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아이들 - 「한정」

by 제인

한정이 ‘기억’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그녀는 삶에서 자신을 던지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달라질 것이 없는 삶이라는 건 얼마나 인간을 비겁하게 만드는지, 또 초라하게 만드는지 한정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두 살 아래 여동생 두정에게, 한정은 자신에게조차 주지 못한 연민과 동정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고통이 몰려오든,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든, 두정만은 제 어깨 위에 올려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야, 여기에 서 봐.”

“…… 왜?”

“서 보라고.”


중학교 졸업을 앞둔 이복 오빠, 장석은 한정을 벽에 세우더니, 새아빠가 이발소 앞에서 주워 온 둥근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납작한 뒤통수, 두툼한 코끝, 다시 납작한 뒤통수와 매서운 눈매, 납작한 뒤통수를 덮은 짧은 머리카락, 얇은 입술.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가더니 의자가 멈췄다. 한정이 움직이자, 장석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서서 한정의 묶은 머리끝을 잡아챘다.


“누가 움직이래?”

“뭐 하자는 건데.”

“그냥 보잖아. 제대로 서. 안 그러면 맞는다?”


한정은 벽에 기대섰다. 다시 의자가 돌기 시작했다. 열린 문틈으로 두정의 얼굴이 보였다. 한정은 그가 뒤돌 때 두정에게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좁은 마루와 문이 보였다.


“너, 나랑 친한 창후 형 알지? 이따 그 형이 올 거야.”

“……”

“네가 예쁜가? 그 형이 널 보고 예쁘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나한테, 좀 보게 해 달라는 거야. 가까이서 보고 싶대. 그냥 이렇게, 나처럼.”


한정이 그날 일을 두정에게 털어놓았던 날, 그녀는 ‘그때, 돌아가던 의자를 걷어차 장석의 다리라도 부러뜨렸어야 했다’고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손끝에 말아 올려진 치맛자락이 자꾸만 떠올라서 한정은 그날 이후로 절대 치마를 입지 않았다. 발등에 올려진 가늘고 긴

손가락이 순식간에 뱀이 되어 온몸을 훑을 것 같았다. 한정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두 사람이 방을 나서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따금 창후가 두정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미소 지을 때마다, 한정은 두정을 놀이터에 놀게 두고 좁고 긴 계단을 올라 그의 집으로 갔다.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들의 외침은 이곳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한정은 맨발인 채였다. 구겨 신은 운동화로 발끝을 세우고 난간에 몸을 기댔다. 저 멀리 산 바로 아래 집들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산이 산처럼 보이지 않을 때, 집들은 산그림자에 먹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수명이 다 된 전구가 깜빡거리며 아직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정은 바

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이 너덜너덜하게 벗겨진 운동화 위로 빗물이 떨어지자, 주머니에서 재빨리 양말을 꺼내 신고 두정을 향해 달렸다.


“언니!”

“두정아!”

“언니, 비 와!”


두정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높게 발을 구르다 풀쩍 뛰어내린 건지 그네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두정의 머리 위에 손 우산을 씌워주고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통통 뛰는 작은 발을 보자 한정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을 열고 마루에 두정을 앉히고 신발을 벗겼다. 두정은 손바닥으로 한정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더니 ‘머리 구불거리는 거 봐. 엄마가 언니랑 나랑은 나중에 파마 안 해도 되겠대. 파마 안 해도 이렇게 구불거리니까 얼마나 좋냐고, 돈 안 드니 좋다고’라고 말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톡톡 쳐서 말리고 젖은 양말은 화장실 대야에 두었다.


“언니가 나중에 빨게.”


한정이 부엌으로 가 쌀을 씻는 동안 어디에 다녀온 건지 장석과 이석이 옷에 흙을 묻힌 채 야단스럽게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운동화는 장석이 아버지를 졸라 받아낸 유명한 브랜드 운동화였다. 그 돈은 엄마가 하루 종일, 몇 날 며칠을 일해도 겨우 만질 수 있는 돈인데 고작 운동화를 산다고 엄마의 지갑을 털어갔다. 한정은 쌀뜨물을 냄비에 부으면서 그 운동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정이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싱크대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올라가 있지, 왜 왔어?”

“오빠들 시끄러워. 엄마 언제 와?”

“나도 몰라.”

“언니.“


두정은 무릎을 끌어안더니 고개를 숙였다. 한정은 손등에 찰랑거리는 물이 모자라는가 싶어 냄비에 물을 더 부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젖은 손을 바지에 툭툭 쳤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두정을 보며 불안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화냥년이 뭐야?”


두정이 고개를 들었다가 한정의 입이 놀란 듯 벌어지자 ‘안 좋은 거야?’ 묻고는 무릎에 이마를 갖다 댔다.


“누가 그랬는데?”

“장석 오빠가. 우리 엄마가 화냥년이래.”

“아무 뜻도 없는 거야. 그냥 욕이야. 나쁜 욕.”

“그럼, 아무 뜻도 없는 건 아니잖아. 왜 욕해? 왜 우리 엄마 욕해?”


울먹이는 두정의 목소리 뒤로 이석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 장석이 나타나 밥은 언제 되냐고 묻더니 실실 웃으며 두정의 어깨를 두드렸다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볼을 찔렀다.


“너네 엄마 오늘도 안 들어오지? 거 봐. 화냥년이라니까?“

“하지 마!”


한정의 외침에 장석이 일어섰다.


“너 지금 뭐랬냐? 하지 마?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너도 네 엄마랑 똑같잖아. 얘도 곧 똑같아질 거고.”


장석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한정의 어깨를 밀었다. 한정은 두정을 일으켜 세워 손을 붙잡아 방으로 데려갔다. 다락방 문을 열고 두정의 등을 밀자 속옷 바람으로 엎드린 채 만화책을 낄낄대며 보고 있던 이석이 둘의 등장에 시선을 뒀다. 그러나 곧 텔레비전 소리를 올려야겠다며 발가락을 뻗어 볼륨 다이얼을 돌리더니 옆에 있던 다른 만화책을 집었다.


“야!”


한정은 장석을 뒤로하고 맨발로 마루를 내려가 그의 운동화 한 짝을 들었다. 문을 열자 굵은 빗줄기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골목 곳곳에 물웅덩이가 많이 보였다. 한정은 운동화를 든 손을 어깨 뒤로 들어 올렸다.


“하지 마! 야! 너 하면 죽어! 죽여 버린다!”


한정은 할 수 있는 한 힘껏 운동화를 던졌다. 운동화를 던질 때, 그녀는 이미 누구에게든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운동화는 웅덩이에 빠졌다가 장석에 의해 이내 화장실 대야에 던져졌다. 장석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운동화를 헹구는 사이 한정은 남아있던 한 짝을 더 멀리 집어던졌다.


그날 냄비 밥은 새까맣게 탔다. 한정은 새벽까지 회초리를 맞다가 다락방에 끌려 올라온 뒤, 새아빠의 발길질에 구석으로 처박혔다. 두정은 부풀어 오른 한정의 두 다리를 보며 밤새 숨죽여 울었다. 이튿날 새벽, 엄마는 연고를 가지고 올라와 두정에게 건넸다.


“언니한테 전해. 이 집에 있으려면 찍소리 말고 있으라고.“


엄마는 계단 끝에 천 원짜리 몇 장을 올려두었다.


“오빠들이 못 찾는 데 숨겨놔. 굶지 말고 빵이라도 사 먹고.“


절대 풀리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는 그녀의 파마는 정말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다락방 계단 아래로 산등성이 같은 머리가 멀어지더니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한정은 어느새 일어나 그 돈을 손에 쥐었다. 한 번, 두 번 접은 다음 신문지를 엮어 만든 책 사이에 끼웠다. 연고를 잡고 엎드린 다음 무릎을 접어 종아리가 보이게 했다. 손끝에 연고를 짜자 두정이 기어와 입술을 모으고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아직 안 발랐어’ 흰 연고가 종아리를 덮었다. 두정은 기다렸다는 듯 더 세게 바람을 불었다. 쫑긋거리는 두정의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이 종아리를 스치자, 꽃가루를 안은 봄바람처럼 간지러웠다. 한정은 엎드리더니 ‘아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눈물이 흐를 새도 없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운동화를 집어던졌던 물웅덩이처럼 턱 아래에 금세 눈물 웅덩이가 생겼다. 한정은 두정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소매로 닦고, 손톱으로 웅덩이를 반으로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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