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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13. 2018

바라나시로 향했습니다

마음의 마음에 들 것

여행의 일정을 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아니, 솔직히 그렇지 못하는 편이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그러니까 확실한 무언가가 없다 하더라도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마음은 열리고, 열린 마음은 최고의 가이드가 된다고 믿는다.

나는 도무지 떠나기 전에는 무엇을 얼마만큼 채워둬야 할지를 몰랐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단 떠나고, 그곳에서 마주한 모든 마음의 요구에 순간순간 충실히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한 여행이 좋았다.

몇 번인가 시간과 장소를 세분화해서 일정을 조직한 뒤 그것들을 성실하게 따라가는 여행도 해봤지만 결국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오히려 여행에서 반짝였던 순간들은 정해진 길에서 잠시 비켜난 곳에서 조용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조금은 여유롭게 진짜 여행을 만나보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길 밖의 그것들과 마주할 때, 여행지에서 내 마음은 달아오르곤 했다.



델리에 도착하자마자 하루도 채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바라나시행 기차표를 샀다. 공항에서부터 마음이 답답했다. 인도는 세 번째였지만 어쩐지 델리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델리는 인도의 수도라기보다는 진짜 인도를 가기 위해 잠시 거쳐야 할 중간 경유지 같은 느낌이랄까.

바라나시행 야간열차에 몸을 구겨 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진짜 내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았고,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고,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신이난 나는 신발을 벗고는 하얀 양말이 까맣게 될 때까지 기차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내 자리 건너편의 인도 친구에게 반 강제로 땅콩도 뺏어 먹었다. 신기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인도에서 나는 기꺼이 그들보다 더 신기한 여행자가 되기로 한다.



마음의 요구에 충실한 여행. 그런 여행이 좋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의 모습이었다. 

일상에서는 내 마음을 가로막는 것 투성이었으므로, 여행에서 만큼은 내 멋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무엇인가에 눌려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마음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여행을 떠나 먼 곳에 와서야 터트려 본다. 신경 써주지 못하고 외면했던 내 진짜 마음들을 조심스레 달래보고 우리만의 신난 작당을 함께 실행한다.

그러니까 나와 내 마음의 신나는 작당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기 전, 아직 열리지 않은 스스로의 마음을 배제하고 계획했던 일정을 내 마음이 마음에 들어할 리 없지 않은가. 

나란히 걷는 그 낯선 길 위에서 누군가 건네는 안녕하냐는 인사보다 날 벅차오르게 하는 건 내 마음의 반응이었다. 마음은 나의 숨소리조차 알아챈다. 내 걸음의 폭을 계산하고 그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것을 내 한 발치 앞에 놓아둔다. 내 마음만큼 좋은 여행 동료는 없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바라나시 기차역에 도착한 나는 숙소들이 몰려있는 갠지스강 근처까지 릭샤를 함께 탈 여행자를 찾았다. 돈도 아끼고 덤으로 친구도 얻을 수 있느니. 여행자가 차고 넘치는 인도는 혼자 여행하는 나에겐 필요할 때 일행을 찾기가 참 쉬운 곳이다. 혼자라서 외롭기도 했지만 혼자라서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가벼워진 마음은 벽을 허물고 사람을 맞이한다. 

10분 남짓 나와 함께 릭샤를 탄 일본 친구는 인도가 처음이라고 했다. 

첫 여행지가 인도라니. 이 친구 범상치 않구나 생각했다. 왜 첫 여행지를 인도로 정했느냐 물어보니 갠지스강을 보러 왔단다. 인도에 타지마할도 아니고, 엘로라 석굴도 아니고, 사막도 아닌 갠지스강을 보러 온 여행자. 나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인도에서 바라나시를 가장 좋아하고, 바라나시에서도 항상 갠지스강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였으니까. 그래서 결국 또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얼마나 머무를 거야?”

“글쎄. 질릴 때까지. 아니다. 질린다기보다는 갠지스강이 내 마음에 꽉 차오를 때까지. 갠지스강을 채워서 돌아가야지.”

“그럼 정말 장소를 잘 정했네. 나도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또 왔거든.”



여행지에선 시간이 조금 빠르게 간다. 도착해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여행지의 시간은 활시위를 떠난 활 같다. 시작된 그 순간부터 망설임 없이 성실하고 꾸준하고 빠르게 앞으로 향한다. 하지만 하루하루의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흘러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성실하게 마음을 채워갔다면 그 시간들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고 마음속에 견고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차오른 그것은 되돌아간 일상에서 다시 한번 어딘가로 향할 힘을 준다. 더군다나 차오른 그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갠지스강이라면 말 다했다.


“바라나시는 뭐가 좋아?”

릭샤에서 내려 숙소까지 함께 걸으며 일본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 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래? 좋다. 사실 그래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은 끊지도 않고 왔어.”

“이번엔 좋은 것 세 개만 찾아서 그만큼만 머물다 돌아가. 다음에 또 와야 하니까. 한 번에 다 써버리기엔 이곳이 아깝잖아.”



다시 한번,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떠나기 전 무엇을 얼마만큼 준비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난 쉽게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대신 나의 바라나시와 내가 만난 일본인 친구의 바라나시를 슬며시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여행에 정답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것 말고는 여행을 쉽게 설명할 방법이 나에겐 없으니까.


아마도 이 일본인 친구도 앞으로 몇 번은 더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갠지스강으로 마음을 채우고 도 또 채워도 이 친구의 마음은 그것보다 넓고 깊어질 것이고, 그 마음에 반응을 하기 위해서 다시 배낭을 꾸리겠지.

마음의 마음에 드는 여행은, 여행의 마침표가 아니라 다시 여행의 출발일 테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 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처음 와보는 장소에서 조차 익숙해서 거침없는 발걸음에도 길을 잃지 않는 곳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연이 있겠지만 나는 장소와 사람 사이에도 연이 있다고 믿는다. 한 번 엮인 연은 쉽게 풀리지 않아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금 그곳으로 향하게 된다. 지금 내가 다시 바라나시에 와있는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의 이 친구와 바라나시처럼 말이다. 


서로의 앞에 다른 방향으로 놓인 갈림길 앞에서 나는 그 친구와 헤어졌다. 

잘 지내다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충분히 잘 지내다 돌아갈 것이다. 그가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머무는 시간은 분명 그에게 충분할 테고, 그의 여정을 그의 마음도 충분히 마음에 들어할 테니까 말이다.


그를 뒤로하고,

나는 내 마음과 함께 다시 바라나시로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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