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이 그릇 밑에 붙인 짧은 메시지를 읽고 잘게 찢어 물과 함께 삼켰다. 떠난다는 말과 일기장을 가져가겠다는 말. 그 옆에 웃음 표시. 나는 똑같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가 종이를 입 안에 깊숙이 넣고 꿀꺽 삼켰다.
벽에 기대있는데, 바닥에 누운 것 같았다. 바닥에 누우면 거꾸로 매달려 천장을 걷는 것 같았다. 장판 틈 사이로 바퀴벌레의 더듬이가 보였는데 녀석과 싸울 힘도
없었다. 한쪽 다리가 고장 나 일어선대도 쫓아갈 수 없을 게 뻔했다. 거꾸로 매달리고 싶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기억을 더듬어 아주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시커먼 얼굴을 닦아 주던 사람, 아이들이 구멍 난 옷을 입었다고 놀리면 어느새 나타나 나무 막대기를 던져 쫓
아주던 사람, 옆에는 언제나 누나가 있었다. 키가 이만큼 더 커서, 머리가 여기까지 닿으면 그땐 누나 대신 다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면 누나는 ‘일단 커 봐’라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정했던 선을 넘어선 날부터 나는 누나의 키보다 한 뼘이나 더 커, 이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분명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인간의 말보다 짐승의 소리를 더 내고 있는 현실에도, 서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하루를 버티게 했다.
그래서 지켜야 하는 사람의 부재를 상상조차 하기 싫어 그저 애를 쓰고, 몸부리림 치며, 발가벗고 구걸했다.
두정은 어디까지 갔을까 생각하다 다시 일어나 앉았다.
정말로, 세정이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낯선 자의 침입, 머무름과 또 부재를 찾아내는 것이 짐승의 본능처럼 익숙했다.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물끄러미 보다 벽을 잡고 일어섰다. 손잡이를 잡고 창문을 옆으로 밀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누나의 작은 발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누나에게 닿지 못했다. 밤을 알리듯 동네가 조용해지면, 누나
의 목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쟁반 위,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컵 속에 담긴 보리차가 떠올랐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을 뭐로 틀어막았을까. 숨도 쉬지 못하고 버티는 모습이 그려져 가슴을 내리쳤다. ‘누나, 그러지 마. 숨 쉬어, 그러다 죽어’ 열린 문 앞에, 광택 나는 초록색 발톱을 제대로 지우지도 않고 다시 빨간색을 덕지덕지 바른 안매화가 서 있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술 냄새가 빠지지 않은 것인지 그저 보기만 했는데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녀는 라면 두 봉지를 방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문을 다시 닫혔다.
배가 고팠다. 발목을 손으로 쥐었다. 뼈가 드러난 다리와 달라붙은 엉덩이. 사람에서 무언가로 변하고 있는 것일까. 온몸을 뚫고 뾰족한 것들이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이 방에 갇히고, 다음 날 남자들이 올라와 방 안의 가구를 모두 빼갔다. ‘독방치고 평수가 나오네’ 그들 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커튼을 뜯어 칼에 찔린 곳을 묶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 눈앞에 보였다. 티셔츠를 뭉쳐 베개로 삼고 잠을 청할 때마다 한정 누나를 떠올렸다. 시트를 적셨던 피와 이미 죽어있었던 영혼과 가끔 중얼거리던,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들. 누나의 심장 위에 손을 대고 누를 때마다, 그래서 누나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살리고 있는지, 죽이고 있는지 몰라 무서웠다.
그날, 두정의 그만하자는 목소리는 박제가 되어버린건지 그녀와 대화하고 있을 때도, 밥을 욱여넣을 때도, 세정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도, 인우 누나와 다툴 때도 들렸다. 마치 나만이 매화네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는 계시 같았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결국, 하긴 했어.”
나는 저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세게 주무르면서 중얼거렸다. 라면을 부순 다음 한 조각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또 눈이 감겼다. 눈을 감으면, 그래도 시간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누군가의 발에 밟히기 직전, 그 순간 신발 바닥이 어떤 무늬인지, 밟히면 죽을 것인지, 죽지 않고 살면 어떻게 될 것인지-내장이 터지고도 살아있는 벌레처럼 머릿속에 있던 모든 생각들이 뿜어져 나와 뇌 속의 혈관이 점점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디에서 나는 소음인지 방바닥이 쿵쿵 울렸다. 기어가서 문에 귀를 갖다 댔다. 다시 바닥이 쿵쿵 울렸다가, 조용해졌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나?“
이번엔 앓는 듯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대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쪽 문이 열렸다가 닫혔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와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나는 세정과 같은 교실에 앉아 있었다. 키가 작은 두정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제 안경을 맞춘 건지 검지로 안경을 다시 올리더니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세정은 서랍 속에서 국어 교과서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한정 누나와 인우 누나가 긴 복도를 뛰어와 매점에서 사 왔다며 빵을 던졌다. 날아오는 빵을 한 손으로 잡고 흔드는데, 부풀어진 봉지가 뻥 소리를 내며 터졌다. 빵 위에 발린 달콤한 설탕 시럽 냄새가 주변으로 퍼졌다. 별사탕이 분수처럼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가만히 있어도 달콤한 것들이 온몸을 감쌌다.
“지우야! 지우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입안에 흘러 들어오는 물에 놀라 입을 벌리자,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인우 누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누나?”
머리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낮인지 빛이 바닥에 닿아 있는 게 보였다. 꿈인가, 아니 죽었나 보다.
드디어, 우리 모두 죽었나 보다. 그래서 문이 열렸고,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됐나 보다.
“정신 좀 차려! 누나야, 지우야!”
살아있으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난 어느 날, 눈을 뜨고 누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미음에서 죽으로, 곧 밥을 먹게 되자 다리에 살이 붙고, 손톱이 옅은 분홍색을 띠고, 발이 따뜻지더니 더 이상 두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불 아래서 고치처럼 웅크리고 잠만 자다가 누나가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었다.
물을 것이 많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누나는 수시로 내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그때마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두 손으로 쓰다듬다가,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방을 처음 나오던 날, 누나는 내게 지팡이를 건넸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니 옆집 할아버지 것이라고 했다. 버리려고 내놓은 것을 주워 왔다, 곧 저 집을 헐 건지 짖을 치우더라는 말을 들으며 지팡이에 힘을 주어 한 걸음 뗐다. 방 밖으로 나오니 처음 보인 것은 방마다 닫혀있는 문이었다. 가만히 서 있자 누나가 내려가자며 팔을 잡았다. 난간을 잡고, 계단을 하나씩 내려왔다.
“누나, 우리 죽었어?”
누나는 내 질문에 놀라 잡고 있던 지팡이를 놓쳤다가 1층에 뒹굴고 있던 지팡이를 허겁지겁 주워들었다.
“무슨 소리야?”
“죽은 게 아니라면, 우리가 이럴 수 있어?”
“있어.”
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꿈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고. 나를 부엌 식탁에 앉히더니 곧 밥솥에서 밥을 퍼 담았다. 깨끗하게 씻긴, 처음 보는 그릇들이었다.
처음부터 거기 서 있었던 사람처럼 누나는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다.
세정이 떠난 후,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나는 반짝이는 금색 수저를 손에 쥐고, 밥을 떠 국에 말았다. 내가 ‘맛이 나네’라고 하자 누나는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순간 발목이 뻐근하고 아파 허벅지를 붙잡았다.
“많이 아팠지?“
다쳤을 때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서로에게 아픈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누나. 어떻게 된 거야? …… 그 둘은?”
“먹어. 이거 먹고 나면 말해 줄게.”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거야?”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컵에 물을 따랐다. 물 색깔이 보리차가 아니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누나는 ‘결명자차, 눈에 좋대’라고 말하고는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한 컵을 다 마시고 나를 보았다.
“세정이 어디로 갔어?”
누나는 밥그릇에 손가락을 대고는 톡톡 두드렸다. 답을 듣기 위해, 염증으로 헐어버린 혀와 입안의 통증을 참고 밥알을 씹기 시작했다.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2층에서 들리는 소리에 숟가락질을 멈췄다.
내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자, 누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일어나, 국그릇에 밥과 국을 말더니 숟가락을 담갔다.
“밥 주고 올게.”
“누구 밥?”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