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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07. 2023

그 자리에 멈춰서

일기장- 여름, 2012

우박이 쏟아지더니 곧 근처에 있던 나무가 쓰러졌다. 나는 천둥 번개에 소스라치게 놀라 문 뒤로 숨었다가 바람에 열린 문 틈 사이로, 꺼져버릴 듯한 어둠 사이로 투명한 빗줄기가 땅바닥을 뚫고 흐를 듯이 계속,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매일 보던 그림 같던 풍경은 당장이라도 박살 날 듯 여태껏 들려준 적 없던 소리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날아가는 의자를 붙들다 되려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봄 내내 아름다웠던 꽃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숙였고 내 방을 장식했던 장미는 덩굴째 뒤엉켜 기괴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흐르고 선명해진 구름 사이로 붉디붉은 하늘빛을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숲 속에서 사슴이 한 마리 풀쩍 뛰어 살아있음을 견뎌냈음을 알려주었다. 엄마를 뒤따르던 아기 사슴이 쏟아져 내린 흙더미에 고개를 파묻고 꽃을 찾는지 무얼 찾는지 연신 끄덕거린다. 그러다 엄마가 뛰어가자 이내 고개를 든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 사라져 버렸다.

그 여름의 꿈같던 날. 살아있음에 감사했던 날. 쓰러진 나무 사이, 아이들은 비가 그친 것이 좋은지 닿을 수 없이 높이 솟아있던 나무가 가까이 있는 것이 신기한 것인지 빙글빙글 돌며 논다. 한숨과 정적과 웃음이 미묘하게 감돌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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