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아이들 - 「세정(2)」

by 제인

「세정(2)」


내가 두정 언니의 변화를 알아챈 건, 언니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도시락 김의 포장지를 뜯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 헛구역질이, 한정 언니의 비밀과 ‘같은 양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두정 언니를 쫓아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몰래 눈

물을 흘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 밤이 계속 되풀이될 것 같아서.

나는 두꺼운 요에 그녀를 재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그 사실을 두정 언니가 ‘영혼의 단짝’이라고 말해왔던, 지우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두정 언니가 임신한 것 같아.”


그때 그는 손님용 보리차를 유리컵에 따르고 있었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손을 덜덜 떨다가 좀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자 급기야 한쪽 손으로 다른 손을 붙잡아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가, ‘오빠, 언니가……’라고 다시 내뱉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는데?”

“전에…… 한정 언니랑 같아. 밥을 못 먹고 자꾸 토해.”

“그게 누나랑 같은 이유인지 어떻게 아냐고 묻는 거야.”

“언니…… 생리 안 해.”


우리에게는 각자 할당된 생리대 수가 있었다. 하루 두 개씩, 한 달에 10개가 주어졌다. 언젠가부터 사서 채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납장의 공간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두정 언니 칸이 그대로라고. 오빠가 얘기 좀 해봐.”

“알았어. 인우 누나한테 말하지 마. 내가 두정이한테 물어볼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쟁반을 들고 2층으로 향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인우 언니가 하루를 시작함과 동시에 의식처럼 그의 머리를 빗겨주고, 때가 되면 가위로 다듬어주었다.

그녀는 바닥에 쌓인 머리카락을 신문지로 잘 싸서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너도 날고 싶니’


내가 오빠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날, 아저씨가 그의 멱살을 잡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왔다. 언제나 맞는 이유 같은 건 없었고 누구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빠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왜 맞아야 하냐고. 그 질문에 또 맞았고, 왜 때리냐고 소리를 지르자 또 맞았다.

인우 언니는 진짜 그를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세탁실 한쪽에 세워둔 방망이를 집어 드는 아저씨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곧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고, 두정 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다 내 잘못이니까, 황매 때리지 마세요. 제발요…….”


아저씨가 그녀를 보자마자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여튼, 네 년들은……. 네가 쉬면, 누가 대신 해줄 건데? 나도 손해 볼 수는 없잖아? 좋아, 좋다고. 쉬고 싶으면 쉬세요들. 대타는 구해놓고, 응?”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 손해가 뭔데. 그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우 오빠는 인우 언니가 손을 붙잡아 당기자, 입술을 깨물었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해요.”

“그래 누가 하든, 나야 상관없어. 황매, 네가 한다, 이거지? 알았어.”


두정 언니의 어깨가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세탁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아저씨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나가 버렸다.


“김지우! 무슨 짓을 한 거야?”


인우 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뭐 한 거냐고 묻잖아!”


그는 자신의 팔등을 잡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두정이가 아파. 아파서 쉬어야 해!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했을 뿐이야.”

“그걸 왜 네가 하냐고!”

“그럼 누나가 해? 세정이가 해? 누가 하는데!”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인우 언니의 두 손을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2층에 올라가는 모두의 발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 뻔히 알면서, 아무도! 아무도 먼저 말을 안 해. ……누나, 이건 정상이야?”


그녀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의 팔을 껴안았다.


“애초에 정상인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우리도 사람이라고? 그러니 못 하겠다고? 도와 달라고? 여기 오는 인간들, 다 똑같아. 이 지하실에 갇힌 우리만 아는 진실 같은 거?”


쏟아지는 말들이 주저앉아 있는 두정 언니의 머리 위로 세차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일어설 수 있게 했다.


“그래서 한정 누나가 그렇게 간 거야. 우리가 보낸 거라고! 누나는 왜 자꾸…… 잊으려고 해?”

“그건 한정이 선택이었어!”

“누나!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 그게 한정 누나의 선택이었다고? 둘이 친구였잖아, 못 하는 말 없이 다 하는 친구라며! 그런데 어떻게 그래?”

“김지우,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대책도 없으면서! 네가 이제 와서 하겠다는 건 용기도 도움도,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는 앞으로 어쩔 생각인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우리는 다음 죽음을 생각하는 걸까. 두정 언니는 그 둘을 버려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불속에 몸을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언니, 오빠. 제발 그만해.”

“우리 현실? 내가 알려줘? 우린 세정이를 통해서 바깥과 소통할 수도 있었어. 신고할 수도 있었어! 그게 아니라면 빠져나갈 수도 있었어! 그런데 우리는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그냥 견뎠지. 여기 와서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구 하나 소리 내지 않았어. 2층 방에서 바깥을 훔쳐보고, 마당에서 소리를 훔쳐 듣고, 아니야? 저 현관문만, 저 대문만 나서면 되는데! …… 아무것도 안 했어. 저 두 사람이 무서워서, 변하지 않는 세상같이 무서워서. 텔레비전에 온갖 사건들로 세상이 들썩거린대도, 여기는 너무 조용하니까!”


언니 말이 다 맞다고 하면 우리는 현실에 지는 걸까.

나는 지우 오빠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바닥에 뚝뚝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어 김지우라는 사람은 이제 자신의 마음을 되는대로 구겨 둘 것 같았다.

인우 언니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한 것이 많았다. 남자의 화를 돋게 해서, 여자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잠을 더 자고 싶어서, 배고파서, 책을 읽고 싶어서, 생일이라서, 갖가지 이유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두 사람의 목을 조르며 사과하라고 울부짖었다. 우리는 사과받고 싶어서, 그저 머무는 걸까.


그날 이후, 인우 언니의 반대에도 그는 두정 언니 대신 2층으로 향했다. 두정 언니의 눈은 언제나 그를 향해 있었다. 먹지도 못하고, 밤새 앓고 난 그녀의 몸은 한정 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가지 말라는 말에도 방을 나서는 그의 등을 눈으로 좇고, 야윈 등을 바닥에 대고 거친 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날은 지우 오빠의 생일이었다. 선구 오빠가 가스를 배달하고 난 뒤에 숨겨놓고 간 생일 케이크를 먹는 날이었다. 기어코 일어서는 그의 다리를 인우 언니가 붙잡고 늘어지는데도, 그 손을 모질게 떼어냈다. 두정 언니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벽에 손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있던 케이크 상자를, 온 힘을 다해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케이크는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원래 모양을 잃은 채 뒹굴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 차라리 다 죽여 없애버려! 그럼, 다 끝나!”

“해 줘?”

“해, 김지우! 하라고!”


우리는 모두 누구라도, 언제라도 깨뜨릴 수 있는 미술실의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서서 곰팡이 핀 벽과 열리지도 않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을 바닥에서 떼어내 상자 밭침에 올렸다. 두정 언니는 문 앞까지 가더니 등을 돌려 우리를 보았다.


“김지우, 난 네가 제일 싫어. …… 정말 싫어. 제일 끔찍한 건 너야. 인우 언니 말대로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 버티고 서 있는 것도 너무 무서워서, 그런 내가 너무 끔찍해서! 결국엔 하나하나에 변명을 붙여서 달라붙어 있는…….”

“그만해! …… 제발!”

“내가 부탁했잖아. 오늘은 가지 말라고. 죽든 살든 내가 해. 넌, 오늘은 그냥, 저 케이크만 맛있게 먹어주면 되는 거였어.”


인우 언니는 방바닥에 말라 있던 걸레를 들어 케이크 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지우야, 두정아. 둘 다 그만해.”

“내가 왜 오늘 부득부득 올라가려고 했는지, 알려줘?”


그가 옷장을 뒤져 두정 언니의 신문지 책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봉투로 싼 돈뭉치를 꺼냈다. 숨긴 돈이 없는지 매번 아저씨가 검사했는데 언제 저 많은 돈을 모았던 걸까. 인우 언니도 바닥에 흩어진 돈을 보고 놀란 듯 말이 없다가 계단 쪽을 흘깃 보고 그를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 아저씨, 팁을 잘 주거든. …… 내가 너보다 좋대, 그러면서 이 팁을……!”


두정 언니의 손바닥이 불에 덴 듯 붉게 변했고, 그의 볼도 타오를 듯, 자주 오던 사모님의 붉은 립스틱과 같은 색깔로 물들었다. 두정 언니는 바닥에 흩어진 돈뭉치를 주워 들었다.


“…… 이거였다고? …… 고작 이것 때문이라고?”


나는 둘 사이에 섰다.


“두정 언니, 오빠 말 좀 들어보자. 그런 거 아닐 거야, 응?”

“네가 전에 그랬지. 한정 누나가 그렇게 간 것도, 우리가 살아남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없어. 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널 이 방에서 못 나가게 막는 것도, 내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야.”

“김지우! 너 정말, …… 엄청난 사람이었네. 그래, 가, 가라고…….”


두정 언니가 돈을 정리해 책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네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 이제 하지 마. 그리고 가서, 돈 많이 벌어. 너는, 너는 이제 저 사람들이랑 같아.”


왜 그랬을까. 예전의 우리는 서로를 안아 주기만 했었는데. 너무 오래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게 그 이유일까. 앞에 선 사람을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못난 나에게 욕을 퍼붓고, 자책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끝까지 그 사람을 자신이라고 믿고.


그즈음 나는 인우 언니가 갖고 있던 죄책감과 무력함을 느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벽과 벽을 마주 보며 누워 있어도, 그 사이에 낀 내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어도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두정 언니는 밥을 남기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다 토하고서도, 다시 돌아와 남은 반찬을 모조리 입안에 넣었다. 지우 오빠는 오히려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 싸움 뒤에 찾아온 정적은 뭐랄까, 벽을 등진 채 날을 세우고, 서로를 노려보며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았다.

두정 언니의 배는 지우 오빠의 티셔츠 속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려졌고, 책 속의 돈뭉치는 더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는 사라지고, 우리는 그 공기에 적응해 갔다.

저 밖에 한정 언니를 두고, 우리는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결국 실업계로 진학하기로 했고, 고등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아저씨의 말에 성적 장학금을 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졸업 전에 취업하겠다, 월급이 생기면 다 내놓겠다는 말에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도 내심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다는 것이 좋았던 건지 더 이상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날, 나는 선구 오빠가 소개해 준 집에 가서 그 집 언니가 입던 교복과 체육복을 얻어 가지고 왔다. 고등학교에 가서 키가 갑자기 크는 바람에 세 벌이나 맞췄다며 투덜대던 아주머니는 ‘넌 헌 거 입어서 어떡하니, 그래도 언니가 깨끗하게 입었으니까, 이거 봐. 이건 뭐 새거나 마찬가지다?’라며 비닐봉지에 한 벌, 한 벌 조심히 담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교복을 사야 한다는 말에 아저씨는 여자의 방 서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돈 오만 원을 건넸다. ‘충분하지?’ 충분할리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교복 한 벌도 채 사지 못할 그 돈을 아주머니에게 내밀었다.


“안 줘도 되는데? 책 사는 데 보태.”


안 받겠다는 말에도 내가 한사코 부엌 식탁에 돈을 내려놓자, 선구 오빠는 나 대신 그 돈을 집어 들고 ‘소개비’라며 웃었다. 등짝을 내리치는 아주머니의 손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농담도 못 하나’라며 그 돈을 내 가방 앞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공중전화에서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졸업식엔 못 갈 것 같다며 졸업장을 미리 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교무실에서 졸업장을 받아 들고 교내 게시판에 걸린 시를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과 나는 학교 운동장까지 같이 내려가 게시판 앞에 섰다.


“강세정, 졸업 축하한다. 거기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혹시 모르니 수능은 꼭 쳐.”


전지를 받아 든 나는 조심해서 반으로 접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전지를 가방에 들어갈 정도로 접어 안쪽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방 앞주머니에서 오만 원을 꺼내 치마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집에 들어서자 보인 것은 담요를 꽁꽁 싸고 소파에 누워있는 한 여자와 아저씨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전 열 시. 나는 그들을 지나쳤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황매 올라오라고 해.”

“……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은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가 없었다. 홍매, 백매, 청매, 황매, 그리고 나, 옥매. 우리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내려오고 올라가는 순간이 겹칠 때마다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스쳐 지나가는, 고개 숙인 얼굴들이 감정을 대신했고, 치욕은 시간과 함께 몸속에 쌓여, 방 문턱을 넘을 때마다 나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 앞에 섰다. 지우 오빠가 씻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올라오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또 눈을 감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손으로 젖은 머리를 넘기고, 자신이 볼을 꼬집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빠.”

“들었어. 교복은 가져왔어?”

“응.”


문이 열렸다. 그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턱끝을 닦으며 나갔다.


“오빠 키가 더 큰 것 같아.”

“넌 매일 그 소리냐, 매일 키가 커?”

“진짠데, 인우 언니. 지우 오빠 어제보다 더 큰 것 같지 않아?”


벽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던 인우 언니는 그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그런가?’ 했다. 그는 누워있는 두정을 잠시 보다 의자에 수건을 걸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교복을 꺼낸 후 두정 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언니, 언니! 나 교복 가져왔어. 그리고 졸업장도 미리 가져왔어.”


그는 내가 건넨 전지를 받아 들더니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세정아, 난 이따 볼게.”


그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톡톡 두드렸다. 두정 언니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고는 바닥에 있는 졸업장부터 집어 들었다.


“졸업식 안 가?”

“가서 뭐 해. 졸업식, 뭐 다 똑같지.”


내 말에 인우 언니가 ‘그래도 가지’라며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비누를 쓰는데 그녀에게선 더 따뜻한 향이 났다. 그게 신기해서 나는 그녀의 품에 파고드는 걸 좋아했다. 두정 언니는 교복을 품에 가져가더니 가만히 손을 올리고만 있었다.


“언니, 입어볼래?”

“내가?”

“응, 입어봐. 교복 입어 보고 싶다고 했잖아.”

“입어서 뭐 해. 교복, 뭐 다 똑같지.”


내 말투를 흉내 내는 두정 언니를 보며 인우 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최두정 같네’ 두정 언니는 가져온 교복을 옷걸이에 걸어 비닐 옷장에 걸었다.


“언니, 몸은 어때?”


그녀는 동복 재킷 어깨 부분에 생긴 보풀을 조심해서 떼어냈다.


“좋아. 훨씬 좋아졌어.”


인우 언니는 나와 두정 언니를 불러 가까이 앉혔다.


“두정아, 신문에서 이런 걸 봤는데 미혼모자 시설이라는 게 있대. 거기 가면 도움 받을 수 있을 거야.”


손바닥에 올려질 만큼 작게 오린 부분. 두정 언니는 그 신문지의 글자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하나씩 짚으며 읽었다.


“내가 여길 어떻게 가?”

“갈 수 있어.”

“간다고 쳐, 그런데 나만 나가라고?”

“네가 먼저 가야 해. 그다음에… 우리도 따라갈게. 먼저 가.”

“난 그 말 안 믿어. 우린 죽어도 같이, 살아도 같이 아니었어?”


인우 언니는 책상 아래 작은 바구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신문지를 반 접은 다음 지갑 안에 넣었다.


“이제 그런 약속은 의미가 없어.”

“언니.”

“두정아, 언니…… 다 알아. 네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어. …… 살리고 싶잖아.”


그녀는 두정 언니의 배에 손을 올렸다.


“한정이었어도 같았을 거야. 그러니까 아무 생각하지 마. 너는 처음 왔던 대로, 여길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여길 어떻게 나가는데.“


그녀는 말없이 세정의 손을 잡았다.


“세정아, 네 가방 두정이가 가져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나는 내 전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우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내 가방을 비우고 두정 언니를 위한 짐을 쌌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상하의 1벌, 조끼, 두꺼운 양말 몇 켤레, 화장품 가게에서 얻은 로션, 샴푸. 그리고 신문지 책과 거기에 든 돈까지. 두정 언니는 가방에 왜 그 돈이 들어가는지 의아한 건지 지퍼를 잠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건 왜? 내 돈 아니야.”

“가져가. 나가면 또 어떤 상황일지 모르고, 이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라.”

“내가 이 돈을 가져가면……!”

“어떤 방식이든, 우리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서로 다 아는 것 같았지만 아는 게 없었어. 이것 봐. 다 몰래몰래, 돈을 모으고 있었어. 한정이까지.”


몰랐던 마음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실을 잡아당기니 끝도 없이 풀리고 풀리는 것 같은 마음으로, 두 사람 옆에 땅콩 모양의 실타래가 놓인 것 같았다.


“나가면 집으로 가. 거기에 가족들이 있든 없든 가서 네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 그리고 이름을 찾아. 자리를 잡으면, 세정이한테 소식을 전해줘. …… 그 사람은 널 찾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지내.”


두정 언니도 나도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찾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온 걸까.


“날 찾지 않는다고?”


우리가 그녀에게 답을 듣기도 전에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리는 너무 날카로워서 곧 집이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았다. 두정이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하자 인우 언니는 가방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마당에 있으라고 했다. 지금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말라는 말도 했다. 인우 언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우리는 왔을 때처럼 영문도 모른 채 각자가 가야 할 길 쪽으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정 언니는 지하실을 통해 마당으로, 우리는 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울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에 미안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식탁에 놓인 유리 물병에 선명하게 찍힌 핏자국이 먼저 보여, 나는 계단에 발을 내려놓기가 무서워 인우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난간 곳곳에 피가 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두근대고 있었다. 바닥을 세게 치고 올라와 머리 위로 솟을 것 같았다. 나는 인우 언니의 티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모든 것이 얼어버린 듯 손을 대면 깨져버릴 것 같아 난간을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새어 나오는 입김을 막으려 입술을 꽉 다물고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가 2층에서 제일 먼저 본 것은 1층에서 내가 보았던 여자-지금은 벌거벗은 채 피 묻은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였다.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더니 정신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사모님! 약속해요! 약속만 하면 된다니까요?”


지우 오빠의 목소리가 아저씨의 방에서 들렸다.


“해, 해! 한다고!”


나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닥에 고인 피를 보자 한정 언니가 떠올라서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인우 언니는 피를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벽을 등지고 주저앉았다가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렸다. 벌거벗은 지우 오빠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왼손에 든, 식칼에서 떨어지는 피를 보자마자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물을 수도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인우 언니는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뺏어 들었다.


“됐어. 그만해.”


나는 엎드린 채 방 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인우 언니의 눈을 보았다. 칼을 들고 있는 동생을 보고, 놀라지도 울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고 그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을 넘겨받은 것 같은 모습이 내가 아는 인우 언니가 아니었다. 그때 한쪽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가, 고통에 입을 닫았다가 하더니 서랍장을 열고 티셔츠를 꺼내 비명을 지르며 다리 이곳저곳을 묶기 시작했다. 그의 한쪽 다리를 어떻게 해놓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우 오빠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병원에 가시든지. 사장님은 이름이 있어서 좋겠어요. 사모님, 약속 지키는 거예요.”


하농 60번.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민아에게 이건 얼마나 빨리 쳐야 합격하는 거냐고 물었던 날, 바보 같은 소리 말라며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강세정, 하농은 말이야. 오른손과 왼손의 균형, 소리의 정확성이 중요하단 말이야. 이건 속도전이 아니야, 빨리 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니까?“


빨리 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

노 위에 손가락만 얹어놓은 것 같아' 그때,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미끄러지며 움직이던 가느다란 손가락 아래에서 퍼지던 소리. 인우 언니의 양말을 적시고 있는 동그랗게 고인 핏물 위에서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기울어진 너를 안고(김지우)


네가 나에게 죽음을 말했던 날로 기억한다.

나는 네 손등에 남겨진, 이 빠진 칼날의 흔적에 기대

나는 네 머리에 남겨진,

엉망으로 튀어나온 흉터에 기대

나는 누군가 베어버린 너의 날개에 기대

나는 말할 수 없었던 우리의 미래를 꿈꾸었다.


나는 꿈꾸고 너는 끝을 보고

나는 너와 살고 싶었고 너는 죽고 싶다고 했다.


4월의 어느 날, 눈이 내렸다.

너는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발을 세웠다.

너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고 너의 팔이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너는 내려앉은 눈이 소름 끼치게 차갑다고 웃었다.

나는 기울어진 너를 잡아당겨 안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얼룩진 렌즈를 손으로 닦아내듯 너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직 있어. 아직도 있어.

사람들도 있고, 나도 있어.


사람들은 가도, 너는 있어야 해.

눈이 그쳐도 너는 있어야 해. 봄이 와도 너는 있어야 해.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비에 모두 잠겨도 너는 있어야 해.


답하지 않는 너의 마음을 나는 모른다.

너는 우산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를 숙이고

단지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시선에 의지해 걸어간다.

미끄러운 길 위, 너는 춤추듯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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