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 같은, 뭔가 배를 두드리는 느낌이 무언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피임약을 먹을 때마다 구역질과 어지러움증이 있어 몇 번 미루던 것이 나중에는 아예 먹지 않게 되었고, 생리를 건너뛰었다는 사실도 잊게 되었다. 하다 하다 이제 심장이 발바닥까지 내려가나 보다고 생각했었다.
3개월 전, 콘돔 없이 덤벼들던 남자는 한정이 협탁 위에 있던 종을 다급하게 들어 흔들자,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10초도 채 걸리지 않아 부식의 발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그의 눈빛 한 번에 남자는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보란 듯이 바지를 내리더니 종 옆에 있던 콘돔 포장지를 입술로 물고 쭉 찢었다. 부식이 문을 닫자 남자는 입에 물었던 것을 대충 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한정이 남자의 어깨를 밀자, 그는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정의 얼굴만큼 큰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을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얼굴을 파고들었다. 그 손이 사라지면 얼굴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았다. 문득, 소리를 지르고 있음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있는데 말하고 있지 않은 느낌. 부식에게 맞아 귀가 들리지 않게 된 후로,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정은 아이들의 표정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두려움이 혀끝에 걸릴 때면 두정을 붙들고 말했다. 말하고 싶다고. 들어달라고. 한정은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두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거나 머리를 벽에 대고 쿵쿵 찧었다. 그때마다 강부식과 안매화의 목소리도 겹쳐 들렸다.
“저년 어떡하지?”
“둬 그냥, 저런 애도 찾는 놈들이 있거든.“
방 안의 모든 것이 침묵했다. 한정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 같았다. 남자의 손이 어깨를 움켜쥐자, 그녀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입을 벌렸다가 징그럽고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품은 그것이 닿자, 몸이 강하게 경련했다. 남자는 들어온 지 10분 만에 방을 나섰다. 한정은 눈을 감고 침대 아래로 늘어져 있던 다리를 간신히 올렸다. 등을 말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불이 켜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에 일으켜 세워졌는데, 인우였다. 인우는 놀란 눈으로 한정을 안았고, 부식은 바닥에 떨어진 쓰지 않은 콘돔을 줍더니 욕지거리를 뱉으며 뛰쳐나갔다. 한정이 허리 옆을 툭툭 치자 인우의 입술이 어린 시절 좁은 골목길처럼 구불구불 해지더니 그 위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한정의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피를 보았다.
“나 안 울었어. 운 거 아니야.”
인우의 말에 한정이 미소 지었다.
“알아.”
한정은 이불을 끌어와 몸을 덮었다. 멍한 표정으로 인우를 보던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눈이 감기자, 손바닥으로 뺨을 살짝 내리쳤다.
“야! 얘 빨리 닦아줘. 다음 준비해.”
“지금요?”
“지금.”
“한정이 아파요. 피났어요.”
“그래서 뭐! 이년들이 간땡이가 처부었나! 빨리빨리 안 움직여?“
한정이 더 말하지 말라는 듯 인우의 손을 꽉 잡았다. 한정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담지 못했다. 부식이 시켰는지 세정이 젖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차가운 수건이 다리에 닿자, 한정이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인우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내가 할 게.”
“괜찮아. 내려가. 그 사람은 괜찮아.”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 수요일 밤 9시에 매화네를 찾아오던 사람. 남자는 일 년이 넘게 한정을 찾아왔다. 그러자 부식은 이제 예약 같은 건 필요 없다며 달력에 시간과 그의 별명을 썼다. 별명은 ‘양반’이었다. 그는 조용히 들어와서 딱 30분만 머물다 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도, 외상을 한 적도 없었다. 부식과 매화는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을 만나 신기했는지 단골은 일 년에 한 번은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한정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하라는 둥 꽤 선심 쓰는 듯 허리를 길게 세우고,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다. ‘양반’은 양반이었다. 다른 손님이었다면 ‘당연히 해줘야지’ 라거나 ‘횡재했네’라며 서비스를 낚아챘겠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부정의 표시를 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한정의 방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들어오는, 그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그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니?”
남자의 질문이 새삼스러웠다. 한정은 시트 끝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한정은 그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같은 질문을 하러 왔어.”
“달라진 거 없어요.”
“여기서 나가자. 두렵겠지만, 일단 나가서 다음을 준비하는 거야. 너희는 아직 어려. 지금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그 두 사람이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용기 내야 해.”
“나요? 여기 나라는 사람은 없어요. 백매, 청매, 황매. 우린 이름도 없고 얼굴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우는지, 웃는지도 모르는데 나 자신을 위하라고요? 우리한테 그런 건 다 몰라도 되는 것들이에요.”
“알아야 해.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고.”
한정은 검게 마른 핏자국에 손가락을 댔다.
“이게 나예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앙다문 입술. 어떤 말을 할지 수천 번을 생각한 듯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죽어라 밟아대며 빨아도, 그래서 처음 산 것처럼 깨끗해져도, 내 눈엔 보여요. …… 이 핏자국들이. 다시 오지 않으셔도 서운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을게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실핏줄이 터진 그의 눈이 곧 붉은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한정은 한참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저를 포기해 주세요.”
인우가 꿈꾸던, 장미꽃이 흐드러진 집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나아가 얻는 것보다 한 걸음 물러서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 이건 인생을 건 싸움도, 그 무엇도 아니다. 두정을 데리고 도망친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그 행동엔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어느 곳이 더 나은 지옥인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청력을 잃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 보아야 하는 것이 지옥 같았을 뿐이다. 각인된 목소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 때마다 심장이 뜯기는 것처럼 아팠고, 머릿속은 뿌연 상태이거나, 어떤 날엔 누가 뇌 속에서 사포질 하는 것처럼 사악 사악 거친 것을 문질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떠나고, 한정은 피 묻은 시트 조각을 잘라 매트리스 밑에 넣었다.
“기억해야지.”
한정은 벽에 몸을 뭉개버릴 듯 힘을 주어 기대고는 중얼거렸다.
한정은 매일매일 자신의 배를 때렸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이름도 없는 그것에게 화를 냈다. 저주했다.
세정을 끈질기게 졸라 소주 한 병을 얻어내고 밤마다 두 모금씩 마셨다. 술을 마신 날은 그것도 조용했고 한정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아, 이 제기랄, 이거 뭐야! 야, 강 씨! 강 씨!”
한정의 다리를 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의 남자가 입을 크게 벌리고 부식을 부르자 한정은 영문을 몰라 그의 팔을 붙들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그녀의 팔을 밀쳤고, 의자에 걸어둔 바지와 상의를 집어 들었다.
“왜 무슨 일…… 안매화! 이리 와!”
부식의 시선이 바닥에 흥건한 피에 멈췄다. 그 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한정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바라보았다. 두 발 사이에 고인 피를 보자 한정은 놀라 주저앉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 주름 사이로 피가 맺혔다가 떨어졌다.
“…… 죽었어? 죽었어?“
그녀는 배에 손을 올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하하, 진짜 죽은 거야, 진짜야?“
부식의 외침에 놀라 올라온 매화는 입꼬리를 올리고 환희에 찬 표정으로 웃어대는 한정을 보더니 그녀의 양쪽 어깨를 세게 잡고 흔들어댔다.
“이 년…… 유산했나 본데?“
매화의 말에 부식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남자가 낸 돈을 돌려주었다.
“미안하게 됐어. 다음에 오면 내 잘해줄게.”
그는 부식이 내민 돈을 신경질적으로 채더니, 재수 없다고 말하고는 2층 계단을 내려갔다. 세정은 부엌에 서
있다가 현관을 나서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밥상 덮개로 반찬을 덮어두고 보리차를 한 컵 마셨다. 지하실 문 쪽을 한번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세정아, 무슨 일 있어?”
인우였다. 문 앞에 선 세정이 창문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내가 가볼게. 내려가 있어.”
“무슨 일인지 바로 알려줘. 여기 있을게.”
인우는 볼 수 없겠지만, 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네의 결말은 뭘 것 같아?“
세정이 가스통 뒤에 숨겨둔 소주병을 한정에게 내밀던 날, 그녀가 한 질문이었다.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한정은 사고 후에는 소통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세정의 눈을 바라보며, 답을 채근하듯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언니는 알아?”
언제 이렇게 술이 늘었을까.
한정은 소주를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맹물을 마시듯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쉽게 삼켰다.
“나는 알지.”
세정은 그녀의 손에 들려진 소주병을 품에 가져왔다.
“그만 마셔.”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정이 눈을 감자 시간이 멈추고, 천천히 눈을 뜰 때 다시 시간이 흘렀다.
“난 죽을 거야, 난 알아. 난 죽어가고 있어.”
한정의 아랫입술은 낫기도 전에 다시 터졌는데 제때 약을 바르지 못해 말라붙은 약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놈은 이런 걸 좋아한다고, 언젠가 한정이 손가락 끝에 약을 짜면서 진짜 더럽다고 중얼거렸던 게 생각났다.
“언니 약 발라야겠다.”
한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세정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언니, 내가 약 가져올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정의 쇄골에 한정의 눈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우리 세정이, 언제 이렇게 컸어?”
세정은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잠든 한정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기도 했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한정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숨소리를 어떻게 내는지 잊은 매화네 아이들, 그중에서도 한정은 숨을 쉴 때마다 옅어지는 사람 같았다.
2층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부식이 세정을 보자 플라스틱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들어와.”
부식의 뒤를 따라 한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창문 앞에 매화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 끝에도 담배가 있었다. 침대 아래 한정이 누워있었고, 문지방까지 닿은 핏물은 곧 벽지를 타고 오를 것 같았다.
“언니 왜 이래요? 언니! 언니, 괜찮아?”
한정의 손이 너무 차가워 세정은 손가락 끝을 한정의 코에 가져다 댔다. 얕은 숨이 느껴졌다.
“청매 데려와. 바닥 닦을 것도 가져오고.”
“백매는요?”
“걔가 지금 왜 필요해.”
세정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며 급하게 내려갔다. 지하실 문을 열자, 인우가 놀란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다. 세정이 그녀의 두 손목을 꽉 잡고 주문처럼 말했다.
“놀라지 마. 소리 지르지도 마.“
인우는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가져온 걸레가 검은색이라 닦을 때는 그저 열심히 문질러 닦았지만, 대야에 담글 때마다 점점 붉어지는 물 색과 핏물로 손톱 아래가 붉게 변하자, 세정은 침을 크게 삼키고 숨을 들이쉬었다. 인우는 한정의 몸을 닦은 후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그녀의 가슴께를 두드려 깨웠다.
“한정아, 나 봐. 옷 갈아입자. 다리 들 수 있어?“
팬티에 생리대 두 개를 길게 이어 붙인 다음 두 발을 차례대로 집어넣었다.
“안매화 이리 와. 좀 옮기자.”
“어떡하려고!”
“야, 애들 몸 관리는 네 년이 할 일 아니었나? 집에서 하는 게 뭐야, 술 처마시고 담배 피우고 손님들이랑 시시덕거리고만 있으니 이 사단 아니야!”
“뭐? 언제는 영업 하라며!”
“영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하려면 네 몸이라도 파는 게 영업이지, 외상은 외상대로 달아놓고! 이 지랄을 만들어놓고! 이리 와, 다리 들어!”
부식이 한정의 어깨를 받치고 인우와 매화가 양쪽 다리를 들고 침대 위로 옮겼다.
“……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부식이 인우의 말에 벌떡 일어나 작은 창문 앞에 섰다. 천천히 닫히는 문을 보며 세정은 인우의 손을 붙잡았다.
“병원? 씨발, 너네 이름 있어? 사람이 실종되면 말이야, 그냥 다 없어지는 거야. 그런데 무슨 병원이야. 그만큼 말해줬는데 이, 대가리가 안 돌아?”
부식은 담배가 끼워진 검지와 중지를 들어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인우는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입술을 풀려고 애썼다.
“…… 물, …… 목말라.”
세정은 책상 위에 올려둔 물컵을 서둘러 가져 왔다. 한정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매트를 짚은 손에 힘을 주다 포기하고 다시 누워 버렸다. 세정은 서둘러 내려가 숟가락 하나를 챙겨 올라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에 물을 담고 한정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 방 다른 애들은 출입 금지야. 특히 백매.”
“우리 하라는 거 다 했잖아요. 제발 병원에 데려가 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너무 무섭다고요. …… 죽으면 어떡해요.”
인우는 부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지 끝단을 붙잡고 병원에 데려가달라고 사정했지만, 매화는 물고 있던 담배를 무표정한 얼굴로 인우의 손등에 가져다 댔다. 인우는 손등에 닿은 뜨거움에 놀라 손을 떼며 뒤로 주저앉았다.
“죽으면 차라리 쉽지. 그게 낫지, 안 그래?”
매화가 일어서며 부식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우는 한 손으로 손등을 가리고 다시 일어섰다. 문이 닫혔지만 잠기지는 않았다. 인우는 패드 상태를 확인했다.
“이걸로 안 되겠어. 세정아, 더 가져올 수 있어?“
세정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매화의 것을 쓸 수는 없다. 천을 잘라 쓰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반찬 가게 좀 다녀올게. 그 집 이모가 작년에 아기 낳았는데 기저귀 삶아서 쓴다고 했거든.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볼게.”
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정의 모든 움직임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이루어졌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몸의 무게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세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정이 들리지 않아도 서로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정이 현관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식과 매화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인우는 한정의 옆에 누워 심장 위에 손바닥을 대고 천천히 두드렸다.
“인우야.”
인우가 몸을 일으켜 한정을 바라보았다.
“우리 두정이 데려와 줘. 두정이 보고 싶어.”
“알았어. 밤에, 둘 다 자면 그때 데려올게. 조금만 참아.”
“…… 고마워. …… 미안해.”
인우는 한정의 마른 뺨 위에 가만히 손을 댔다.
“왜 말 안 했어. 너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라며. 무서울 때 서로 말해주기로 했잖아.”
“미안해. …… 말해버리고 나면, 내가 없어질 것 같아서. 나는, 나는 인우야, 내가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우리가 지켜줄게. 한숨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래.”
한정이 눈을 감았다. 인우의 손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거리를 배회하던 때, 잠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소중히 안고 가벼운 손끝으로 토닥이던 한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지우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지켜봤었는데 지우의 부럽다는 한마디에 정신을 차리고 가던 길을 재촉했었다. 이곳에 온 후, 지우는 찢어진 신문지 위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기대하는 마음이 꽃이라면
우리는 이미 다 져버렸을 거야.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거꾸로 매달려 시들어버렸을 거야.
새의 날갯짓도 느껴보지 못하고,
바람의 포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등에 닿는 위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린 지우는 시들어버린 시인이 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시를 읽으며 이미 찢긴 종이를 태워 없애고 싶었다. 그 이야기는 하나하나 너무 아팠다.
그리고 서로의 일기를 소리 내 읽는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세정이 가져온 기저귀 천을 한정의 아래에 덧대었다. 이미 다 젖어버린 팬티와 생리대는 빼버렸다.
새벽 1시, 세정은 확인이 끝났다는 듯 지하실 문을 열고 내려가 아이들을 깨웠다. 실체는 두고 그 혼만이 움직이는 듯 모두 조용히 들어와 한정의 옆에 둘러앉았다.
하루가 지나고 두 번째 날, 두정은 천을 모으더니 30분쯤 뒤에 돌아와서는 다 빨아왔다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이들은 교대로 열에 들뜬 한정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바꿔주고,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한정은 이제 눈을 뜨지 않았다.
다만, 남아있는 모든 힘을 모아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