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_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은주라는 이름을 빌려 이정식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무명씨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을 통해 그를 만난 이들이라면 많은 경우 처음일 이야기들을. 그 경계는 너무 모호하고, 그 모호함은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경계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같다고 할 정체성이 있겠지만, 너무 다르고, 내가 알지 못했던/알 수 없을 정체성들이 있기에 과연 우리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니 그래 우리가 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없지. 어떤 하나의 상황 속에 놓인다 해도 그가 가진 경험과 정체성들이 그를 더욱 위험으로 밀어 넣거나, 위험 밖으로 꺼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놓지 못한 건, 우리가 너무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조금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들이 온전하게 존중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 역시 조금 하다가, 아니 이 생각을 늘 하다가.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가. 그냥 존중받을 순 없나. 나는 화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도 화만이 아닌 여러 감정이 몰려오고. 몰려올, 몰려왔을, 어떤 사람들을 생각한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을 오래도록 쳐다봤을 누군가를. 시선으로도 사람이 죽고 있는 사회에 서서.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정식, 글항아리
p7 거울에 비친 분노가 자신을 향함으로써 스스로를 해하지 않고, 거울 속의 외로움이 스스로를 잠식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화된 위치에서 착취와 차별에 저항하는 퀴어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이정식의 분노와 관계 맺는 이야기는 내게 큰 동질감과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 가정폭력을 경험하지만, 이 사회는 피해자가 퀴어이거나 누군가와 섹스를 했거나 학업 성적이 나쁘거나 장애가 있거나 빈곤하면 쉽게 보호를 철회한다.
p8-9 혐오의 언어가 구체화되고, 그것이 착취를 위해 사용되지 않게 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들어보지 않은 이야기, 상상해보지 못한 삶에 가까이 다가가 연루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p11 2013년 감염 사실을 사회에 공표하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 주변 지인들은 크고 작은 걱정들을 얹었다.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지만, 네가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들도 감당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는 도래하지 않을 ‘완전한 타이밍’ 같은 건 애당초 선택지에 놓지 않은 듯 보였고 차라리 불완전한 모습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그에게는 이전보다 많은 동료가 생겼고 제 길을 설렁설렁 꼬장꼬장하게 만들어갔다.
p49 알고 보니 하나의 부모님이 그녀의 죽음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게 싫다고, 그녀가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렇게 된 거 아니냐고,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시끄럽게 알려져서 내 자식 이야기라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알까 무섭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했던 친구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울었어요.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슬펐지만 멍한 느낌이 들 뿐 눈물은 흘리지 않았거든요.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때 울음이 터진 거예요. 이런 게 어딨어. 말도 안 돼.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몇 번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냐고.
p51 경제적인 고립은 단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아니다. 점차 웃을 일이 사라지고 굳어버리는 얼굴 속에 마음은 늘 누군가를 향해 날카로움을 품기가 쉬워진다. 그게 나 자신일지라도. 가게에서 책을 읽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거울 속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고.
p57 이런 질문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식씨는 자신의 작업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 아니요, 단 한 번도. 전 해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불편함이라. 그건 제 몫이 아니에요. 듣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혹은 듣지 않은 자들의 몫이거나.
p75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의 약자들을 절벽 가까이로 밀어내고 있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로 가게 문을 열 수 없으니 많은 친구가 언덕으로 올라가거나 집으로 남자를 불러들여요. 언덕으로 올라간다는 건 트랜스젠더들이 남산 소월길에서, 인도 위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매매 노동을 한다는 말이에요.
p79 그 외로움을 듣고 달래주는 동안 여기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영혼에도 조금식 외로움이 쌓여갔던 게 아닐까 싶어요. 쓸쓸한 죽음들을 듣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부디 오늘은 모두에게 평온한 밤이길 바래요. 떠난 이들과 남겨진 밤의 우리의 삶에.
p106 전 제 질병 사실 때문에 사랑할 권리를 잃지 않을 거예요. 사랑은 저의 힘이거든요. 나를 뜨겁게 하고 일으키고 살게 하는 힘이요.
p115 단지 나 자신의 한 부분을 말했을 뿐인데 그걸 용기 있는 행동이라 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어. 애초에 차별의 말과 혐오의 시선들이 없었다면 HIV를 말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기나 할까. 난 겁이 많고 나 자신을 숨기고 가리다가 예민해지기 쉬운 사람일 뿐인데 그런 내가 용기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p118 영정 사진이 없어 액자에 검은 음영으로 남겨진 김무명을 보면서 평등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이르러서조차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을 실감했어.
p121 그분이 가시기 전에 수동연세요양병원에 같이 있었던 형을 찾아갔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그 형에게 처음으로 말한 거야. 고기 좀 사달라고. 그랬는데 그 형이라는 분도 지갑에 1만 원조차 없으니까 고기는 다음에 먹자며 거절하신 거야. 미안하데,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고기조차 못 사줘서. 고기도 못 먹고 가서 불쌍하다고 하셨어.
고기가 뭐라고. 한 끼 고기 먹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는 생각도 못 하고 살아왔는데. 질병을 더 가혹하게 만드는 건 가난이겠지.
p142 단지 새로운 고민이 생겼어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후에 처음으로 생긴 고민이네요.
우리의 사랑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 앞으로 달라진 사랑의 방식을 어떤 방법으로 풀어나갈지, 그게 저의 처음이자 유일한 고민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