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_나의 가련한 지배자
<나의 가련한 지배자>를 읽으며 처음에는 나도 엄마에 대해 이런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생각하다가 조금씩 다른 생각들이 뻗어갔다. 너무 당연하게도 저자와 나 그리고 저자의 엄마와 나의 엄마는 모두 다른 맥락과 역사를 지닌 사람들이고 우리가 경험하고 주되게 기억하는 것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중년이 된 저자에게는 예전과 같은 크기는 아니지만, 현재도 엄마가 어떤 불편을 일어나게 하는 존재이다. 여전히 그에게 엄마는 가련하면서도 동시에 권력자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의 중반부는 그의 엄마를 글로 만날 뿐인데도 조금 힘들었다. 한편으론 저자의 엄마만이 아니라 저자 역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는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지점이고,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그 적당한 거리에 대해 사는 동안 계속 안고 가야 할지도. 엄마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가련함과 동시에 지배자를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단박에 이해할 공감이 나에게도 있지만, 나의 경우 그러니까 나와 엄마의 경우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고 생각해서 정말 언제고 나는 그 일을 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더, 그리고 계속해서 엄마와 딸, 엄마 됨에 관한 원망과 이해라는 이 사적인 역사가 더 많이 기록되고 호명되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과거사가 드문드문 생각이 났다. 엄마는 내가 잘 나가서 자신의 ‘나의 꿈’을 실현해주는 딸이 되길 요구하지는 않았다. 물론 엄마도 내가 잘 사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왜 없겠냐 마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 세상에 나와 동생의 삶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그런 류에 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느 부모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들이 명확했고, 통제하는 것이 있는 걸 보면 엄마는 그런 축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어린 자녀에게 방임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면에서는 너무 소중한 자유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은 다행과 불행을 모두 가진 양면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불행한 시절이 있었지만, 다행이기도 한 그런 것.
엄마는 자신이 가난해서,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자신이 잘 해주지 못해서, 라는 이유가 뒤섞인 채로 나를 그대로 두었다. 어릴 적 엄마에게 많이 맞았고 혼이 났지만, 그건 내가 학교에서 몇 등을 해야 하고, 공부를 잘 해야 해서란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잘못된 방식이지만,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삶의 힘겨움을 나에게 그런 식으로 토로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부모였던 엄마가 우선순위로 돈 쓸 구멍은 나였을 시간이 길었을 텐데, 그럼 에도 엄마는 나에게 들인 그 비용을 회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부모에게 벗어날 수 없는 쇠사슬이 묶인 듯한 착한 딸의 굴레를 지고 사는 사람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런 나조차도 아직 닥치지 않았지만, 언제고 올 거라 짐작되는 부양의 의무에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었으니, 그 요구를 받는 엄마의 아이들 특히 딸은 얼마나 굴레가 됐을까.
나는 엄마보다 나를 우선하는 ‘이기적인 딸’이 되었다. 그리고 무척 힘든 시절이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엄마가 끝까지 자기 팔자라며 버티며 늙지 않고 행복하지 않았던 아빠와의 생활을 끝낸 ‘이기적인 여자’가 되어주어서 고맙다. 그녀의 재혼 생활이라고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시작에는 사랑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그렇지 않았던 아빠와의 생활을 마무리 지었던 여성이 엄마여서,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관계를 새로이 시작한 엄마여서 기쁘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이젠 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어 부모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을 엄마와 아빠에 대해 언젠가부터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는 같은 보살핌이라도 사랑의 보살핌보다는 체벌과 분노가 동반된 보살핌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다는 관점 말이다. 일찍부터 자립했던 명자(엄마)는 나를 오래도록 책임지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나의 자립에 있어서도 어떤 방해 요소가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물론 너무 명백하게도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다. 현재 엄마가 임금노동을 하고 혼자 자립해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틀렸다. 엄마는 이미 오랜 시간을 충분히 혼자서 일을 하고 나를 키웠다. 더할 것 없이 이미.
한편으로 어린 시절 엄마의 ‘집 나감’으로 인해 연약한 상태인 나를 두고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일찍부터 몸으로 체화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양육이 절대적인 시기의 자녀는 너무 당연하게도 어떤 것을 스스로 선택하며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누군가는 무슨 연관이냐 하겠지만, 나는 가난이 주는 것들이 모험심과 용기와 자신감 형성에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억울하고, 그걸로 탓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구김살 없는 해사함을 어린 시절 가난해 본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과 그런 나에게도 힘이 있다. 허황한 꿈으로 상처받지 않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이 있다고. 내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또래 친구들보다 먼저 왔지만, 이로운 것도 있었다. 엄마는 자신이 잘 뒷받침해주지 못해 자책으로 삶을 보내는 대신 나를 그냥 두었다. 무얼 해도 알아서 잘 살아갈 거란 그녀의 생각 속에는 ‘내가 해준 게 없어서’라는 생각도 한 묶음 담겨 있었다. 때로 고통이 되고 억압이 될 수 있는 것들은 교묘히 잘 섞여 들어갔고, 커다란 용기와 모험심은 없을지 몰라도 나는 대체로 어디서든 잘 견디고 잘 살아왔다.
엄마가 결혼할 때는, 연애고 섹스고 뭐 다 모르니까 코 꿰이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엄마의 처음들과 결혼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걸 떠올릴 때면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마음이 아프다. 데이트다운 데이트 하나 없이 폭력이었던 시작들로 임신을 하고 결혼을 한 ‘무지한 여성’. 폭력으로 유산이 되고 이후 2년 터울의 두 딸을 낳은 엄마의 삶은 과연 무엇으로 이어졌을까. 나는 수많은 폭력 속에서도 살아남은 무수한 ‘명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한때 삶의 가장 큰 기쁨이 되었을, 그리고 가장 큰 절망이 되기도 했을 자식들. 그 자식인 나는 다음이라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라는 게 그전과 똑같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 내 엄마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그때 아빠와 결혼해서 아프지 마. 나는 그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자식은 이 운명의 트랙 위에 올라앉아 있다. 특히 딸들이 갖는 엄마에게 가지는 원망과 연민은 딸들의 숙명이다. 딸들은 언젠가 엄마가 될 테니까. 엄마가 되리라는 예언은 그런 점에서 축복이기보다는 저주다’라고 썼다. 이 문장을 몇 번 읽으며 곱씹어 보았다. 나 역시 이성애의 일대일 관계 그리고 결국 어떤 시작의 완성은 결혼이란 생각을 가지며 오랜 시간 살아왔다. 결혼이 당연한 것이 되지 않았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임신 출산 육아를 하며 사는 삶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세 아이를 손에 잡고 안고 가는 가족 아니 여성을 보면서 누군가에겐 단란한 저 모습은 내가 하고 싶은 행위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명자는 나에게 결혼을 재촉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 엄마가 되었다.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비혼/비출산/비육아에 대한 지향은 엄마의 이혼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으니까 그것은 없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지 않다. 나는 조금 다른 꿈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이성애 기반 결혼 제도는 차별이라는 관점이 만들어진 나는 더이상 이성애자로 나를 규정하지 않고 있고, 나의 선택지는 결혼만이 아닌 더욱 넓어진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엄마와 너무 다른 여성이고, 너무 다른 딸일 수밖에 없고, 너무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 점이 나의 엄마인 여성을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되진 않는다. 우리가 같은 길을 걸어야만 서로에게 공감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너무 다른 우리를 여성주의 인식 속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게 되었고,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꿈과 일상을 세세하게 나누는 건 엄마보다 곁의 친구들과 더 많이 하는 지금의 나. 그러나 그것을 나누는 것이 엄마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상황과 위치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루액을 맞고 괴로웠던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집회에 나선 사람이었고, 엄마는 임금 노동하던 집의 대학 다니는 언니를 통해서. 나는 이미 너무나 엄마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엄마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엄마의 ‘엄마 경험 시간’을 이해하지도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엄마도 그렇다. 엄마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였기에 나처럼 삼십 대이면서 비혼인 사람의 시간을 살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다르다. 그렇지만 그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요소는 아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믿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
<나의 가련한 지배자>, 이현주 지음, 코난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