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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06. 2018

따듯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겠지요

아직 빨래가 마르지 않았습니다

만남이라는 기적도 여행지에선 다소 가벼운 스침으로 끝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괜찮은 것은 그런 스침이 잦다는 겁니다. 잦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몸을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도 따라서 쉽게 돌려지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할 수 있겠죠. 아니다 싶으면 놓기 쉽고, 쉽게 놓아버린 마음에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으니까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내고 가벼워지려 떠나온 여행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쥐지 않고 헐렁한 마음으로 흘러 다니더라도 무거운 무언가가 마음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만남이 마음을 깊게 하는 일이라면 여행의 스침은 마음을 넓히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넓혀가는 것은 여행이고, 마음이 깊어지는 것은 사랑이겠지요. 사랑을 할 것이 아니라면 쉽게 깊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조금은 비겁하겠지만 그래야 합니다.

깊어지려 하기 전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아야 하고, 그렇게 조금은 단단하고 차갑게 마음을 무장하지 않으면 낯선 곳에서 내 마음은 쉽게 허물어지고 말 겁니다. 깊어진 곳에서 빠져나오기란 결코 쉽지 않거든요. 그것이 사람이건 장소건 하다못해 가볍게 스치는 작은 물건 하나라도요.

왜 우리 모두에겐 이미 돌아섰지만 마음만은 남겨두고 와야 했던 그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 그것 때문에 마음을 앓아야 했던 추운 계절들이.

그래서 여행의 다른 이름은 이별입니다. 시한부 만남을 전제로 한다는 것, 반드시 이별이 있다는 것. 그것이 조금은 잔인할지라도 여행이죠. 여행이 우리에게 무겁게 건네는 그것의 본질이겠지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계절, 눈으로 뒤덮인 북쪽 나라의 한 숙소였습니다.

세상을 두껍게 덮고 있는 눈만큼이나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나와는 달리 남자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얇은 옷차림으로 창밖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몇 번인가 남자를 몰래 훔쳐보고 나서는 남자가 남쪽의 따듯한 나라에서 왔거나, 아니면 아예 북쪽의 추운 나라에서 왔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외출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추위도 추위였지만 워낙 눈이 많이 내려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채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온 겁니다. 도망에 가까웠습니다.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따듯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는데 다시 그 남자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남자는 여전히 반팔에 반바지 차림입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입니다. 남자가 바라보는 것은 창 밖에 내리는 눈이 아니라 어쩌면 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추운 세상 속에서 따듯했던 기억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라고.



호기심에 남자에게 다가가 따듯한 차를 건넵니다.

어느 계절의 나라에서 왔는지, 여행의 이유가 가벼운 옷차림처럼 가벼운 마음이냐 슬쩍 물었습니다.

추운 이곳에서 속에 따듯한 무언가를 지녔느냐, 그리고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하냐, 이건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남자를 이곳에 데려다 놓은 몇 가지의 상황들과 이유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 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남자의 지난 사랑 몇 조각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힘겨운것들이 깊은 속마음에 엮여 있는 것이 나와 비슷하단 생각도 했습니다.

대화의 파동이 공간을 데웠고, 어느 정도 서로의 온도가 비슷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두꺼운 외투를 벗었습니다.



조금은 친해진 것 같아 이번엔 남자에게 추운 이곳에서 추운 옷차림으로 창 밖만 바라보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자는 방 안 빨래 줄에 걸려 있던 옷가지들을 가리킵니다. 빨래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고. 남자가 챙겨 온 옷이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빨래 줄에 걸려있는 옷이 전부였던 겁니다.

남자는 내일 아침이면 옷이 다 마를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안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만 보는 거라고. 어쩌면 이 광경을 보려고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말합니다. 그리고 내일 괜찮으면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습니다.


그제야 남자의 옷차림만큼이나 가벼운 남자의 작은 가방을 보게 됩니다. 배낭이라기보다는 책가방에 가까웠습니다. 그 안엔 여행을 위한 제대로 된 무엇도 들어있지 않았겠지요.

아마도 급히 떠나왔을 겁니다. 겨우 마음만을 추스르고 담아왔겠지요. 그것만으로도 촉박했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적지의 날씨를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입고 있던 옷에 작은 가방만을 챙겨 떠나왔을 남자의 여정을 생각해 봅니다. 추운 몸만큼 마음도 추웠겠지요. 이곳의 날씨보다 더 추웠겠지요.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은 빨래가 아니라 푹 젖어버린 남자의 마음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마를 빨래처럼 급히 떠나와야 했던 남자의 눅눅했던 마음도 내일이면 조금은 괜찮아질까요?

눈처럼 계속해서 쌓이고 쌓여 아래부터 단단히 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저 밑바닥 어딘가에 따뜻한 무언가가 숨어있는 거겠지요? 그것으로 언 마음을 녹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내일, 따듯하게 옷을 갖춰 입은 남자와 함께 나가 따듯한 점심을 먹게 되면 남자와 나의 만남도 서로가 쉽게 놓을 수 없는 깊은 마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여행지에서 만남을 스침이 아니라 기적으로 묶어둘 수 있는 건 아마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스치고 잊혀버리고 마는 몇 개의 아픈 마음들도 있겠지만 그 반대의 것도 분명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잦은 만남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나만의 주문을 남자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추운 나라에서 조금은 따듯했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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