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로 나누는
따듯한 대화

[버텨요, 청춘中]

by 최전호

배낭여행자로 북적거리는 중국 북경의 게스트하우스.

이곳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거실 한켠엔 메모를 붙여놓을 수 있는 작은 메모판이 있다.

그리고 그 메모판은 매일 새로운 메모로 가득차서그것들을 하나하나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정도이다.
영어가 적혀 있기도 하고, 중국어, 일본어에 스페인어까지. 그리고 가끔은 발견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즐거움이 되는 한글까지.
이 메모판은 세계 곳곳에서 모인 여행자들이 그날 자신의 기분을 적어놓은일기장이되기도하고,

나에게필요없는물건과상대의필요없는 물건이 서로 교환되는 장터가 되기도 하고,

물건이나 음식을 무료로 나누는 나눔의 장이 되기도 한다.

메모가 누군가에게 읽힘으로 의미와 의도가 전달되지만 분명한 것은그 안엔 소박하고 조용하고 따듯한 마음들이 함께 적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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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져온 물건은 분명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이것저것 구입하거나 누군가에게얻은 물건에서부터,

누군가에게 전달해줄 기념품까지. 처음보다 두 배 이상 많아진 짐에 나는 난감해진다.

결국 나에게 필요 없는 짐들을 처분하고자 메모를 적어 메모판에 붙여놓았다.
나의 여행은 이미 끝이 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얻은 물건이 대부분이기에 아깝다는 마음은 없었다.


면도 크림, 절반쯤 남은 샴푸, 우비, 북경 지도, 약간 찌그러진 보온 물통 등등 여러 가지 여행물품 보유. 필요한 분은 원하는 물품과 이름을남겨주세요. 저녁 7시 이후로 203호에 오시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저녁 다섯시쯤 되자 점심을 먹기 전 붙여놓은 메모 아래 많은 답변들이 달려 있었다.


마침 면도 크림이 떨어졌는데. 아직 남아 있다면 난 면도 크림. - 칼

요즘은 정말 비가 많이 와서 우산만으론 힘들었어. 난 우비. - 안나

내가 원하는 물건은 없는데 그래도 한번 구경가도 괜찮지? - 케이튼

네가나에게보온물통을준다면난너에게맛있는치즈를줄게.-보냉

샴푸가어느회사제품인지알고싶은걸? 7시에갈게.-줄리


많은 친구들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 203호에 모여들었고, 결국 난 한국에 가져가려고 챙겨둔 몇 가지 물건들까지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물건을 받아간 친구들은 자신의 무언가를 나에게 건넸다. 순간내 방은 시장이 된 것 같기도 했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소중한 것들을 몰래 놓아두던 다락방이 된 듯도 했다.


사람들이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여행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낯선 길에 서 있는 누구나 결핍이 있으므로 자신의 부족함이 부끄럽지

않고 여유 또한 자랑이 되지 않으니까 필요한 건 구하고 필요 없는 건 나누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도 없고, 누군가에게 나누지 못할 물건도 없다.

그것이 물건이건 감정이건 나누면서, 동시에 줄 수 있다.

그러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위로받아야 하는 결핍이 있다면,

조금만 용기 내어 메모지를 붙여보자.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았던 당신의 친구들이 이번엔 그것을 당신에게 갚기 위해 따듯한 메모를 당신의 메모 아래 붙여둘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