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2년째 식물인간입니다
작가님께.
저는 쉰넷입니다.
이름을 쓰지 못합니다. 동네가 좁고, 사람들 입이 더 좁습니다.
아내는 2년째 병상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의사들은 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들립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기대는 하지 마세요.”
“유지입니다.”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저는 그 말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살고, 살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버팁니다.
아내는 제 삶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엄마이고,
지금은 침대 위에서 환자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병실은 늘 같은 냄새가 납니다.
소독약, 젖은 거즈, 미세한 플라스틱 냄새.
모니터의 ‘삑-’ 소리는 처음엔 심장을 찢어놓더니
이제는 시계 소리처럼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병원에 들릅니다.
입술에 립밤을 발라주고, 손톱을 정리해 주고,
손을 잡고 말합니다.
“나 왔어. 오늘도 왔어.”
간호사 선생님은 제가 좋은 남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립니다.
좋은 남편이라면…
이런 편지는 쓰지 않겠죠.
작가님, 어떤 날은
아내가 내게서 떠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살아 있는데도 떠난 사람.
그게 더 잔인합니다.
아이들은 다 컸습니다.
큰애는 군대를 다녀왔고, 작은애는 취업 준비를 합니다.
둘 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눈빛이 오래 멈춰 있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는 가끔 병실에서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합니다.
“우리 며느리… 미안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숨이 막힙니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이제 어쩌냐.”
“우리 아들 인생은 어떻게 하냐.”
그런 말이 먼저 나올 법도 한데,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누워 있는 아내의 손을 잡고
작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 집을 살렸다.”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다 무너졌다.”
사업이 실패했을 때, 빚이 쌓였을 때,
제가 주저앉아 있을 때
아내는 밖에 나가 일했고, 고생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걸 압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렇게 누워 있는 걸 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먼저 꺼냅니다.
“이렇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하다.”
“너한테 너무 많이 기대서 미안하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아내가 더 작아 보이고,
어머니가 더 늙어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더 비겁해 보입니다.
작가님, 이상합니다.
어머니의 그 따뜻함이
저를 살리는 게 아니라
어떤 날은 제 등을 더 무겁게 누릅니다.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 자리인지, 아들 자리인지, 아빠 자리인지.
아니면 그냥…
무너진 사람의 자리인지.
그리고 가끔은
병실 밖 공기가 너무 낯설어서
제가 이 세계에 계속 속해도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제가 그녀를 다시 만난 건
동창회에서였습니다.
쉰넷.
조금은 어색한 나이의 동창회요.
저는 원래 나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병원과 집, 회사.
그 세 곳만으로도 제 하루는 이미 꽉 차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도 좀 바람 쐬어.
너 그렇게 살다가 진짜 쓰러진다.”
그 자리에서 그녀를 봤습니다.
고등학교 때
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아이.
저는 웃어넘겼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돌싱이었습니다.
말투가 차분했고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 묘하게
피곤하지 않게 따뜻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저는 처음으로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습니다.
다음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어제 네 얼굴… 너무 말랐더라. 괜찮아?”
그 한 문장 때문에
저는 그날
병실에서 아내 손을 잡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그게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제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가끔 만났습니다.
대개 낮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늘
주머니에 병원 주차권을 넣고 나갔습니다.
왜 그걸 꼭 챙겼는지
저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마
언제든 다시 병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저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고
힘내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볍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늘 밥 먹었어?”
그 질문 하나가
저에게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그날 하루 동안 아무도 저에게 그 말을 묻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커피가 식을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날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
밖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제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인지
잠깐 잊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저를 더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님,
저는 아내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
다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병실에서 나와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거울 속에
제가 두 명처럼 보입니다.
병실에 앉아 있는 남편.
그리고
병실 밖에서
잠깐 다른 숨을 쉬는 남자.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어떤 날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녀를 보고 온 날이면
병실에서 아내에게
더 오래 말을 겁니다.
손을 더 오래 잡고
손등을 더 천천히 주물러 줍니다.
마치
말로 하지 못한 어떤 것을
몸으로 대신 갚으려는 것처럼요.
그래서 더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선을 넘은 건지.
작가님,
저는 지금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남자
편지를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사람은 이미 벌을 받고 있다”였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병상에 있는 아내는
‘당신의 책임’이고
‘당신의 사랑’이고
‘당신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병실 밖의 당신은
지금도 숨을 쉬는 사람입니다.
먹고, 일하고, 견디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
이 둘이 충돌할 때
사람은 자주
도덕이라는 단어로 자기 자신을 재단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만큼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만나는 이유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생존입니까.
그리고 하나 더.
그 관계가
아내를 버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당신을 끌고 갑니까,
아니면
오히려 당신을 사람이게 붙잡아 줍니까.
상황은 비극인데
선택은 늘 개인에게 떨어집니다.
그게 가장 잔인한 구조죠.
아내는 2년째 의식이 거의 없는 병상에 있습니다.
남편은 병실을 지키고, 아이들의 삶을 지켜보고, 노모의 마음까지 감당하며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동창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돌싱.
둘은 “가끔” 만납니다.
관계를 정의하지 못한 채,
그는 자기 자신을 “두 사람”처럼 느낍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 어떤 이유든 배신이다. 관계를 끊어야 한다.
2. 관계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위로/생존일 수 있다.
3. 아내가 살아 있는 한, ‘연애’는 금지다. 다만 인간의 고립은 이해된다.
3. 지금 필요한 건 연애가 아니라, 돌봄을 나눌 제도/가족 협의/상담이다.
4. 오히려 더 위험하다. 마음이든 몸이든 결국 무너진다.
“하면 안 되는 사랑”은 언제 시작되는 걸까요?
행동에서? 마음에서? 거짓말에서?
혹은,
돌봄이 지옥이 되는 순간부터일까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번 사연은 정말로
정답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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