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아플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by 수수

‘건강한 몸’이란 ‘정상성’의 범주는 외곽의 몸들을 수치스럽게 만들었고, 숨기도록 만들었고, 부끄러워하도록 묵인했다. 나도 그랬고, 전혀 다른 생각과 행위는 여전히 어렵다. 아픈 몸을 자책하고 미안해하고 한심스러워했다. 다정한 곁들에게 내 아픈 몸은 걱정과 위로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에서 혹은 모든 순간에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프다는 게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숨겨야 할 것도 아닐 텐데 왜 자꾸만 아픈 몸을 숨겨야 했는지, 내 몸은 구겨진 채 아파야 했는지. 무리하고 나면 보란 듯이 꼬박 아팠고, 나는 여전히 그런 반복을 하고 있다. 두통이 너무 잦고 심해 머리 사진을 찍었지만,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여러 요인으로 아플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건 유전력의 질환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현재 처한 환경 문제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아픔을 유발하는 요인들은 넘친다. 예전보다 더 민감하게 몸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지만, 현대 사회는 스스로 몰아붙이는 몸들의 천국이다. 아픈 몸에게 ‘너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때론 잔소리로, 때론 불쌍함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사회) ‘운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없다. 여전히 내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선택이란 것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경험했건 아니건 소위 말하는 ‘운동’의 영역에서 명시하지 않아도 노골적으로 건강한 몸, 올바른 몸, 부지런한 몸에 대한 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속에서 자주 아픈 몸의 사람이었고, 아픔이 진행되는 중에도 어떤 현장 속이나 어떤 일들에 항상 스스로 놓이게 했다. 쉼이 아니라. 그건 누가 강요한 ‘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라고 하기에도 갸웃거리게 하는 지점이 있기도 했다. 내가 여성이라는 것도 적지 않은 몫이 있었을 게다. 건강한 남성 활동가가 아닌 상태의 사람들 그리고 아픈 몸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 속이라서 소수의 사람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더욱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운동 사회 역시 여전히 건강한 비장애 남성의 몸을 이미지로 가지고 있다고, 성찰 지점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운동’이 향하는 곳이 넉넉하고 여유로운 문제들이 아니기에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쉼을 향해가기 어렵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 제기와 고민, 성찰로 변화되었고, 지금도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행복해지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운동 영역에서 건강에 대한 통념과 요구, 감정들, 그리고 영위하기 어려운 경제적 조건이나 시간의 문제들이 있음은 계속 이야기되고, 변화해야 한다.


‘사회 운동’ 사회로 특정하지 않고 전체 사회로 시선을 확장한다면 어떨까. 한국은 고강도 장시간 노동 국가이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일하고, 질병이라고 생각조차 못 하는 만성의 아픔들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상 아플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높은 건강 기준을 요구받고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게 취급된다. 왜? 아픈 몸은 ‘정상적 몸’이 아니란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픈 몸이 아픈 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 몸, 그리하여 벗어나고, 고쳐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비장애 중심적인지만 보아도 질병이란 것이, 장애란 것이 어떻게 꺼리는 존재, 외면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회에서 아픈 몸은 존중받지 못하고, 해롭고 귀찮은 존재가 되기 쉽다. 돌봄마저도 자본화되어 돈이 있어야 가능한 현 사회에서 아픈 몸은 고독하고, 절망스럽다.


이 책은 아픈 몸 그 자체만이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아픈 몸을 더욱 아프게 하고, 비정상적인 틀로 만드는지, 돌봄이라는 책임이 얼마나 개인들에게 부과되고 있는지, ‘정상 가족’ 프레임이 의료 영역에서도 얼마나 강력하게 차별적 요소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꼬집고 있어 관계에 대해서도, 시스템에 대해서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민과 다른 상상력을 할 수 있게 한다. (‘돌봄 공동체’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등) 또한 여성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페미니스트’인 저자는 소수자 관점과 감수성으로 아픈 몸에 대해서도, 아픈 몸이라 인식되지 않아 왔던 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성폭력이 성폭력 그 자체의 경험만이 아니라 이후 여러 요인으로 어떻게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으며, 그런 사회인가 등)


‘질병이 잘못 살아온 결과’라는 낙인은 누구에게도 긍정적이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질병은 사람들이 잘못 살아서 갖게 되는 벌이 아니다.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엄마는 만성질환을 안고 살아간다. 그 사람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결과를 얻은 걸까. 부모가 일찍 사망하고,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은 남성과 결혼을 하고, 경제를 부양하고, 육아와 돌봄 노동을 한 그녀는 얼마나 더 열심히 살고, 잘 살았어야 아프지 않고, 병을 얻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아픈 몸은 오염의 산물이 아니다. 아픈 몸은 혐오의 대상도, 비정상 범주에 구겨져야 할 것도 아니다. 왜, 라는 질문을 아픈 몸에게만 향할 것이 아니라 아픈 몸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사회에게로 돌리자. “건강이 최고다!” 외쳐지는 사회에서 아픈 몸에 대한 질문들이 외면되지 않고, 긍정할 수 있는 ‘함께 만들어가기’가 가능해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함께 살기’ 위한 다채로운 상상력이 키워지면 좋겠다. 건강만을 중심에 두어 아픈 몸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몸들이 차별 없이 존중받고 온전히 수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관통기>, 조한진희, 동녘



p5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약자들의 연대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나이 들고 죽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 자연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약자를 대변하고, 또 ‘대변해야 한다’.


p9 반면 나는 아픈 몸이 언제나 건강을 향해 달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고, 건강을 다소 잃었더라도 열등한 몸이 아닐 수 있다고 여겼다. 아픈 몸에 대한 사회적 태도와 환경적 조건이 변하면 아픔 몸도 ‘정상’적으로 온전히 살 수 있다고 보았다.


p10 위암에 걸렸다고 하면 짝 먹고 빠르게 먹는 습관 때문이었다고 책망한다. 가난할수록, 그리고 삶이 제한적일수록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방식이 많지 않아서 담배에 의존하게 되는 현실은 갑자기 사라진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도 정작 일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서 빠르게 먹고, 그러다 보니 짜게 먹게 된다는 현실 또한 사라진다. 이런 사회적 조건들은 삭제된 채 오로지 개인의 생활 습관만 지적된다.


p12 자연이 생명체에 부여한 생로병사를 낙인이나 차별 없이 겪을 수 있는 몸,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p26 의사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겠지만, 총체적으로 연결된 내 몸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료 전문인은 의사지만, 결국 내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p28 식이요법을 지도해준 분은 “질병은 몸에 찾아온 손님”이라며, 극진히 대접해서 떠날 수 있게 해주라고 했다. 질병은 죽음으로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덧붙였다. 엄격히 생활을 관리하며 사는 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몸을 이토록 극진히 돌봐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떠올리며,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려 했다.


p30 질병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는 일이다.


p69 따라서 건강만을 중심에 두는 것은 아픈 몸이 평등하게 함께 사는 과정을 방해한다. 아픈 몸이 동정과 시혜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의 주체로 온전히 살아가려면 건강한 몸이 중심이고, 아픈 몸이 주변이어서는 안 된다. 건강을 선으로 규정하고, 질병을 절망과 악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 사이에 발생하는 위계가 해체될 때, 아픈 몸도 차별과 배제 없는 삶을 누릴 수 있다.


p73 질병과 함께 사는 이들이 아픈 몸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규정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정상성에 대한 균열,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 다른 상상력을 생성시키는 ‘질문하는 몸’으로 우리가 함께 ‘트랜스trans’할 수 있기를 바란다.


p81 의사로부터 병명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해서 고통이 실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병명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통증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병명이 없다고 질병이 없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p140 나는 질병과 노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p145 누군가는 “돌봄이 가족 밖으로 사회화되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어 돌봄을 나누며 산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돌봄을 가족의 역할이자 의무로 묶어놓고 사회적 책임을 방기했다. 심지어 가족 내 돌봄노동은 성별화되어 수행도 수혜도 공평하지 않았다. 더욱이 1인 가구는 가족들과 주거로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돌봄에서 더욱 소외된다. 이런 현실에서는 돌봄의 사회화가 매우 중요하다. 돌봄이 가족을 떠나 곳곳에서 일상화되는 사회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돌봄의 사회화는 ‘돌봄 공동체의 재구성’과도 깊이 연결된다.


p154-155 성폭력은 여성의 인권 문제이자 시민권 문제이지만, 성폭력으로 인해 다양한 질병이나 후유증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건강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p174-175 건강은 고용, 임금, 관계, 학력, 주거, 돌봄, 지역 등의 영향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돈을 벌어야 생존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건강에 매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해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유병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비정규직일수록, 저임금일수록 건강이 나쁘다. 그리고 삶에 대한 통제권이 적을수록, 차별을 받을수록 건강이 나쁘다.


p183 앞서 말했듯 건강하다는 것이 사회 활동에 무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혈액이나 세포 수치만으로 정의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생물학적 실체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을 포함해 다시 합의되고 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p191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지금 내 몸이 나에게 ‘정상’임을 좀 더 깊이 수용할 수 있기를, 내 몸에서 질병이 삶과 좀 더 사이좋게 흘러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어느 시절 죽음과 잘 마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덧붙여, ‘정상’이 아닌 몸으로 흔들리는 삶 위에 놓인 이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p199 불확실한 몸들에게 작은 파이를 놓고 경쟁시키는 사회를 향해 전선을 긋고, 서로의 낙인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성찰하고 질문할 때, 그래서 자기 몸에 대한 불안을 서로에 대한 연대로 바꿔낼 수 있을 때 다른 문이 열릴 수 있다.


p217 나는 수술 이외의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의사는 수술의 안전성과 임상 사례를 설명한 뒤 문진표에서 내가 채식주의자라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어서 수술 후 복용해야 하는 호르몬제가 혹시 동물실험으로 개발되었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그렇지 않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그 순간 느꼈다. ‘여기선 내가 사람이구나.’ 이상한 말이지만 그랬다. 질병이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격체로서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p219 영어로 ‘환자patient’는 고통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자기 삶의 통제권을 상실하는 경험이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주체적 삶을 회복하려고 찾는 병원에서, 통증이나 질병이 아니라 의사나 시스템 때문에 또 다른 무력감과 통제권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히 의사가 환자에게 보다 친절한 말투로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환자의 건강은 수술대와 약, 세포의 수치 속에만 있지 않다. 나는 질병에 점유되지 않은 삶,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기 위해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다.

p225 여전히 양방에는 한방을 비과학적이라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고, 한방에서는 양방이 국소적인 의료라고 불신하는 분위기를 보인다.

서로에 대한 불신에는 양방과 한방이 인간의 몸과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 즉 의료에 대한 근본적 관점의 차이가 작용하는 것 같다. 양·한방 병행 치료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양·한방 갈등을 둘러싸고 심심찮게 보도되는 기사를 보면 답답할 뿐이다. 두 집단은 전문성이나 국민 의료 증진을 내세우지만,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눈에는 영역 다툼과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해서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의료계도 예외는 아닐 테니 그 자체가 놀랍지는 않다.


p264-265 그런 의미에서 ‘건강 불평등’ 문제는 가난하거나 차별받는 사람이 더 많이 아프고 삶이 더 불안정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아프다는 것은 개인의 삶의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제한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질병으로 취약한 몸 상태에 머물게 되면서, 동료들만큼 의미 있는 많은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때로는 중요한 회의에 빠지고,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의사 결정권에도 제한이 생긴다. 건강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갖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사회 구성원이 평등하게 건강권을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등한 사회 참여 또한 시작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온전한 사회 참여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p268 또한 2015년 메르스가 휩쓸던 당시 메르스 확진자 중 보건의료 종사자가 40명, 즉 전체 확진자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많이 회자되지 않았다. 아울러 감염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감염 환자를 직접 돌본 간호사들은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양측 모두 업부 수행 중에 질병이 생긴, 전형적인 산업재해에 속한다. 그들은 그 질병과 후유증을 일시적으로, 혹은 평생 갖고 살아갈 것이다. 업무 환경이 안전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질병이었다.


p280 인구의 다수는 임금노동자다. 직장에서 노동자의 건강권이 지켜지지 않는데 시민의 건강권이 지켜지기란 불가능하다. 노동자 당사자뿐만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사회적 돌봄과 안전망이 부실하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 아빠가 아프면 자녀들은 건강하게 돌봄을 받기가 어렵다. 또한 그들이 고령의 부모들을 돌볼 여력이 있을 리도 없다. 일하느라 몸이 아파도 가족 안에서 돌봄을 기대하지 않거나 기대하지 못하는 이들은 급속히 나락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p281-282 우리에게는 계속 ‘광장’이 필요하다. 광장에서 촛불의 파도를 만들며 느낀 ‘조증’과, 일상으로 돌아와 파편화된 개인이 되어 느낀 ‘울증’을 통합해내자. 이를 위해서는 일상에 ‘광장’이 필요하다. 일상 곳곳의 광장을 재발견하자.


p292 질병을 정의하고, 발생 맥락을 규정하며, 치료 과정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다. 질병을 어떻게 규정하고 질병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몸을 만나게 된다.


p346-347 소수자의 몸은 다 그렇다. 늘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설명이 필요 없다면 이미 소수자에 속하지도 않는다. 남성, 비장애인, 건강한 몸과 달리 여성, 장애인, 아픈 몸은 늘 설명을 필요로 한다.


p349 하지만 다양한 몸이 사는 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몸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은, 언젠가 자신의 미래가 될 그 몸에 대한 ‘배려’만은 아니다. 다양한 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정상’의 몸들도 질병이나 장애, 노화에 대한 두려움에서 좀 더 자유로워진다.


p359 내가 고마움을 표할 때마다 친구들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서로의 집이기로 했잖아”, “우리가 서로한테 보험 가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서로의 엄마인 거 아니었나?” 친구들이 독립해 1인 가구로 삶을 시작하거나, 비혼주의자로 자신을 정체화했을 때 서로에게 좋은 울타리가 되어주자며 나눈 이야기들이다.


p363 몇 년 전부터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 말이 맞다. 비혼은 기존 가족제도를 위협한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들어가길 거부했더니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가족제도의 재생산을 위협하게 되었다. 개인의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이고, 여성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지금의 가족제도가 하루빨리 균열 되길 바란다.


p379 이렇게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주요 출발점 중 하나는, 몸(삶)과 세상의 언어가 불일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침묵에 가두거나 세상에 일방적으로 꿰맞추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아픈 몸을 비롯해서 여성, 이주민, 장애인, 성 소수자처럼 기존의 언어가 몸에 맞지 않는 이들이 자기 삶의 경험을 반영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세상에 제시하며, 그 언어가 힘을 얻고 사회에 수용되어 가는 것. 그 과정을 통해 배제당했던 소수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p382 여성운동에서 누가 여성인가는 논쟁적 주제다. 장애인운동에서도 무엇이 장애인가는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다. 각각은 고정된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며, 그것을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운동의 좌표를 계속 질문하는 주요 과정이기도 하다. 건강권 운동(보건의료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건강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싶다. 더 풍부한 논쟁이 더양한 소수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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