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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형 Nov 20. 2020

존 스튜어트 밀, 포트럭 파티를 기획하다

철학의 식탁 열다섯 번째 이야기

어느 날 저녁, 각자 준비한 음식을 들고 모임을 찾은 사람들에게 파티를 주최한 중년의 신사가 외쳤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대도!”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은 ‘만족해 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였지만 오늘은 그냥 더 유명한 말로 갈음하자.)


아니, 백 번 양보해 배부른 게 그리 만족스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비교 대상은 조합이 너무나 끔찍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 끼니마다 나를 괴롭힐 ‘배고픔’이라는 감정에 더해 서양 철학 역사상 최고이자 최대의 추남(?)으로 손꼽히는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니! 기왕이면 허기져 날카로운 것보다는 등따숩고 배부른 게 나은 법이고, 돼지도 나름 꽃돼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지 않는가? ‘설마 역사에 길이 남은 (그러니 200년 뒤에 아무 상관도 없는 철학 전공자가 이런 글도 쓰겠지) 철학자가, 아무런 생각이나 이유도 없이 이런 험한 말(?)을 했을리 있겠냐’는 생각 말이다. 심지어 그 주인공이 철학 역사상 희대의 명저인 <자유론>의 저자이자, 무려 1800년대에 남녀평등을 주장한 인물이고, 10대 시절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린 존 스튜어트 밀인데 말이다.


도대체 밀이 누구더란 말인가?! 우선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역설한 공리주의의 시초, 제러미 벤담의 수제자이자 계승자였다. 벤담의 철학은 흔히 ‘양적 공리주의’로 불린다. 이는 간단히 말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낀다면 그게 옳은 일이라고 해석하는 입장. 그의 공리주의는 간단명료하게 쾌락과 행복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한편으로는 이 간명함이 사상 전반의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선 첫 번째 약점은 개인의 기본권과 인간 존엄성의 침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가령 비행기가 어느 섬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조난된 사람들이 모두 살기 위해선 한 명을 섬에 버린 채로 배가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결정은 옳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누구를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 것일까? 우리는 굳이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이득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경우를 현실에서 자주 마주한다. 두 번째는 쾌락의 질에 관한 문제이다. 가령 상대적으로 저급하다고 할 수 있는 선택이 다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이로 인해 사회의 진보가 제약을 받을 수도 있으며, 다른 예상치 못한 이유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벤담의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이를 제재하거나 번복할 이유도, 근거도 부족하다.


밀 또한 공리주의자였다. 그 역시 벤담과 마찬가지로 선은 곧 쾌락이며, 고통은 악이라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더 많은 쾌락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공리의 원칙에 상당히 부합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질을 양과 마찬가지로 고려하면서, 쾌락의 측정은 반드시 양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밀의 공리주의는 ‘질적 공리주의’라 불린다. 단순히 쾌락의 양만을 따진 벤담의 공리주의와 차별점을 두기 위함이다. 그의 관심사는 단순히 쾌락의 양을 측정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는 쾌락의 양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질, 즉 도덕적이고 바람직한 삶에 대한 평가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다시 연회 장소로 돌아가 보자. 밀은 도대체 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던 걸까? 아마도 그는 몇몇 손님들이 가져온 음식을 보고 크게 실망했을 게다. 음식의 질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저 ‘포트럭 파티이니 적당한 음식이나 들고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 하나쯤은 꼭 있으니 말이다. 만약 오늘 밤 포트럭 파티에 초대 받았다면, 그리고 당신을 초대한 그 사람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신사라면 반드시 기억하자. 그는 아무리 사소한 모임이라도 마련된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건 용납하지 못할 거란 사실을 말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나은지는 잘 몰라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맛있는 요리 한 입이 맛없는 음식 한 냄비보다 더 가치 있는 순간도 많다는 사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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