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아이들 - 「인우」「세정」

푸르고 검고 노르스름한 멍들

by 제인

「인우」


인우는 지우의 손을 잡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다 어느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선물 세트를 싸는 용도로 보이는 노르스름한 황금빛 보자기를 주웠다. 지우는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양쪽 끝을 묶었다. 인우는 지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보여?“

“영웅, 세상을 구할 것 같이 보이네.”


그 말에 지우는 썩은 어금니가 다 보이게 활짝 웃었다. 그게 좋냐고 묻자, 세상을 구하면 구한 값을 받지 않겠냐고 그 돈으로 집을 사서 누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다고 했다.


“영웅은 그런 게 아닌데?”


지우는, 그렇다면 영웅은 되지 않겠다고 했다. 양쪽 팔을 쭉 뻗고 언덕 끝까지 달리자 보자기는 새의 날개처럼 곧게 보이기도, 바람을 머금어 둥근 공처럼 보이기도 했다.


“돈 많은 영웅도 있을 거야.”


지우는 어금니가 아픈지 한 손으로 볼을 감쌌다.


“근데 누나, 이가 너무 아파.“


지우가 몇 번이나 어금니가 아프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취해 있거나 잠을 자거나 집에 없었다. 인우의 시선은 지우의 부은 볼에 머물렀다가 곧 멍든 눈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인우를 때리려 손을 올릴 때마다 지우는 인우만을 위해 존재하는 영웅처럼 나타나 그 손의 무게를 혼자 감당했다. ‘그 덕에 너는 맞지는 않잖아' 같은 골목에 살던 고등학교에 다니던 언니가 똑같이 부은 눈으로 심드렁하게 말한 적 있었다. 집안 살림살이가 깨지는 소리가 밤새 들려도 인우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멍든 눈을 하고 웃는 지우를 보며 인우는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에 사랑스러운 지우를 두고 오는 것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우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겠지.


“다신 나서지 마. 누나 괜찮아.”


지우를 데리고 치과에 가서 진료받고 나오는 길에 지우는 선생님이 챙겨준 멍 크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았다.


“이도 치료하고 크림도 받았어. 치과 의사가 될까 봐. 저 선생님은 내가 아는 어른 중에 제일 좋은 사람 같

아. 근데 누나. 우리가 가난해서 치료비가 공짜야? 그건 진짜 좋다. 그렇지?“


인우는 지우가 되고 싶었다. 지우처럼 가난이 주는 슬픔 같은 건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인우는 가난에 다치고 가난에 위로받는 현실이 싫었다. 조금만 가져도 행복감을 느끼는 게 싫었다.


손에 쥘 수 없는 어떤 것.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도 되는 자유.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열두 살. 열은 떼버리고 다시 두 살로, 지우가 태어났을 때로. 마음 가는 대로 웃을 수 있었던,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심 아팠을 것 같은 두 살로.





「세정」


세정은 여덟 살 때 자신이 안매화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세정은 매화를 ‘아줌마’라고 불렀고, 자신은 부식의 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강부식이 그저 빌려 쓴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어째서 그 사실을 이제와 알려주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둘의 친딸이든 아니든 달라질 건 없었다. 세정은 언젠가 진짜 엄마나, 부잣집 할아버지, 할머니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저 소망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잘 들어. 네가 내 딸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알아들어?”

“네.”

“대신, 학교는 다니게 해 줄 거야. 지하실 애들은 아니야. 알았니?”

“네.”

“학교 다닌다고, 헛바람이나 채우지 말고, 학교 끝나면 바로바로 집에 와서 시키는 일 하는 거야. 대답!”

“네.”

“여기서 본 거, 들은 거.”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됐어. 슈퍼 가서 담배 좀 사 와.”


매화가 소파에 앉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세정은 일어서다, 꿇고 있던 무릎이 아파서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다. 멍든 무릎을 쓱쓱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현관으로 빠르게 걸었다.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뛰어 내려와서 뒤를 돌아보자, 텔레비전 속 사람도 웃고 매화도 웃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는데, 웃을 사람이 없는데 둘만 웃고 있었다. 세정은 대문을 열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천천히 문을 닫았다. 시장 끝 쪽에 있는 슈퍼까지 쉬지 않고 달려가 ‘아저씨!’하고 부르자 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나와 문 옆에 박아둔 못에 고무줄을 연결해서 걸어둔 공책을 펼치고, 볼펜으로 뭔가 쓰더니 검은 비닐봉지에 라일락 담배를 몇 갑 넣은 후 세정을 향해 던졌다.


“얘!”

“네?”

“그 여자, 네 엄마냐?”


세정은 손목에 비닐봉지를 걸고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문질러 뗐다. 남자는 말없이 서 있는 세정을 다시 부르며 같은 질문을 했다.


“아니오. 엄마 아닌데요.”

“새엄마야?”

“…… 아닌데요.”

“그럼 같이 사는 남자는 네 아빠냐?”

“아니오.”

“젠장, 그럼 뭔데! …… 입양됐어?”

“비슷해요.”

“됐다, 덥다. 가라.”


남자가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양손으로 붙잡고 간신히 닫았다. ‘이놈의 거, 문짝을 떼 버리던지’ 세정은 가만히 서 있다가 달랑거리는 볼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공책을 펼쳤다. 외상인지 받아야 할 내역들이 한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이 돈을 다 받을

수 있는 걸까. 매화가 외상으로 가져온 물건들은 오늘 담배뿐만이 아니라 소주, 맥주, 오징어포, 두루마리 휴지 등 종류도 다양했다. 세정은 공책을 다시 덮고, 손목에서 덜렁거리는 비닐봉지를 꽉 잡고, 슈퍼를 나섰다. 너무 늦으면 또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세정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왜 인제 와!”

“슈퍼에 손님이 있어서요.”


매화가 세정의 손목에 걸려있던 봉지를 낚아챘다. 그 바람에 손목이 당겨져 빨갛게 흔적이 남았다. 세정이 손목을 바라보자, 매화가 다가와 턱을 잡아 올렸다.


“왜.”

“아, 아니오. 쌀 씻을까요?”


매화는 세정의 턱을 좌우로 돌리더니 곧 손을 뗐다.


“너 행동 조심해라.”


매화는 담뱃갑 포장지를 벗기더니 순식간에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매화의 입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압력밥솥에서 피어오르는 것과는 다른 연기. 세정은 매화가 보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쌀통 뚜껑을 열었다.


“야! 쌀 두 번 더 퍼.”


다행이다, 굶기진 않을 모양이었다. 세정은 밥그릇에 쌀을 잔뜩 담아 둥근 스테인리스 그릇에 부었다. …… 세 번, 네 번. 세정은 개수대에서 쌀을 두 번 씻고 씻은 물은 냄비에 따로 부었다. 밥솥에 쌀을 넣고 압력밥솥에 불을 올렸다. 냉장고를 열어 채소 몇 가지를 꺼냈다. 어른이 되면 재료를 다듬는 일이 쉬워지나, 세정은 중얼거렸다. 몇 번을 해도 서툰 손길로, 감자 껍질을 벗긴 후 네모난 모양으로 잘랐다. 국이 끓을 동안 세정은 부식이 방문 판매 일을 할 때 사들였던 그림책 중 ‘나무를 심은 사람’을 가져와 펼쳤다. 세정은 틈날 때마다 창고 방에 들어가 그림책과 전집을 읽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무를 심는 할아버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만화로 본 적이 있었던 세정은 같은 내용을 그림책으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만화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들어와 책을 찾기 시작했고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책 무덤에서 그 책을 찾아냈다. 이후 세정은 틈날 때마다 방에 들어와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책에 책 이름을 적어두고 몇 번 읽었는지 표시했다.

냄비 뚜껑이 들썩거리는 소리에 세정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잘라둔 두부를 넣고, 대파는 가위로 잘라 넣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세정이 재빨리 가위를 씻어 서랍에 넣었다. 부식은 들어서자마자 욕지거리였다. 매화가 외상으로 산 담배 한 상자에서 손에 집히는 만큼 잡아 가방에 넣더니 부엌으로 들어왔다. 밥솥과 세정을 번갈아 보더니 식탁에 있던 보리차 한 컵을 단숨에 마셨다. 매화가 들어와 국그릇에 밥을 담고 반찬 그릇에 간장을 붓더니 먹다 남은 김 통을 쟁반에 올렸다.


“들고 따라와.”


세정은 왜 된장국은 담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놓칠세라 쟁반을 쥔 손에 힘을 더 주고 매화의 뒤를 따랐다. 뒤따라오던 부식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끼웠다. 두어 번 돌리자, 뭔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고 매화가 자물쇠를 잡아당긴 후 빼내자, 문이 열렸다. 나무 계단에 내려서자, 각자의 체중만큼 소리가 났다. 슬쩍 뒤돌아보자, 부식이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선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세정은 흔들리는 간장이 신경 쓰였다. 흔들리다 옆으로 샐 것 같아 더 조심해서 움직였지만, 갑자기 선 매화 때문에 결국 간장이 밖으로 튀었다.


“너네!”


작은 방에 모여있던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매화의 외침에 벌떡 일어선 아이들은 움직이는 소리에도 혼이 날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조심 걸어 나왔다.


“이따 깨끗이 씻었나 검사할 거야. 냄새 안 나게 꼼꼼히 씻어. 알았니?”


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정의 머리 뒤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두정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인우와 지우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세정의 몸이 기우는 것 같아 달려가 쟁반을 받아 들었다. 매화가 세정의 몸을 밀치고 지나가자, 세정이 문에 부딪혔다. 지우는 세정의 어깨가 문에 부딪히는 걸 분명히 보았는데,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걸 보고 어디서 비롯된 건지도 모를 두려움에 인우의 팔을 붙들었다. 곧 나무 계단에서 매화의 마른 몸이 내는 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잠겼다. 인우가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넌 이름이 뭐야?”

“강세정.”

“난 최한정, 얘는 최두정. 그리고 얘는 김인우, 김지우. 나랑 인우는 열두 살이고, 두정이랑 지우가 열 살. 너는?”

“여덟 살.”

“넌 언제 왔어?”

“밥 먹어. 늦게 먹으면 혼나. 여기서는 뭐든 빨리 해야 해.”


세정의 말에 지우가 바닥에 앉았다. 세정은 매트리스 옆에 접어둔 밥상을 펴 그릇을 옮겼다. 작은 상을 둘러싸고 앉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수저를 들었다. 한정이 밥그릇에 간장을 붓고 비비자, 두정은 수저 끝을 입술에 갖다 대고 침을 삼켰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두정의 말에 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정이 ‘잠깐만’ 하더니 일어나 세탁기가 있는 쪽으로 갔다. 곧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손에 비닐봉지를 쥐고 들어왔다.


“깨소금인데 넣어 먹어.”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심부름하러 갔다가, 방앗간 집 아주머니가 먹어보라고 주셨어.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어.”


인우가 비닐봉지를 열어 깨소금을 한 수저 밥에 넣었다. 한정이 열심히 비비자 지우는 급한 손길로 김을 꺼내 반으로, 또 반으로 접은 후 조심조심 잘랐다. 삐뚤빼뚤 자른 김에 간장을 비빈 밥이 올라가고 아이들은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고 씹을 새도 없이 삼켰다. 세정은 비닐봉지 끝을 묶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정아, 넌 어떻게 여기 왔어?”

“인우 언니는?”

“배고파서…… 우린 너무 배고파서 왔어.”


한정은 손에 든 김을 두정에게 건넸다.


“그냥 넘기지 말고, 씹은 다음 삼켜.”


두정의 물끄러미 보는 한정의 눈길이 따뜻했다. 세정은 한정의 모습이 사람들이 말하는 엄마의 의미와 비슷한 것인지 궁금했다.


“남기면 안 돼. 남긴 만큼 밥이 줄어. 이따 욕조에 물 받지 말고, 수도에 연결된 호스로 씻어. 수건은 화장실 장에 있어. 옷은 세탁기 안에 넣어두면 돼. 세탁기 쓸 줄 알아?“


세정의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인우가 지우를 일으켰다. 지우는 이미 티셔츠에서 팔을 빼고 있었다. 두정은 지우의 팔꿈치에 박힌 검은 때, 탄 건지 때인지 모를 시커먼 목덜미를 눈으로 좇았다.


“우리 여기서 못 나가? 누나, 나 집에 가고 싶어.”

“우리 집 없어. 아주머니가 방 빼라고 난리였잖아.”

“그러면 여기서 살아? 나 무서운데.”


지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인우를 따라 나갔다. 두정은 한정이 그릇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바닥에 떨어진 김 조각을 침 묻은 손가락으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여기, 누가 또 있었지?”


한정의 질문에 세정은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야?’ 한정이 다시 묻자, 세정은 또 고개를 저었다. 세정은 쟁반을 방 밖에 내려놓고 한정과 두정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이게 전원 버튼이야. 빨래는 매일 하는 거 아니고, 이만큼 쌓이면 해.“


세정은 손가락으로 세탁기 어디쯤을 가리켰다.


“세제는 이거. 분홍색 세제는 이 칸에 넣는 거야.“


세정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면서 설명하자 한정과 두정은 집중해서 들었다.


“근데 왜 세탁기가 하나 더 있어?”


두정의 질문에 세정은 ‘그건 우리 거 아니야. 아줌마 빨래할 때 쓰는 거야’라고 답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세정이 빠르게 몸을 돌리더니 바닥에서 쟁반을 들어 올려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분명 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정의 비명 소리에 인우와 지우가 비누 거품을 채 씻지도 못한 채 화장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서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한정이 두정의 손을 붙잡았다. 부식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고 그의 손에 잡힌 세정의 머리채가 보였다.


“이 년이 쥐새끼였네.”


그는 세정의 머리채를 놓고, 이어 양쪽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깨소금이 어디서 났어, 응? 어디서 나서 다른 쥐새끼들까지 같이 처먹였냐, 이거야. 어딨어!“


두정이 너무 놀라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참아, 참아, 제발’ 한정이 중얼거리며 두정을 제 뒤로 오게 했다.

그는 세정을 욕조 안으로 내던졌다. 세정의 등이 욕조 벽에 부딪히자, 세정이 허리를 굽히며 아파했다. 곧 차가운 물이 세정의 몸 위로 쏟아졌다. 부식은 호스를 틀어 거친 물줄기를 세정의 얼굴로, 정수리로, 거침없이 내리꽂았다. 발버둥 치는 세정을 보던 인우와 지우는 벽에 바짝 붙어 숨을 참았다. 세정의 비명이 지하실을 온통 뒤덮었다. 그는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뽑아 욕조로 다가섰다.


“세탁실에 있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세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세탁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정은 두정을 자신의 등 뒤로 감싸듯 밀어 두고, 조심스럽게 세탁기 뒤편으로 손을 넣었다. 세정이 숨겨둔 비닐봉지가 손끝에 닿자, 그녀는 곧장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다가오자 두 손으로 내밀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비닐이 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고요한 지하실에서, 그 소리만이 떠돌았다.

맞지 않았는데도, 그의 크고 두꺼운 손바닥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맞은 것처럼 손등이 아린 것 같았다. 한정은 자신의 등 뒤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두정을 두 손을 등 뒤로 하고 붙들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두정의 허리께를 두드렸다. 거친 발소리가 사라지고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멈췄던 딸꾹질이 시작됐다. 이번엔 지우였다.

언젠가 지우는 자신의 몸에 붙었다 발길질에 떨어지는 파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형광등 주변을 날아다니던 파리를 보다가 어딘가에 앉기라도 하면 바로 죽여주겠다는 태세로 신문지를 돌돌 말아 쥐었다. 파리가 벽에 붙자마자 지우는 신문지 끝으로 내리쳤다. 단번에 죽였다. 날개는 신문지에 붙어있고, 몸통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우는 신문지에 파리를 넣고 다시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소각장으로 가면, 영영 죽겠지. 이미 죽은 파리를 보며 지우는 그렇게 말했다. 열심히 잡아댔던 잠자리, 바퀴벌레, 끈끈이에 붙어 죽은 쥐까지- 지우는 그 모든 죽음이 머릿속에 하나둘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잘못했습니다. 누나, 내가 잘못했어.“


지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미끄러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인우는 세정의 얼굴을 닦던 손을 놓고 재빨리 뛰어갔다.


“지우야! 지우야!”


인우의 목소리에 한정과 두정이 서둘러 그들에게 돌아갔다. 인우가 도와달라는 손짓을 하자 한정이 뒤로 돌아앉더니 업히라는 듯 등을 구부렸다. 지우를 등에 올리자, 세정은 수건을 꺼내 지우의 몸에 둘러 주었다. 방에 지우를 눕히고 인우는 지우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한정은 텔레비전에서 봤던 기억이 나 지우의 팔다리를 계속 주물렀다.


“나 때문에 미안해. 근데 언니들, 빨리 씻어야 해.”

“알았어. 두정아, 가자.”


지우가 눈을 뜨자, 인우는 그제야 안심한 듯 손을 놓았다. 터져 나온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지우는 영문도 모른 채 인우의 손만 흔들었다. 세정은 서랍장에서 같은 색의 티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맞는 거 입어. 나 올라가야 해.”


한정과 두정이 들어간 화장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섰던 세정은 옷을 입고 있는 인우와 지우를 돌아보았다.


세정은 입학할 학교에서 ‘학부모 상담’이라는 팻말을 본 적이 있었다. 누가 학부모인지 몰라서 그날 세정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엄마, 아빠’를 반복해 중얼거렸다. 교문 앞에서 부모의 손을 꼭 잡고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세정은 친구는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거꾸로 보던 세상은 거꾸로 흐르는 눈물 때문에 조금씩 지워졌다.


세정은 눈을 꽉 감고, 모두 지워버렸다.

손바닥으로 두 눈을 꽉 눌렀다가 떼고, 계단 끝까지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곧 매화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세정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앞에 서자 그릇에 붙어있는 깨소금이 보였다. 세정은 그것을 떼 입에 넣고,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오물거렸다.


그날 밤, 매화는 얼마나 잘 씻었는지 검사하겠다며, 세정을 포함해 아이들을 일렬로 세웠다. 긴 자를 손가락에 걸치고 팔짱을 낀 채 앞뒤로 걷다가 지우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자 끝으로 지우의 어깨를 건드렸다.


“남자는 말이야, 냄새를 조심해야 해. 여기 목덜미랑, 아래쪽에서 냄새가 나면 싫어하거든. 알겠니?”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들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매화는 다시 말했다.


“간수도 잘해야 하고. 사장님이 잘 알려줄 테지만.”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사모님이라고 불러. 손님이 오면, 내가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컵에 보리차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가는 거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선언하듯 말했다.


“자, 이 집에 ‘왜’는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알았지? 잘만 하면 예전처럼 밥 굶을 일도, 거리를 헤맬 일도 없겠지.”


매화는 한정과 인우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세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가 밖에서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아이들을 다독이는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짜 가족처럼, 사랑의 눈으로 아이들의 삶을 안아주는 좋은 사람. 세정은 그녀의 손길이 진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손길과 시선은 세정의 마음을 내칠 때만 다가왔다.

어른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의 따뜻한 눈빛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진심일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밤 9시가 되면 세정은 부식의 방으로 불려 갔다. 아이들은 나란히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세정인 뭘 하고 있을까?’ 지우의 질문에 두정은 ‘허리를 밟아준다잖아’라고 말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 말을 믿어?”


한정이 두정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두정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곧 두 팔로 머리를 가렸다.


어느 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세정은 부식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매화의 방에 들어가 누워있던 매화의 배를 발로 밟았다. 간신히 얻어낸 인형의 배가 찢겨 솜뭉치가 튀어나오고 팔이 떨어지고, 머리가 떨어지고, 그러다 창밖으로 던져졌을 때처럼 세정은 부티 난다는 매화의 화장대에 가 부딪혔다. 곧 오래된 자개 서랍장에 머리를 부딪혔다가, 바닥에 이마가 짓 찢어졌다가, 팔이 떨어질 것처럼 잡혀 질질 끌려 나온 뒤 계단에 던져졌다. 지우가 세정을 업고 지하실로 내려왔을 때 아이들이 세정을 둘러쌌다. 한정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세정의 피 묻은 얼굴을 닦았고 두정은 찢어진 티셔츠 위에 손수건을 올렸다. 인우는 세정의 손을 잡고 울지 않으려고 애쓰며 세정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 퉁퉁 부은 얼굴, 늘어진 팔, 멍으로 가득한 몸은 다음 날에도 다시 일어나 부식의 방으로 향했다. 또 맞고, 맞아도 세정은 울지 않았다. 울지 않기로 한 서로의 약속 때문이었는지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신음도 내지 않았다.


“몸 팔던 여자의 딸 이래. 부른 배를 숨기지 못해 도망쳤다가 잡혔대. 낳은 걸 후회한대. 부끄럽대. 남자들의 팔을 잡아당기며 찢어지게 웃던 여자였대. 같이 팔면 돈을 두 배로 벌 수 있대. 그래서 손을 잡았대.”

“세정아, 무슨 말이야…… 누가 누구의 딸인데?”


그 작은 입술 사이로 쏟아졌을 수많은 말들은 내뱉지 못해 멍 속에 자리 잡았다.

푸르고 검고 노르스름한 멍들이 스며든 후에는 밤마다 그 말들이 피부를 찢을 듯 튀어 올라 세정을 오래도록 아프게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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