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에게서 사랑을 배웠어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원고의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 영화"입니다.)
"조금 굴곡진 삶을 보낸다고 해서 꼭 불행해지는 건 아니란다. 그저 조금 많이 힘들 뿐이지. 그런데 사실 말이다. 여자들은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모두 힘들게 되어 있어."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칠월의 어머니가 상심해있던 딸 칠월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이 대사가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배경은 중국이고, 게다가 필자는 남자인데도 말이다.
감히 공감, 이라는 거만함을 들이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필자에게 저 대사가 오래 남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가 보고자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리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여기, 중국의 작은 소도시에 두 명의 소녀가 등장한다.
칠월(마사순)과 안생(주동우).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서로의 성격도, 자라온 환경도 다른 두 소녀의 열세 살 때부터 스물일곱까지, 그들이 겪어 낸 십사 년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사람은 서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에게 끌린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닮고 싶거나 되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우리의 마음은 자꾸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호기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애정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을 것이며, 대상이 이성이라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좀 더 완벽한 2세를 탄생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유전적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영화의 주인공, 칠월과 안생도 서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이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안정적인 삶을 선택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것에 만족을 얻으며 살아가는 칠월.
그녀와는 반대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바쁜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온 안생. 그녀는 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본래의 성격 탓인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불안하고 힘든 삶을 이어간다.
그런 너무나도 달랐던 두 소녀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서로의 다름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빠져들고, 그것에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남자이긴 하지만 필자도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칠월과 안생을을 보면서 몇몇의 친구들을 떠올려 봤다.
그리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필자에게도 결국 친한 친구라 명명할 수 있었던 관계는 취향은 비슷할지라도 성격은 달랐던 친구들이었다. 필자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다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그래서 종종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친구들과 여전히 함께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 다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난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이 좋았다.
아무래도 하나부터 열 까지 나와 비슷하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갈 것이고, 이해가 된다면 기대는 사라지고, 기대가 사라진 관계는 아무래도 시시하니까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서로의 반대편의 사람인 칠월과 안생이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맺으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우정은 이성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끈끈하고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칠월과 안생의 우정은 가명(이정빈)의 등장으로 실금이 가기 시작한다.
같은 중학교를 다니며 우정을 이어왔던 칠월과 안생은 고등학교 진학으로 물리적 거리를 갖게 된다.
평소의 안정적인 성격과 삶의 방향대로 칠월은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고, 자유를 갈망했던, 그래서 틀 안에 묶여 지내는 것이 힘들었던 안생은 직업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칠월은 첫사랑 가명을 만나게 된다.
칠월이 안생에게 첫사랑 가명의 존재를 처음 고백했던 그 날 저녁, 그리고 칠월 몰래 안생이 가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학교에 가명을 찾아갔던 그 날. 탄탄했던 두 소녀의 우정은 어쩌면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둘의 관계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니까.
사실 여기까지였다면 이 영화는 그저 청춘의 삼각관계를 다른 진부한 멜로 영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그런 진부한 멜로 영화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쉽게 말해서 남자 주인공(?)인 "가명"의 역할이 굉장히 제한돼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가명의 역할을 그렇게 크지가 않다. 그녀들과에 관계에서도 주도적이라기보다는 매번 수동적이었고, 조금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관객으로 하여금(특히 여성 관객) 답답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칠월과 안생은 가명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물론 그를 향한 감정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인생의 어떤 방향을 선택하는 순간 가명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점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현대 여성의 역할을 전통적인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풀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칠월은 가명을 좋아한다. 가명도 칠월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엔 말이다.
안생이 칠월이 좋아하는 가명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그를 찾아가던 날 안생과 가명은 드러내진 못했지만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갖게 된다. 하지만 둘 사이엔 칠월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우정의 존재인 칠월을 안생은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명도(이건 분명 성격의 문제겠지만) 칠월과 안생의 사이에서 뚜렷하고 확실한 선택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밟으면 그 사람은 절대 멀리 안 떠난대."
어린 시절, 칠월과 안생이 처음 만나게 되고 서로의 우정을 다져나갈 때 흘러나온 내레이션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그렇게 무던히도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 노력했었다.
칠월은 가명과 데이트를 할 때 가명을 앞세우고는 그의 그림자를 밟는다. 그가 영원히 자신의 옆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하지만 칠월과 가명 그리고 안생, 이 세명이 소원을 빌러 산에 올라갔을 때 가명은 앞서가는 안생을 물끄럼이 바라보고는 그녀의 그림자를 밟아보려 한다. 연인인 칠월으 그림자가 아니라 말이다.
사랑의 방향과 감정의 흐름이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지친 칠월을 남겨두고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안생과 가명. 그리고 둘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감정이 서로에게 향하고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가명은 크게 용기를 내여 돌아서려는 안생을 붙잡지만, 안생은 건너오는 감정을 내치고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영화의 후반에 나오지만 칠월은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차라리 그때 모든 감정의 엇갈림들이 다 들춰졌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그녀들은 그 후로 그녀들에게 다가올 힘든 시간을 겪지 않았어도 됐었을 텐데.
안생은 결국 고향을 떠난다. 표면적인 이유는 고향마을이 너무 좁아 이제 재미가 없다고, 자신은 좀 더 넓은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녀보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숨겨진 진실은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신 안에서 조금씩 커져가는 가명에 대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들이 칠월에게 들춰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그녀(칠월)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장 큰 절망.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안생은 칠월과의 물리적 이별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했던 칠월과 가명을 뒤로하고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던 기타리스트를 찾아 떠나는 안생.
하지만 떠나는 기차역에서 칠월은 안생의 목에 걸려있는 가명의 목걸이 펜던트를 발견한다.
그 정적의 순간 안생은 칠월에게 네가 남으라고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그건 안생에게 있어선 커져가는 가명에 대한 감정을 내치고 칠월과의 우정을 선택하겠다는 가슴 아픈 선택이었다. 하지만 칠월은 안생을 붙잡지 않는다.
이별은 안생에게도 칠월에게도 가혹했다.
사 년의 시간동안 중국과 그곳 너머의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돌던 안생의 인생은 외롭기만 한다. 이런 삶의 모습은 어쩌면 안생이 바라 왔고 그려왔는 자유로운 삶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소중했던 것을 등지고 홀로 살아내고 버텨야 했던 안생의 시간은 그녀에겐 잔인하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낯선 길 위에서 안생은 삶의 하나뿐인 혈육인 어머니의 부고를 듣는다. 장례식장을 지키는 그녀의 옆엔 아무도 없다. 안생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들을 곁에 두지 못하고 떠도는 삶은 애초에 자신의 쫒던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고향으로 칠월을, 그리고 가명을 찾아 돌아간다.
남겨진 칠월의 삶 또한 평탄치는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사랑하는 가명과의 관계를 유지해나가고, 누구나 바라고 원했던 삶을 지켜나가고 있던 그녀였지만 왜인지 그녀는 안정적으로 삶을 살아낼수록 더욱 공허하기만 하다.
이유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안생의 부재였고, 의심으로 시작해 확신을 흔들어 놓은 가명과의 위태로운 사랑이었을 것이다.
기나 긴 방황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안생과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칠월은 그렇게 서로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 소중했던 무엇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재회를 한다. 그리고 함께 상해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젠 부재가 만들어낸 그간의 간극도, 둘 사이를 혼란스럽게 뒤덮었던(실제로 안생은 칠월에게 보내는 모든 엽서의 마지막에 가명의 안부를 물었으니까) 감정의 실타래도 다 풀린 듯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다.
멀어져 있던 시간의 곱절만큼이나 칠월과 안생은 이미 멀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정서적으로.
여전히 가명이 건네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안생.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의심과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었던 칠월. 하지만 둘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 단순히 가명의 존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녀들의 갈등의 원인은 바로 당사자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소중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안생과 칠월에겐 너무 가혹하고 잔인했던 것이다.
함께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서로 다툰 이후 헤어졌던 칠월과 안생을 후로 두 번 더 만나게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북경에서 우연히 만난 가명과 안생이 함께 지내고 있는 모습을 칠월이 발견했을 때와 그 후로 시간이 더 흘러 가명의 아이를 임신한 칠월이 안생을 찾아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의 그 만남에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안생과 칠월은 서로에게 숨겨왔던 고백을 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사랑한단 말은 어느 관계에서도, 어느 인물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어떤 사랑의 고백보다도 칠월과 안생의 입에서 서로를 향해 터져 나왔던 "너를 미워했었다", 라는 고백이 더욱 끈끈하고 달콤하게 다가왔다.
소중한 사람에게 미워했었다고 고백하는 건 굉장한 용기이다. 그 고백엔 감춤이 없고, 가식이 없고, 오롯이 진심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미워했었다는 결국 정말로 많이 사랑했었다는 말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미워했었다는 고백 앞에 칠월과 안생은 다시 우정을 회복한다.
그 오랜 시간과 먼 길을 돌고 돌아 칠월과 안생은 그제야 다시 서로의 제자리를 찾게 된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여러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이 영화가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루는 큐어 영화인가?라는 점이다.
우선 이 영화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영화 <첨밀밀>의 "진가신" 감독이 제작을 맡고, 감독 겸 배우로도 유명한 "증국상"감독의 연출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는 콘텐츠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도 대놓고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큐어 영화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아픔이 담겨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엄격한 중국의 문화시장 내에서도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듯한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콘텐츠들이 제작되고 있다. 강제로 가리어진 음지는 때론 양지보다 더 밝게 빛나는 법이니까.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솔직히 필자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큐어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작과 연출을 맡은 감독의 의도가 어떠하였든지와는 별개로 그렇게 느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큐어 영화로 의심될만한 몇 가지 요소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어린 칠월과 안생이 함께 목욕을 하면서 조금씩 여성으로서 성장해가고 있는 서로의 신체에 관심을 갖는 부분이라던가, 그 장면을 훔쳐보듯이 그려낸 카메라의 움직임이라던가, 결혼을 하지 않고 칠월이 낳은 아이를 함께 키우자고 말했던 안생이라던가 등등.
하지만 반대로 큐어 영화라고 말하기엔 처음 가명의 존재를 안생에게 털어놨을 때, 그 순간 설레듯 반짝이고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던 칠월의 모습이라던가, 오랫동안 가명의 목걸이를 하고 다니며 먼 곳에서조차 그의 안부를 물었던 안녕의 애틋함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놓고 동성애를 다를 수 없었으므로 방패로 가명을 등장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가명의 역할이 영화 내에서 굉장히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런 추측에 의한 결론보다는 오히려 이 영화를 근래에 보기 드문 잘 만들어진 "여성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 현대 중국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려내고 있는 여성과 남성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나라보다 더욱더 평등하고 공평하며 각자의 삶에 주체적인 모습이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바로 지금의 중국이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는 그 과도기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자라면서 결국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 가게 되는 게 다이다."
"여자들은 나중에 엄청 많은 불편한 일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조금 굴곡진 삶을 보낸다고 꼭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란다. 그저 조금 많이 힘들 뿐이지. 그런데 말이다, 여자들은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모두 힘들게 되어 있어."
칠월의 어머니가 칠월에게 해주었던 말들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진심이었건 아니었건, 어마니의 말은 모두 여성의 역할을 상당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다. 애초에 안생은 그런 여성의 역할을 거부했던 캐릭터였고, 그것을 잘 따라가고 만족했다고 여겼던 칠월조차 결국 마지막엔 스스로 그 틀을 깨부수고 나오게 된다.
영화에서 안생과 칠월은 그렇게 새로운 여성의 캐릭터를 과감하고 멋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녀들 옆의 남자(가명)가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물론 분명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그 그 해석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중국이라는 나라가 강제하고 있는 제도적인 문제로 이 영화가 과연 큐어 영화인가?라는 질문엔 제작자도 감독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관객의 몫이고 필자는 그 해석의 가능성을 "웰 메이드 여성 영화"에 열어놓겠다.
아직 정식 개봉을 하지는 않았지만(2017. 12. 7 개봉 예정) 필자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한국 영화 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상업적 성공을 거둘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성은 이미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초청을 받고 호평을 받았으므로 말할 것도 없고.
이 영화의 성공을 예감하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인데, 처음 주연배우를 캐스팅할 때 칠월(마사순)과 안생(주동우)의 역할을 반대로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녀들의 이전 작품에서의 캐릭터들이 오히려 주동우가 칠월 쪽에, 마사순이 안생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하지만 긴 장고 끝에 결국 지금 영화의 캐스팅이 결정되었었다고 한다.
사실 영화를 본, 보게 될 관객들은 그런 고민들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두 배우의 연기력은 탁월했고 능숙했다. 칠월과 안생을 두 배우가 바꾸어 연기를 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도 없다.
또 네 명의 작가들이 각각 두 명씩 칠월과 안생의 입장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한다. 작가들의 성격도 두 명씩 칠월과 안생의 성격과 닮았다고 하니 이런 탄탄한 시나리오와 대사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배우 마사순과 주동우는 중국의 권위 있는 "금마장 영화제"에서 53년 만에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만큼 그녀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맡긴 캐스팅은 완벽했으면 그녀들의 탁월한 연기력은 덤이었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중요한 장소 한 곳을 꼽으라면 필자는 망설임 없이 욕실을 선택하겠다.
풋풋한 어린 소녀 시절, 칠월과 안생은 비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함께 욕실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녀들의 관계가 시작되고 단단해지며 강한 정서적 고리를 연결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작"은 바로 욕실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감정이 서로를 날카롭게 겨냥하고 격하게 요동치게 된 장소도 바로 욕실이었다.
따듯했던 칠월의 집에 있는 욕실이 아니라 북경의 가명의 집, 차가운 욕실이었다.
서로에게 격해진 감정을 쏟아냈던 욕실에서 칠월은 안생에게 물을 뿌리며 날카로운 말들을 토해낸다. 평소 차분하고 침착했던 칠월의 성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침착했던 게 아니었다. 차분했던 게 아니었다. 참고 있었던 것이다. 꾹꾹 눌러 담고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에 집중하며 꾸며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욕실에서 시작했던 둘은 욕실에서 그 끝으로 치닫는다.
감독의 의도였건 아니건(물론 당연히 의도였겠지만) "욕실"이라는 장치는 그녀들의 감정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이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플래시 백 의 편집 기법을 선택하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안생이 과거를 회상하며 영화는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플래시 백 기법의 편집은 분명히 장단점이 있는 방법이다.
장점이라고 하면 관객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추측하고, 추리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높은 집중력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단점이라고 한다면 자칫 잘못하면 영화의 모든 스토리가 뒤죽박죽 되기 쉽다는 것이다. 시간의 앞 뒤를 오가는 방법은 정교하지 못하면 단순히 어지러울 뿐이니까.
이 영화는 플래시 백 편집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에 공개되는 두 번의 반전의 단단한 원인과 기반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은 이름 자체로 역설을 담고 있다.
칠월(七月)_여름의 한창. 모든 게 푸르른 그 시절의 이름을 담고 있는 칠월은 정작 밝지 못하다. 자신의 삶을 위한 선택은 미뤄져야만 했고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거짓 만족을 얻는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푸르고 희망차고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안생(安生) _편안한 삶. 하지만 안생의 삶에는 편안함이 없었다. 가족도 고향도 그녀에겐 안정을 주지 못한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던, 그 속에서 자유라는 이름 아래 가리어진 그녀의 힘듦은 누가 알아줄까?
가명(家明)_가정을 밝히는 빛. 하지만 가명은 결국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 그를 사랑했던 여자도, 그가 사랑했던 여자도 결국 그의 곁엔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확실했다면 모두가 따듯할 수 있었을까?
우선 가명은 차치하고(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니까) 필자는 칠월과 안생을 생각해본다.
그녀들의 이름은 과연 역설이었을까?
필자만의 개인적인 의견일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녀들의 성격과 지향했던 삶은 이름 그대로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그녀들의 만남의 순간 그녀들은 그 시절 자신들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서로의 다른 모습에 끌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다른 모습이 사라진다면 서로를 잃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들에게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칠월은 밝고 활발하고 도전적인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차분한 모습을 지켜왔고, 안생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과 다르게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진 않았을까? 그래야면 칠월이, 안생이 서로의 곁에 머물러줄 테니까.
결국 성인이 된 후, 그녀들의 삶은 그때까지의 모습과 다르게 자신의 이름을 닮은 삶을 살게 된다.
안생은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고, 칠월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도는 자유로운 삶을.
무슨 일이 었더라도 내 편이 되어줄 것 같은 친구.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떠오르고 찾아가게 되는 친구.
그 사람이 동성이건 이성이건, 우리는 그 사람을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제목처럼 "소울메이트"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물리적인 시간의 쌓임일 수도 있겠지만 정서적 교감에 더욱 무게를 두고 싶다.
여기, 그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가 있다.
서로가 겪어낸 감정의 파동, 그 폭이 어떡했을지라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끈을 서로의 반대편에서 굳건하게 붙잡고 있는 칠월과 안생. 그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따듯해지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때론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내 손을 잡고 내 앞이 아니고, 내 뒤도 아니고, 내 옆에서 나란히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한 사람일 테니까.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을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