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이의 밤토키

나는 그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by 유혜성

나는 그의 첫사랑이 아니었다


밤토키 연작 14: 그래서 더 사랑하고 싶었다


퇴근길이었다.


토랑이는 이어폰을 꽂고 걸었고

전화기 너머로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퇴근길에 통화하는 거 좋아해.”


토랑이는 웃었다.


“그래?”


“응.”


“왜?”


“하루 끝에

누군가 목소리 듣는 게 좋잖아.”


토랑이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그럼… 나 만나기 전에도 그랬어?”


전화기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퇴근길에 통화 좋아한다며.”


토랑이가 말했다.


“그럼 나 만나기 전에도

그렇게 통화하던 사람이 있었던 거네.”


제이는 잠깐 웃었다.


“… 있었지.”


토랑이는 걸음을 조금 늦췄다.


“손 잡고 걷는 것도 좋아한다며.”


“응.”


“그럼 나 만나기 전에도

손 잡고 걷던 사람이 있었던 거네.”


이번엔

제이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차 안에서 흐르는 음악이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토랑이가 말했다.


“가끔 제이랑 있으면

제이의 과거가 느껴져.”


“무슨 말이야?”


토랑이는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제이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본 사람 같아.”


조용한 말이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아파했고

놓지 못했던 사람.”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리고 나를 만났어.”


전화기 너머에서

제이가 낮게 말했다.


“… 있었어.”


“좋아했던 사람이.”


토랑이는 잠깐 멈췄다.


“사랑했어?”


“…응.”


“많이?”


“응.”


“헤어졌어?”


“응.”


“왜?”


제이는 잠깐 웃었다.


“멀어졌어.”


“물리적으로도

마음도.”


토랑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


“많이 그리워했어?”


잠깐의 침묵.


“…응.”


그 말 하나가

토랑이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제이가 말했다.


“근데 지금은 달라.”


“지금은 토랑이 뿐이야.”


그날 밤.


토랑이는 메시지를 보냈다.


“과거가 느껴지는 게 힘들어.”


잠시 뒤


“나는 너무 섬세한 사람이라서.”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나는… 나만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보내고 나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괜히 말했나.


괜히 보냈나.


그때


벨이 울렸다.


토랑이는 잠깐 멈췄다.


문을 열었다.


제이가 서 있었다.


잠깐 서로 바라봤다.


제이가 먼저 말했다.


“토랑이.”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토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가 말했다.


“너야.”


잠깐 숨을 고르고


“너 하나야.”


토랑이의 눈이 흔들렸다.


제이가 말했다.


“나는 예전에 많이 아팠어.”


“우울도 있었고

공황도 있었고

죽고 싶던 순간도 있었어.”


잠깐의 침묵.


“근데 그거 다 지나갔어.”


“지금은 괜찮아.”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너를 만났어.”


토랑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가 계속 말했다.


“토랑이는

누군가의 대체가 아니야.”


“내 상처를 고치기 위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토랑이야.”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해.”



토랑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토랑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느껴지는 게 싫어.”


“우리 사이에

누가 있는 것 같아서.”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나만 사랑해 줘.”


제이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토랑이를 끌어안았다.


“너만 사랑할게.”


조용히 말했다.


“더 많이.”


토랑이는 울면서 말했다.


“나 욕심 많아.”


“좋아.”


제이가 말했다.


“욕심부려.”


“토랑이는 그래도 돼.”


토랑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나만 사랑해 줘.”


제이는 토랑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래.”


“토랑이만 사랑할게.”


그리고 말했다.


“더 많이 아끼고

더 많이 보살피고

더 많이 사랑할게.”


“토랑이만.”


토랑이는 결국

제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날 밤


둘은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서로를 안았다.


토랑이는 제이의 셔츠를 잡고 있었다.


놓지 않았다.


제이가 말했다.


“토랑이.”


“응.”


“이제… 안 무서워도 돼.”


토랑이는 눈을 들었다.


“왜?”


제이가 천천히 말했다.


“네 옆에

내가 계속 있을 거니까.”


잠깐 숨을 고르고


“도망가지 않을게.”


“사라지지도 않을게.”


그리고 더 낮게


“혼자 두지 않을게.”


토랑이는 다시 울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날 밤


둘은 오래 서로를 안고 있었다.


말보다

체온이 먼저 닿았고


숨보다

마음이 먼저 닿았다


그 밤에는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그 밤은 길었다.


그리고

아주 깊었다.



며칠 뒤


제이가 말했다.


“토랑이.”


“응?”


“주말에 호텔 갈래?”


토랑이는 웃었다.


“호텔은 왜?”


제이가 말했다.


“집 말고

다른 곳에서 하루 보내고 싶어.”


“토랑이랑.”


“아침에 커피 마시고

조식 먹고

점심엔 프랑스 요리 먹고.”


“저녁엔 해 지는 거 보면서

천천히 하루 보내자.”


토랑이는 웃었다.


“데이트네.”


“응.”


그때


제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만년필로 쓴 편지였다.


토랑이가 읽었다.

<어느덧 봄바람이 오고 있어.


바람 부는 날

따뜻한 햇살처럼

당신은 나에게 왔지.


부드럽게

따뜻하게 찾아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듯

내 마음을 열고

당신은 들어왔어.


그렇게 사랑이 왔어.


사랑해.

토랑이.>



토랑이는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그리고

다시 제이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제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토랑이는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밤이 와도


토끼가 되는 밤이 와도


이제

무섭지 않았다


사랑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불렀다.


나는, 제이의 밤토키라고.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