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요일의 Y

열등감

전략적 무관심

by 최전호

어쩌면 나는 애초에 Y에 대한 전략을 잘 못 세운 것이었다.

전쟁에 임하는 근엄한 장군처럼 넓은 야전 테이블 위에 큰 지도를 펼치고는 적(물론 Y가 적은 아니지만)의 동태를 세심히 살피고, 그것을 한 발 앞서 예상했어야 했다. 치밀하고 빈틈없는 전략으로 Y에 대응하고, 사랑의(어쩌면 유혹의) 최대 전략인 상대를 향한 "전략적 무관심"으로 무장한 채 그녀 앞에 섰어야 했는데.


"나는 당신에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거 조금은 시시하잖아요. 난 그런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랑보다 더 크고 무겁고 농밀한 그 무언가요. 그것을 찾아 쿠바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도의 무관심과 약간의 허세로 눈 앞의 Y를 의식적으로 축소시켰다면(물론 분명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랬다면 난 반대로 Y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상대에겐 관심이나 호기심을 품지 않으니까. 사랑의 시작은 바로 그 관심과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를 향한 "전략적 무관심"이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온다는 건 어느 정도 검증된(도대체 누구한테?) 사실이니까. 그것에 난 실패한 것이다.


결국 Y 앞의 나는 무능한 장군처럼 내가 꺼내 놓을 수 있는 장기판의 차, 포를 떼고(떼임 당하고) 그녀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버린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



이렇게 이미 기울어진(심하게) 운동장에 비틀거리며 힘겹게 서 있는 나를 완전히 녹다운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높은 자존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나를 무너트렸다.

바로 열등감. 어떤 계기로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진 열등감은 나를 심판의 카운트다운도 필요 없을 정도로 링 바닥 위에 철 퍼턱 쓰러트렸다.


"여행 에세이를 꽤 좋아하고 자주 읽어요. 특히 O출판사에 출판된 OOO 작가의 책을 좋아해요. 개인적으로 그 작가의 팬이기도 하고요."


내가 좋아하는 여행과 책을 통해 Y와 공통점을 찾으려 했던 나의 질문에 Y가 대답한 것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도 내 책을(두 권이나) O출판사를 통해 출판했으니까. 드디어 나와 Y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하지만 엄청난 기대를 품고) 혹시 내 책을 읽어봤느냐 물었었고, Y는 꽤나 야무지게(미안함도 없이) "그런 책이 있어요? 이상하네요. 그 출판사의 책은 많이 읽었는데..."라고 했다.


아, 그때부터였다.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OOO작가가 싫어졌다.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못났으면(작가로서) Y는 내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을까(아니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내가 지금까지 써온 글들은 역시 그 누구에게도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타블로이드판 잡지의 자극적인 문구에 불과할 뿐이야, 라는 비극적 생각이 나에게 싹트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아직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저 사람은 아직 내 매력을 모를 뿐, 내 매력을 알게 된다면 확실히 날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자신감보다는, '역시 난 사랑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못난 사람일 뿐이야.'라는 열등감일 확률이 높다. 대체 사랑 앞에 저렇게 거만한 마음을 들이댈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느냐 말이다.

하지만 이 열등감이란 감정은 본래 그 사람의 본질에 근거하진 않는다.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환경이 만들어 낸 일종의 절망일 뿐 그 사람 자체는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만큼 못나진 않았다(물론 나도). 그러나 이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을 테지.


어쨌든 난 Y의 대답 한 마디에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말았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쿠바의 하늘은 여전히 맑고 투명했고 무더웠다. 그리고 내 사랑은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길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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