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극펭귄 Sep 18. 2016

Gymnopedie no.1  : 개구리 여행기

- 이곳은 어둡고 좁아. 답답하고 지겨워. 희망이 없어.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왕이 될 수 있을텐데.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 세상을 동경한다. 그곳은 어둡지 않고, 좁지 않고, 흥미로운 일로 가득찬 세상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걱정하기엔, 지금의 권태가 너무 크다.


권태로움은 지루함과는 다르다. 권태로움은 곧 위태로움이 된다. 우물의 크기는 항상 그대로지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더욱 좁게 느껴진다. 감각의 영역에서 익숙함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돌담은 춤을 추듯 돌며 조용하고 느리게 그를 조여온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그의 뛰기실력이다.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왠지 잘 뛰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점프해보고 자신의 발달된 뒷다리를 늠름하게 지켜본다. 경쟁자는 보이지 않지만, 여하간에 우물 밖으로만 나가면 자기가 최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물 벽에도 약간의 경사만 있다면,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것만 같다. 수직으로 세워진 우물벽을 올려보다, 고개를 떨군다. 다시 바닥을 뛰어본다.


- 스물 두 번을 뛰면 반대편까지 갈 수 있지. 그건 내게 주어진 하늘의 크기이기도 해. 달도 별도 금방 지나가서 기도하기도 어렵지. 신은 이 좁은 곳을 볼 수 있을까?


신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개구리에게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다리가 내려온 것이다! 마침 이 사다리는 그처럼 작은 개구리라도 뛰어 오를 수 있는 촘촘한 것이었다. 사다리를 오르는 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아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오를 수 있기에 올랐다. 개구리는 파리를 잡아 먹을 수 있기때문에 먹는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 먹을 수 있기때문에 먹는다. 거의 그 정도의 본능적 행동이었다. 오를수록 차오르는 강렬한 햇빛이 이제 곧 보게될 넓은 세상에 대한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이전에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빛의 각도였다. 자신을 위한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 세상은 온통 노랗구나.


그곳은 사막이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만이 개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건조한 바람이 괴로웠지만, 당장은 자유를 만끽했다. 그를 가로막는 건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든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강박적으로 붓고있던 희망과 즐거움 사이에서 두려움의 싹이 자라났다. 무서워진 그는 걸음에 리듬을 붙여보았다.


- 딴단 딴단단 단단단단


정신을 잃을 정도로 뛰어간 개구리는, 원래 우물이 어디였는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와버렸다. 다른 세상이 나올꺼야. 천국같은 늪지가 있을거야. 나 같은 개구리들이 사는 곳이.


처음으로 만난 생명체는 말라 죽어가는 새였다. 모래속에 반쯤 파묻힌 새에게 개구리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 왜냐고? 그야 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다 이 사막까지 날아오게 된거야. 날개만 없었더라면!


개구리는 왠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안 가 눈 앞에 오아시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개굴개굴 소리가 시끄러운 걸로 봐서, 자기와 같은 동료 개구리들이 잔뜩 모여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오아시스의 개구리들은 전부 뒷다리가 없는 것 같았다. 확인해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형체가 어른거리며 사라졌다. 신기루였다.


그로부터 몇 번의 신기루를 더 지나치고서야,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건조한 바람과 뜨거운 태양,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은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결국 우물 밖도 권태로웠다. 모래로 가득찬 우물이 세상이었다. 차라리 조금의 습기라도 있는 우물이 그리웠다.


- 나는 이제 말라 죽을꺼야. 그건 건조해서가 아니야.


개구리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내뱉었다. 세찬 모래바람에 그의 몸은 모래로 덮이고 있었다. 눈꺼풀위로도 모래가 쌓여 눈도 뜨기 힘들어졌다. 이 순간, 그는 사다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다리를 내려준 존재를. 그는 왜 내게 사다리를 주었을까? 그저 실망하고 탄식하라고 사다리를 준 것일까? 내가 내 분수를 아는지 시험해보려고? 하지만 사다리가 있다는 걸 안 순간 내게 선택지는 없었어... 나의 다리는 왜 뛸 수 있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왜 사다리는 내가 뛰어오를 수 있을만큼 촘촘하게 되어있었을까. 나에게 뛰어오를 힘이 없었더라면! 사다리가 촘촘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할 수 있는 걸 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갈 수 있었던 길을 선택하고, 그로 인해 희망을 갖고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지. 누군가 나에게 그 길을 가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는 거야. 열 수 있는 문을 열지 않는 바보가 있을까? 하지만 내 능력과 선택이 인도한 세상이, 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뭘까? 권태, 희망, 기대, 설레임, 그리고 실망과 의문을 느끼며 오랜 세월 견뎌야 하는 여행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 개구리 여행기의 배경음악으로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 좋겠다.



나는 이 낮고 낮은 땅에 왜 왔을까? 즐겁기 위해서? 형벌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임무를 띠고서? 휴식삼아? 아니면 그냥 우연히?

나는 태어나 얼마 안된 아이때부터 내가 작곡한 음들을 흥얼거리고 노래를 불렀지. 그래, 내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 거야...

- 에릭 사티(Erik Satie)



작가의 이전글 숙취 블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