듯 넘쳐 흐리기도 한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말이 "사랑해"라는 말로 변하는 순간, 주인공 "하루키"는 무너진다. 자신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고 지켜왔던 감정들의 자물쇠들이 풀리고 전하지 못했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그녀의 마지막 말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철저하게 남자 주인공인 "하루키"의 시선과 감정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마지막 짧은 순간 여자 주인공인 "사쿠라"의 시선과 감정으로 전환된다. 그곳에서 영화의 진심과 숨겨져 있던 따듯한 감정들이 드러난다.
우리가 겪었고, 이제는 좀처럼 꺼내지지 않는 가슴속 깊은 감정들의 자물쇠를 풀고 우리도 그랬었으며, 그래서 주인공들의 마음에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었던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벚꽃이 흩날리는 봄에 개봉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옷깃을 여미는 제법 쌀쌀한 가을, 혼자 봐도 좋고 둘이 보면 더 좋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