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이 보여준, 지우가 썼다는 시들은 모두 사랑 이야기였다. 인우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온다는 한정이 말했던 그 남자는,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한정은 세탁기 앞에서 몸을 구부린 채 빨래를 꺼내고 있었는데, 생각
지도 못한 질문에 빨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낭패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그 사람이라고, 믿을만한 사람이겠어?”
인우는 그녀가 건네는 빨래를 일부 넘겨받고 그게 무
슨 뜻이냐고 물었다.
“우리 다 그렇게 왔잖아. 믿고 싶은 마음으로. 이 지옥에서, 나를 도와 주겠으니 믿으라는 사람 말 ……못 믿어. 여기가 어딘데. 그 사람이 애초에 여길 왜 온 건
데.“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인우는 매화가 가지고 다니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중에 창고 방 열쇠를 집었다. 세정이 말했던 매화가 돈을 숨기는 곳, 부식이 절대 들어가지 않는 곳. 그녀는 방문을 열고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방에 들어섰다.부식이 팔던 물건들, 책들, 어디에서 주워 온 전자제품들 사이를 비집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 매화가 자개장을 들이기 전까지 화장대로 썼던 나무 수납장이 보였다. ‘언니, 마지막 칸’
인우는 서랍장을 천천히 열었다. 주황색의 촌스런, 반짝이는 보자기를 걷자, 그 속에 서랍을 꽉 채운 지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을 대고 감촉을 느끼는 안매화가 상상되자 그녀는 다시 보자기를 덮고, 서랍을 닫았다.
이 돈은 우리의 치욕이다. 2층 방의 불이 켜졌다가 꺼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부식의 노트가 바뀌고, 매화의 옷장이 채워지고, 세정이 보리차를 자주 끓여댔다.
인우는 방을 나와 문을 잠그고 2층으로 향했다.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한정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부엌에 서 있을 때는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소파에 몸을 기댈 때는 세정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간을 잡을 때마다 죽은 한정이 팔짱을 끼고 같이 걷는 것 같았다.
2층 방의 문을 열었다. 매화가 또 소주병을 집어 던졌는지 깨진 병과 유리 조각들로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방구석에 앉아 마른안주를 손바닥으로 으깨고 있던 그녀는 인우를 보자 반가워 기어 오다 유리에 찔려 뒤로 주저앉았다. 피가 나는 무릎을 손으로 대충 닦는 모습이, 그러고도 아프지 않다는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세정을 떠올리게 했다. 인우는 거실에서 소주 몇 병을 더 가져와 안쪽으로 굴렸다.
“언니, 고마워! 내가 이번 달 말에 꼭 갚을게!”
“이미 계산했어.”
“아, 그랬나?”
저런 여자였다.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다. 인우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 강부식한테 전화 좀 해 봐, 그 자식이 내 돈을 들고 튄 것 같아. 잡히면 가만 안 둔다고 전해.”
인우는 빗자루를 가져와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지린내와 곰팡내가 나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동안 매화는 소주 반병을 비웠다. 그녀는 깨끗해진 바닥을 기어와 인우의 팔을 붙잡았다.
“전화해 보라니까?”
그녀의 깊게 팬 두 눈과 시든 잎처럼 노란 얼굴, 대충 묶은 머리 사이로 늘어나는 흰머리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인우는 팔을 떼어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일어났다. 쌓아둔 비닐봉지 중 한 장을 꺼내 빈 병을 넣었다. 줄어드는 소주가 아쉬운지 그녀는 병을 위로 치켜들고는 얼마나 남았나 보았다. 햇빛이 들어찬 방에, 그녀의 그림자는 곰팡이를 머금은 듯 거뭇하고 크기만 했다. 인우는 봉지 끝을 묶고,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구부렸다.
“네가 죽였잖아.”
“…… 누구를?”
“강부식. 네가 죽였잖아. 그리고 저 마당에 묻었지. 네 손으로 파묻었는데, 기억 안나? 그러고는 좋아서 매일 아침 그 위를 걸어 다녔잖아. 실실 웃으면서.”
그녀는 생각이라는 걸 해보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내 머리가 아프다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인우를 떠밀었다.
“나쁜 년! 너도 한패지? 내 돈 안 주려고 그놈이랑 붙어먹은 거야?”
그녀는 병을 뒤집어 세우고, 혀를 갖다 대도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자 또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인우는 방문 앞에 빈 소주병과 청소 도구를 두고 부식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주 두 짝이 방문 안쪽에 쌓여 있었다. 개지 않은 이불들이 너저분한 채였다.
그날 부식은 어디서 싸움이라도 하고 온 건지 얼굴과 손에 긁히고 쓸린 자국이 잔뜩이었다. 뭣하면 다 죽여 없애버린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다 텔레비전 옆에 있던 꽃병을 붙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텔레비전 없애고 너 보면 되겠네. 아주 코미디야, 강부식.“
부식은 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꽃병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매화에게 집어 던졌다. 매화는 벌떡 일어나 부식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댔다. 부식은 그녀의 허리춤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더니, 주저앉은 그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인우는 계단 중간에 쟁반을 들고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2층 방으로 올라가 소리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부식이 욕지거리 하며 올라와 방문을 세게 닫고 들어가자, 곧 매화도 따라 올라와 그의 방을 발로 걷어 차더니,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쿵쾅거리며 1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열고 마시다 만 맥주를 꺼내 바로 입에 가져다 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인우는 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쟁반을 탁자 위에 그대로 두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매화는 부엌 식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인우는 뜯긴 매화의 머리카락을 주워 올려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녀는 방으로 내려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감았다 뜨니 매화가 눈앞에 있었다.
“야, 야! 일어나 봐!”
매화는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셔 다시 눈을 감는 인우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일어나라고!”
매화가 인우를 계단 앞에 세웠다. 주먹 쥔 손으로 인
우의 등을 찌르자, 그녀는 맨발을 계단 위에 올렸다. 둘은 부식의 방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매화가 방문을 잡아 돌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인우는 지우가 있는 방에 시선을 두었다. 이게 너를 위한 길일까.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가야 하는 걸까.
인우는 문턱을 넘어섰다. 팔을 뒤로 뻗어 손잡이를 잡아 문을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매화가 부식의 얼굴에 이불을 덮는 걸 지켜보았다. 부식이 이게 얼만 줄이나 아냐며 손에 쥐고 흔들어댔던 비싼 넥타이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잠에 취해, 연신 코를 골아대다가 이따금 숨이 막히는 듯 컥 하고 멈췄다가 다시 코를 골았다.
매화는 인우를 향해 손짓했다. 지금이라도 걸음을 멈춰야 하나. 가기 싫었다. 그녀의 까딱거리는 손에, 소름 끼치는 미소에 답하기 싫었다.
매화가 그의 몸에 올라탔다.
세정이 보내 주었던 사진에 찍혀 있던 배 한 척과 갈매기, 크고 작은 돌멩이들. 바위와 바위 사이에 파도가 부딪쳐 포말이 흩어지고, 빨간 점 같은 태양 아래 귀한 것들이 끝도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아닐지도 모르지. 세정이 바다라고 하면 바다고, 우주라고 하면 우주였으니.
인우는 출렁이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매화는 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과 넥타이를 붙잡은 인우의 손은 마치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