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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펭귄 Jul 14. 2016

숙취 블루스

열 다섯살의 겨울, 나와 내 친구들은 아파트 옥상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뉴스에서 사자자리 유성우가 쏟아진다고 한 날이었다. '금세기 최고의 우주쇼'라는 진부한 표현도 곁들였을 것이다. 이런 표현은 정말이지 축구기사에서 이라크나 아랍에미리트를 '중동의 복병'이라고 표현하는 것 만큼이나 진부하다. 복병이 어떻게 수십년간 복병일 수가 있는가? 한두번 불의의 습격을 당했으면 그 다음부턴 복병이 아닌 것이지, 얼마나 상시적인 방심 상태면 매번 복병 취급이냔 말이다.


물론 이 '심야현장체험학습 -사자자리 유성우 관찰을 중심으로-' 계획을 부모님에게 승인 받기 위해서 나는 '금세기 최고의 우주쇼'니 '사자자리 유성우는 과학공부의 복병'이니 하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다섯명의 멤버 모두 참여가 확정되었을 때, 우리는 사자자리 유성우를 볼 수 있다는 것보다 야심한 시각까지 함께 놀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흥분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사자자리 유성우는 모임의 핑계에 불과했다. 시험기간에 시험공부 같이하겠다고 모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유성우는 안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님을 속일 순 없었기에, 라기 보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당시 인기절정의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하다하다 질려서, 친구네 아파트 옥상에 가보기는 가보기로했다. 올라갔더니 너무 추워서 다시 내려가 친구네 집에서 이불을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 깜깜한 새벽 깜깜한 하늘은 깜깜했다. 유성우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런데 옥상에서 이불을 덮고 우주를 관측한다는 비일상적인 상황이 예상보다 제법 운치있고 낭만적이었다(내 별자리가 사자자리라는 사실도 한 몫 했다). 사자가 게으르기 때문인지 결국 우리가 본 것은 유성우라기엔 너무도 초라한, 늘어진 빨랫줄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한두개의 힘빠진 빛줄기였고, 그마저도 쌀쌀한 바람과 추위에 끝까지 못 보고 철수해야했지만, 즐거웠다. 나는 분명히 그 때 우주에 취해있었다.

당시는 내가 소설을 가장 재밌게 읽던 시기이기도 했다. 김용의 무협소설 [영웅문] 전18권,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전10권을 그야말로 '아껴가며'읽었다. 다 읽어가는게 아쉬워서 일부러 안 읽기도 했다. [영웅문]의 감동을 잊지못해 같은 작가의 [녹정기]도 봤지만, [영웅문]만큼 재미는 없었다. 고등학교 가서는 [창작과 비평]을 정기구독했다. 그러면서 '역비(역사비평)', '당비(당대비평)' 등 다른 계간지들도 가끔씩 보게 됐다. 이때부터 허세에 취해서 쇼펜하우어나 니체도 읽으며 철학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당시 철학적 사고의 대부분은 사실 [소피의 세계]에서 배웠다는 건 말 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책세상문고 씨리즈는 유익했고, 무엇보다 책이 얇았다. 무협이나 SF는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책을 안 읽을때는 새벽까지 PC통신을 하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동호회 사람들과 채팅을 하고 텍스트로만 진행되는 머드(MUD)게임을 하고 '0시의 재즈'나 홍은철의 영화 음악(이하 홍영음)'을 들었다. 0시의 재즈는 당연하게도 0시에 시작했고, 홍영음은 새벽 두 시에 시작했다. '0시의 재즈' 로고송에는 '뉴올리언즈에서 애시드까지'라는 가사가 있는데, 난 지금도 뉴올리언즈 재즈와 애시드 재즈가 뭔지 모른다.


홍영음에서는 매년 청취자대상 영화음악 인기투표를 해서, 100위부터 1위까지 틀어주는 특집방송을 했다. 어느 해인가 2위를 [러브레터]의 'a winter story'가 차지하고, 1위를 [시네마 천국]의 'love theme'가 차지하였다. 본 적도 없는 [시네마 천국]의 러브 테마를 아련한 향취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며 들었다. 아침일찍 학교에 가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수업을 듣고 때때로 빠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학원도 적당히 다니던 빡빡머리 중고생이었던 나는, 그 순간만큼은 퇴락한 구도심의 낡은 재즈바에 앉아 화이트 러시안을 시켜먹으며 바텐더와 음악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영화에 나오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을 잘 아는 척 하면서 알딸딸하게 취해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취해있지않다. 우주를 사랑하게 되고, 음악을 사랑하게 되고, 책을 사랑하게 되고, 무엇이든 간에 새롭게 사랑하는 기적, 그 기적에 질펀하게 취해지내는 시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요즘은 알콜의 힘을 빌어 잠시간 도취감에 빠지는 '유사도취'만을 반복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시마다 마사히코는 [퇴폐예찬]에서 7일간의 연속음주를 자랑한 바 있는데, 그것도 결국 잃어버린 도취의 체험을 단기간동안 재현하는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이제 '술을 마신다'는 것도 그런 것이 되었다. '꿈꾸던 시절-그 시절에서 벗어남'을 단시간에 체험해 볼 수 있는 도구가 술인 것이다. 이러한 경험조차도 운이 좋은 술자리서만 가능한 것이지만. 어차피 음주 자체에는 새로움이 없다.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머리를 나쁘게 해줄 뿐이다.


이게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건가? 최영미 시인은 '알겠니?'라는 시에서 '살아가려면 어딘가에 목숨을 거는 척이라도 해야해. 무르팍에 쌓이는 먼지를 견디려면 한밤중에 버튼을 눌러야 해. 그래서 그렇게 네 이름을 부른 거야, 알겠니?'라고 썼다. 난 쏘맥에 목숨 거는 척 하다가 한밤중에 아파트 대문 번호를 누르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름만 부르다 끊는 민폐를 저지른다. 사실 난, 그렇게 '취한 척'하고 있는거야. 알겠니? 라고하면 욕할 사람이 많겠지만.


슬라보예 지젝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실이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너무 무섭거나, 절대적 위기에 처하거나, 미지의 영역으로 진입할때 꿈은 끝나고 잠에서 깬다. 꿈을 견딜 수 없기때문에 현실로 도망친다. 나는 만취했지만 멀쩡한 척 해야했고 그 균형을 유지하는 긴장감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꿈에서 깼다.


이제부터는 숙취의 시간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기나긴 숙취의 시간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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