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당신이 내렸습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엉겁결에 받아온 신문의 한 귀퉁이, 십자 낱말의 한 글자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단어들처럼.
당신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을 내 옆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설렘과 두근거림. 기쁨과 희망. 얕은 불안함과 귀여운 질투 같은 것들.
어느 날 조금은 어두운 저녁이었습니다.
여름이었고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이제 내 곁에 없는 당신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당신의 얇은 베이지색 바짓단 끝으로 젖은 빗방울들이 뚝뚝 떨어졌고, 신발은 이미 물로 흥건했지요.
현관의 비밀번호도 알고 있는 당신은 벨을 눌렀습니다.
언제나 경쾌한 당신의 발자국 소리 뒤에 이어진 도어록 소리에 나는 마음이 들떴었는데.
당신이 누른 현관의 낯선 벨소리에 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서있었습니다.
당신은 우산을 가지러 왔다고 했습니다.
잘 지냈냐는 말도 없이,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우산"이라는 두 글자만 가녀리게 내뱉고는 온몸으로 받아낸 빗방울들을 현관에 떨구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의 집이 었던 곳 현관에 우리의 우산이 놓여있는 곳에 이제는 "당신"의 우산이 놓여 있었습니다.
놓고 간 것입니다.
데려왔던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간 당신이었는데. 우산 하나만 놓고 간 것입니다.
당신의 우산은 나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당신이었습니다.
고작 우산 하나였지만 나라는 사람이 멍하니 바라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당신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올 것이기에 두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보처럼 믿고 있었던 가녀린 희망이었는데.
내 방 창문으로 멀어져 가는 당신을 몰래 훔쳐봤습니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우산을 펴지도 않고 손에 쥔 채 비를 맞으며 멀리... 나에게서 멀리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찾으러 온 건 우산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쩌면 나처럼 당신에게도 우산은 희미한 희망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왔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이제는 그만해야겠다 생각한 거겠지요.
나에게만 희망인 것을 두고 온 것이 맘에 걸려 찾아온 겁니다. 당신은.
비가 내리는 날, 당신은 나에게서 내렸습니다.
당신이 가져왔던 설렘과 두근거림, 기쁨과 희망, 얕은 불안함과 귀여운 질투 같은 것들을 모두 데리고.
하지만 그 모든 감정 안에 여전히 당신이 있으니 당신은 내렸지만 난 내리지 못합니다.
비는 한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 매거진 <사물의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아 작성된 픽션입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