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업이 필요했다. 강부식은 낮에는 안매화에게 ‘집안’ 일을 맡기고 자신은 바깥일을 시작했다. 그는 어린이용 도서 방문 판매일을 시작한 후 달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공짜 책을 쥐여주며 환심을 샀다. 그 동네 아이들은 부모가 집을 비우면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모여 잠을 자고, 밥을 챙겨 먹고,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거나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할 수 있는 놀이를 지칠 때까지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모들이 두꺼운 손을 무섭게 휘두를 때면 아이들은 바퀴벌레처럼 감쪽같이 흩어졌다. 선풍기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할 여름이었나, 부식은 쪽방촌 끝 방에 살고 있던 인우와 지우를 데려왔다. 엄마는 애초에 없었고 아빠는 집을 나간 지 일주일이 됐다고 했다. 그의 손에 든 크림빵을 보자 두 아이는 방문 앞까지 기어와 어서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손가락 사이에 낀 크림이 아까운지 혀끝을 대고 남김없이 빨아먹었다. 그가 아이들을 ‘매화네’에 데려다 놓은 다음 날 한정과 두정도 ‘매화네’에 들어왔다. 아이들의 계부는 구멍가게 앞에 앉아 버려진 꽁초를 주워 피우거나 시장을 돌아다니며 손님이 남기고 간 술을 제 것인 양 가져와 마시곤 했다. 엄마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돕거나, 인력 사무소에서 연락이 오면 새벽같이 나갔다가 그다음 날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 엄마가 돈을 벌어오는 날이면 계부는 그 돈을 들고 사라졌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이어달리기 같았다. 결승선도 출발선도 흐릿해졌고 뛰어도 되고 걸어도 되지만 배턴은 넘겨져야 하는. 그런 날에는, 엄마는 늘 새우등을 하고 누워 며칠을 앓았다. 그렇게 또 배를 곯다가 엄마가 일을 하러 나가면 계부가 다시 들어왔다. 집에는 두 아이 외 남자 형제들이 더 있었다. 남자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한정과 두정을 괴롭혔고, 형제들이 집에 없으면 계부가 미쳐 날뛰었다. 부식은 갈색 서류 가방에 넣고 다니던 책을 꺼내 한정에게 내밀었다.
“아저씨가 사회사업이라는 걸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는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한정을 향해 좀 더 다가갔다. 곧 먹잇감이 될 짐승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한정의 손을 잡더니 아직 다 크지 않은 손에 책을 쥐여 주었다.
“네가 언니구나? 야, 너 공부 잘하게 생겼네. 너 책 좋아하겠다. 아저씨 집에 책이 많아 처치 곤란이거든. …… 쉽게 말하면 너희는 그냥 와서 잘 먹고 잘 자면 되는 거지. 날도 더운데 애들만 두고, 뭐 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이거. 돌아다니다 보면 말이야? 아저씨도 배고파서 뭐라도 먹어야 하거든. 이거 너희 먹어.”
부식은 두정이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슈퍼에서 파는 단팥빵을 꺼내더니 포장지를 벗기고 반을 갈라 둘에게 내밀었다. 옆에 서 있던 두정이 한정의 눈치를 살피다 그가 내민 빵을 깨물더니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언니도 먹어. 엄청 맛있어!”
한정은 자신이 내려놓은 책을 가방에 집어넣는 부식을 지켜보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가방에 짐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정을 부르더니 잘 열리지도 않고 닫히지도 않는 옷장에서 바지를 꺼내 잠옷 바지를 벗기고 갈아입혔다. 그렇게 그 집에는 매화, 세정, 인우, 지우, 한정, 두정 그리고 부식까지 일곱 명이 살게 되었다.
매화네는 시장 입구로 들어와 골목을 두 개 지난 곳에 자리했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고 닭 튀기는 냄새, 전 부치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대문을 열면 오른쪽 마당엔 이름 모를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고, 그 가지는 2층 베란다까지 뻗어 올라가 방에서 창문을 열면 나무와 마주하게 되었다. 부식은 곧 방문 판매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곧 평판이 좋지 않은 부잣집의 운전기사로 들어갔고, 그다음엔 정원 관리사로 취직했다. 기사가 되어 매일 다른 손님들을 태워 왔다. 정원 관리사로 간 집의 사모님과 친구들도 곧 ‘매화네’에 들렀다. 아이들이 온 뒤부터 그 집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매일 밤 열리고, 닫히고, 또 열리고, 닫혔다.
아무것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 세계는 열고자 했던 사람에게만 존재했다.
아이들은 마치 문을 닫은 폐공원 안에서, 각자 다른 놀이기구에 앉혀,
서로의 비명으로 아직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그곳엔 거울이 없어 아이들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었다. 매일 아침 마주 보고 서서 씻기지 않은 거품을 서로의 소매 끝이나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자, 자기의 얼굴은 없어져 버리고, 상대방의 얼굴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나의 얼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두정은 다 커버린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날, 거울 속의 사람이 자신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매일 보던 얼굴인 한정이 되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 '나인가요?'라고 물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탈출해서 혼자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아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집으로 간들 무슨 소용이겠냐고.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텐데. 그러니 서로를 기억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렇게 살아 있음을. 그렇게 매일 아침 손에 닿는 피부, 온기, 터진 입술의 감촉을 마주 보며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층 집에 살고 싶었어. 언젠가 본 적이 있거든. 지우랑 이 동네 저 동네 구경 다닐 때 커다란 집 담 아래로 불쑥 고개를 내민 빨간 꽃이 너무 예뻤어.”
인우가 지우의 어깨를 감싸 쥐고 그 집에 대해 말하면, 지우는 잠자코 있다 ‘그래, 우리 나중에 그 집을 사면 되지’라고 말했다. 인우가 그 집에 대해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지우는 더 이상 그 집을 사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하루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들시들한 귤껍질 같은 색의 오후가 지나면 창가로 모여들어 발끝을 세웠다. 켜지는 가로등, 꺼지는 가로등, 오가는 사람들을 상상했다.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나풀나풀 걷는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오후 다섯 시의 아주머니, 서류봉투를 한쪽 겨드랑이에 끼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든 아침 여덟 시의 아저씨, 저녁 일곱 시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이따금 우는 고양이와 헐떡이며 걷는 개의 산책. 모두가 환상 같았다. 어느 날 인우는 서랍 속에서 종이를 꺼내 잘게 찢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면 조각 하나가 매트리스 밑에 숨겨졌다. 아이들은 낑낑대며 매트리스를 들었고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밀어 넣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바쁜 하루였다.
어떤 하루는 기억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 저 작은 종잇조각 하나하나에 새기리라.
아이들은 절대 울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어떤 순간이 와도 절대 울지 말자고. 그러면서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며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