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요일의 Y

일관성

자아분열

by 최전호

열등감에 휩싸인 사람의 내부에선 두 자아의 충돌이 발생한다. 자신의 본직적인 욕망에 반응하는 본질적인 자아와, 상대방의 욕망에 반응하려 애쓰는 비본질적인 자아. 진짜와 가짜의 싸움.

일종의 자아 분열이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감정 앞에서 나는 자꾸만 내 본질적인 자아를 Y에게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Y가 원하는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어필하는 것이 아니고, Y가 바라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녀가 원하는 내 모습을 탐색했다.


어쨌거나 Y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승낙으로 우리는 코히마르에 함께 가게 되었다. Y와 단 둘이 있을 기회가 드디어 생긴 터라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 열등감으로 인한 자아분열로 심연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린 나는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날은 더웠고, 땀은 비 오듯 흘렀으며, 나는 무기력하게 보도블록의 무늬를 하나하나 읽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더운데 맥주 좀 드실래요?" 나는 Y에게 물었다.

"음... 맥주를 마시기엔 너무 시간이 이르지 않아요?" Y가 되물었다.

"뭐 그렇긴 하죠." 작은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분명한 거절이었다.

"전 괜찮으니까 맥주 드세요." Y가 무안했는지 나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사실 뭐 대낮 무터 맥주를 마시기엔 좀 그렇죠? 그럼 콜라라도 드실래요?"

"음... 전 괜찮아요. 저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Y는 웃으며 대답했다. 억지웃음이다.

"네... 그럼 전 콜라를."이라고 말하며 난 버스정류장 앞 작은 슈퍼마켓에서 미지근한 콜라를 한 캔 사 마셨다.



30년(Y을 만났을 때 내 나이는 서른이었다)이란 시간을 세상 속에 던져진 채 이만큼을 견뎌온 나에게는 일종의 "자아"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단단하고 견고하게. 누군가 그것을 "고집"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나만의 자아를 "가치관" 내지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나만의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건 중요한 건 그것의 존재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관성. 일관성이 배재된다면 자아는 결국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쉽게 말해 일관성을 갖춘 안정화된 기대감이 배재된다면 그것이 자아 건, 가치관이건, 패턴이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의 본질적인 자아와 비본질적인 자아의 싸움 때문에 나는 그 일관성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무장해제.


자아가 발동하는 기본 구조는 스스로의 욕망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세상을 향한 욕망을 발견하는 것으로 자아의 발동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이나 말투로 적당히 포장해서 외부 세계에 전달한다. 그러나 그날, 코히마르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내 욕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본질적인 자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Y 앞에서 낮은 저자세로 Y의 욕망을 관찰하고 그것을 캐치해 Y가 원하는 형태로(마치 그것이 내 욕망인 것처럼) 포장해 Y 앞에 내놓으려 했다.


Y가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Y가 무심결에 흘린 욕망의 작은 단서에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Y가 나를 마음에 들어할까?



스스로의 자아에 대한 배려나 그것이 취해야 할 일관성을 포기해버린 채 도대체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나는 떳떳하게(그러니까 내 욕망이 원하는) 맥주를 마시지도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던(Y가 원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콜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내 것을 내 것이 아닌 척할 수밖에 없었던 자아에 대한 배신은 나를 더욱더 깊은 심연의 진흙탕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진짜 자아(맥주)와 가짜 자아(콜라) 사이를 헤멜 동안 코히마르행 버스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도착했고, 난 절반도 채 마시자 않은 콜라를 쓰레기통에 버리고선 버스에 올라탔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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