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_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여성의 우울을 ‘여성의 것’으로만 한정하고, ‘원래’ 그렇다는 너무 쉽고 안일한 태도를 지녀왔다. 그 속에서 나도,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도, 우울적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 모두가 내가 예민하고, 이상한 탓일까? 생각하기 너무나 쉬웠고.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진단기준에서부터 왜 그토록 제멋대로 남성 중심이었는가. 오랜 시간, 아니 지금도 여전히 ‘건강함’ 바깥은 비-남성의 영역이다. 원래 그런 존재들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쪽에선 원래 이것은 남성만의 몫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상과 강력한 규정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눌리고 좁혀진 사람들이 있다. 이해받지 못하고 나약한 사람 치부되고, 삭제되기 일쑤였던 사람들을 있고, 그 사람들을 만난 저자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정성스런 인터뷰를 한 저자가, 정확한 질문들을 던진 저자가, 그리고 그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쉽게 치부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다양한 엮음으로 이 한 권의 책을 빚어낸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글도 너무 좋고.)
우울증이 좀 더 아무렇지 않아지는 사회를 바란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우울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만을 이야기하며 우울증을 병리화하면서도 정작 그 목소리의 사람들은 바라보지 않으려는 사회를 바꾸자는 것이라고. 누군가의 고통이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울의 삶의 들여다보고 함께 해준다는 것이라고. 물론 이건 한 개인들에게 쉽지만은 않다. 우울적 순간을 경험하는 당사자들과 그 곁의 누군가들 모두에게 말이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정상이 아니라고 무시하라고 했던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불쑥 겁이 나서 외면해버리기 쉽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여전히 삶의 어떤 순간마다 그런 장면을 만난다. 그럼 또 반성하고, 울지만 그럼에도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방법을 모색해보자고 나눌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건 그저 당신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나와 당신, 나와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고통의 서사를 짓밟는 게 아니라 함께 나누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 나는 이 책에서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자원을 동원하고 서로에게 건네주면서 고통을 재해석하고 서로에게 공유하며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가야 한다. 내게는 다양한 지점이 있었지만, 여성주의 모임이 이런 시간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한 지점이 되어주었다. 우리가 마주 앉아 스스럼없이 나는 것들이 있다. 처음 만난 자리인데도, 우린 서로 너무 다르게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그 관계의 보이지 않는 줄이 팽팽하건 느슨하건을 차치하고 누군가 나의 말을 경청해주고, 당신이 이상해서가 아니라는 마주함을 준다는 것. 그것이 쌓아가면 사람들은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믿고, 믿어주는 것을 품에 안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한 ‘페미당당’과 같은 공간과 관계가 내게도 있었다. 대다수가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었고, 페미니스트 활동가 그룹이었던 페미당당처럼 내게도 그런 공간과 관계가 있었고, 그 경험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드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영향을 끼치며 살아간다. 그 관계는 여전히 나에게 중요하게 작동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과 같이 사회운동을 했고, 공부를 했고, 밥을 해 먹었고, 집회에 나갔고, 잠을 잤고, 경찰에 맞섰고, 게임을 했고, 울었고, 웃었다. 살아온 과거를 나누었고, 지금을 꺼냈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어느 특정한 형태의 틀에 넣을 수 없겠지만, 지금의 우리 삶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서로에게 중요한 ‘사이’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을 소중히 품고 나의 삶에서 또 다른 관계들을 만들어가고, 만나가며 확장해 나가려 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있다고 하여 인생이 우울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충분히 살아갈 힘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삶의 많은 부분이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만나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아무런 노력 없이 운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기 돌봄도, 서로 돌봄도 모두 ‘서로’라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를 돌보는 곳을 어느 한 사람 혹은 어느 한 곳으로 설정하는 것이나 요구하는 것은 돌보는 사람만이 아닌 돌봄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도 경계와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각자가 그런 고민과 선택이 필요하다. 누구나 일방적으로 돌봄 받는 사람으로만 혹은 돌봄 주는 사람으로만 설정될 순 없다. 내가 돌봄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듯 나 역시 돌봄을 주는 행위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함께 돌아가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공부를 하고 활동을 하는 관계에서도, 어떤 관계에서든 늘 고민될 것이다. 어느 정도를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을지, 개입해도 괜찮을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감당해 나갈 것인지. ‘우울’은 그 우울이란 글자를 쓸 때보다 훨씬 더 납작하지 않다.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만 보아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돌봄은 언제나 종착지가 아니라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와 내 친구들이, 아니 이 글을 어디에서든 읽거나 보게 될, 아니 그게 누가 됐든 ‘당신’이 ‘안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저의 자리에서 계속해 볼게요. 이건 우리‘들’의 이야기이니까요.
덧붙임: 이제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된 홍칼리의 글을 만나러 가자.(다음 공방모임의 책) 홍칼리의 이야기는 의미 있었다. 한국에서 조울증 진단을 받은 그가 치료의식 등을 통해 무속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갈림길에 섰을 때, 그를 치료대상이나 악령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쉬웠을 기독교 내부자로서 다른 길로의 가능성을 이야기해주었던 목사의 말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나와 여태 경험한 공간과 달리 해석의 권위가 여성들에게 존재하는 무속신앙을 만났다는 것이. 그런 홍칼이의 이야기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무척 궁금해졌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