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유치원 원전 읽기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최후의 사람이자 중세 최초의 인물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오늘날의 알제리에 위치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로마의 관리였으며, 어머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하죠.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을 시작한 것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난 뒤입니다. 이 책의 원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감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를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고 하죠.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 공부를 하며 동시에 당시 기독교와 경쟁하던 마니교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계기를 거쳐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그리고 이후 초기 기독교의 중심 사상가로 활동했죠.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당대인들에게 너무나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탓에 중세를 문화와 과학이 발전하지 못하는 ‘암흑기’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이 이 시기 사람들의 사고를 이끈 것만은 분명하죠.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문제 중 악惡의 문제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실 악의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부터 기독교 연구자들이 꾸준히 고민한 문제였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분명 하나님은 선하고 전능한 분인데, 그분이 만든 이 세상은 고통, 절망,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죠. 이 문제는 이전 연구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임은 물론, 타 종교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주요 논거에 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간단하고 명쾌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바로
악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무언가의 부족이나 결함으로 생겨난다.
는 것이죠. 신이 만든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남의 것을 훔치고, 누군가를 때리는 것도 선한 행동이죠. 하지만 이는 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선할 뿐입니다. 말하자면 ‘작은 선’에 해당하는 거죠. 반면,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은 더욱 선한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선을 줬기 때문이죠.
그럼 굳이 신은 왜, 인간으로 하여금 ’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신이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고 해석합니다. 자유의지를 지닌다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 선한 행동과 그렇지 못한, 혹은 덜 선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예가 대표적이죠. 그는 말합니다. “아담을 신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게 한 자유의지는 그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저지른 죄로 인해 우리는 모두 그 죄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더 큰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은 오직 신에 대한 믿음과 은총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이론이 있습니다. 바로 ‘선형적 역사관’이죠.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신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벌이는 투쟁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의 나라는 불완전하고, 잔인하며, 오만한 곳입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부를 쌓으면 자신의 삶이 충만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에도 부가 행복이나 충만함을 담보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진정한 구원과 행복은 오직 신의 나라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만을 원합니다. 왜냐면 그 속에서만 진정한 행복, 참된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역사는 최후 심판의 날에 신의 나라가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선형적 역사관은 인간의 등장부터 마지막 최후의 심판까지가 하나의 일회적 역사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과 악, 그리고 선형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신의 나라를 준비하는 교회 안에만 구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주장은 교회와 교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데 일조했죠. 10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교부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였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