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나_사랑의 은어
조그만 비건 베이커리 카페에 갔을 때, 읽다만 흔적의 이 책을 만났었다. 사장님에게 잠시만 이 책 좀 볼게요, 라면서 몇 장을 슬렁슬렁 보다가 조금 궁금해졌다. 공연 본다고 대전에 갔을 때, 들른 대전 책방에서 이 책을 만나고 대전에서 활동하는 이의 책을 대전에서 사가는 것도 참 진부하지만 기억에 남겠군 싶어서 책을 샀다. 생각보다 나를 휘어잡는 읽기의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쩜 이렇게 기억을 하고, 그때의 느낌을 잘도 적었나 싶게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 같은 글들이 한 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 있는 이 책을 읽으니 참 놀랍기도 하다 싶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야 가끔 매체나 어떤 기획들로 보긴 했지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 싶지만 서도, 참 이이는 사랑과 우정에 대해 언어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이로군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과 우정이 서로에게 집요한 이들을 기꺼이 감당하고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으면서 더욱 우리의 세계가 넓어져 간다는 것을 이이의 글을 읽으면서도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사랑의 은어>, 서한나, 글항아리
p53 결혼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해도 된다는 의미다.
p74 받은 사람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감정에 관한 것이다. 코끝과 귀가 빨갛게 어는 겨울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의 온기, 같이 사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뜨끈한 손으로 두 귀를 꼭 감싸주는 것, 버스에서 나도 모르게 옆 사람 어깨에 기대어 졸 때 손등으로 차양을 만들어 빛에 눈이 찔리지 않도록 가려주는 것, 내가 들어간 가게에서 내가 필요해 고른 물건을 당연하다는 듯 계산하고 봉투까지 드는 사람, 우산을 쓰면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서 춥겠다며 손으로 팔을 쓸어주는 것, 바위에 걸터앉을 때 두꺼운 책을 깔아주는 것. 아무렇지 않은 다정함이 습격한다.
p75 사람의 따뜻함은 언제나 살아갈 힘을 주었다. 감정이 부족하면 나도 모르게 외로워진다. 아, 그럴 때 있지. 그거 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는 무사히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봉지를 뒤적였다. “방울토마토 드실 분?”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근데 진짜 바리바리 싸주신 거 감동이다. 우리도 나중에 이렇게 하려나?” 그렇겠지, 받았으니까.
p92 효심 양심 도리 같은 건 무슨 핑계를 대서든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런데 엄마가 내 곁에서 만들어내는 평화 앞에서는 몸에 힘을 빼게 된다. 엄마한테 저런 면이 있었지, 내가 저런 면을 좋아했지, 느끼고 나면 엄마가 예민하게 구는 날에도 한편 그를 이해하게 된다.
타인과 관계 맺듯 엄마를 대하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내리사랑 바라지 말고, 하지도 않는 효녀 노릇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그를 한 명의 사람으로 봐주면 어떨까.
p99-100 가정은 화목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가족은 마음에 안 들어도 괜찮은 것이었다.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고, 마음이 통하면 금세 정이 들었다. 밖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기분과 상태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다고 생각되면 가족에게 하는 것보다 더 노력하게 됐다. 가족보다 남이 편했다. (...중략..)
가족인 사람을 사랑하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되기를 꿈꾼다. 명절 연휴를 함께 보내고,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 나와 함께 사는 그 사람을 연상하는 관계. 서로가 서로를 기르는 사이.
p100 어떤 모습으로든 가족이 된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빌라에 살면서 밥을 함께 지어먹고, 퇴근 후에는 누구 집에서든 만나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나누는 친구들. 연휴에는 평소에 자주 가는 술집에서 한잔하고 집에 들어와 조금 더 마시는. 서로의 성향과 욕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각자의 삶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고 공유하고 싶은 만큼 공유할 수 있는. 목적 없이 거실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이들이 별일 없이도 계속 모여 있는 걸 보면 외로움이 식을 것 같다.
p141 사람이 싫고 징그럽게 느껴지는 순간은 자주 온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사람도 온다. 정말이지 달콤하고 귀엽고 세상의 온갖 추악한 면을 한순간에 녹이는, 페이스트리 같은 사람. 덴동에 올라간 김 튀김처럼 바삭바삭하고 오래오래 입맛 당기는 사람, 볕에 잘 마른 돌계단처럼 단정하고 포근한 사람 하늘과 햇빛과 이파리가 주는 느낌을 해치지 않으면서 천천히 대화할 수 있는 사람.
p149 “취향에 안 맞는 거 아니에요?” 내가 걱정을 했다. 형광 주황색에 형광 연두색 옷을 입은 성아 씨가 이런 말을 했다. “내 취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냥 그 자체가 좋은지 생각해요. 취향은 과거의 것이잖아요.” “어쩌면 그렇게 유연하세요?” 감탄하면서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저는 엄청 꼬장꼬장하게...... 안 좋다는 생각이 들면 싫다고 다 말해놓고 뒤에서 혼자 좋아해요.” 성아씨는 잠시 주저앉아서 웃었다. “진짜 꼬장꼬장하고 너무 좋아요.”
p152 사랑을 떠올리면 처음 만나던 때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본 날이 생각난다. 그건 우리가 자주 만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 만나던 때의 사랑과 지금의 그가 너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처음 사랑을 알게 되던 날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로를 오래, 깊이 파고들 줄 몰랐다.
p166-167 “누굴 비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과 일상에 안착하는 일 가운데 뭘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대화가 깊어지면 무슨 이야기로 시작했든 사랑과 욕망으로까지 넘어갔고 그는 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voyage와 journey를 들어 사랑에서 그 둘이 다르다는 걸 이야기해줬다. 나는 그의 정밀함보다도 내가 속말을 한다는 데 놀랐다. 마음을 못 여는 것은 에너지와 감수성이라는 자원을 지키기 위해 직감이 작동한 결과다.
p167 “그래도 나한테 집요한 네가 있어서 즐거워.” 그가 나에게 준 말의 기쁨을 내가 그에게 돌려줄 수는 없을까.
p172 우리는 사랑받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연마한다. 받은 사랑을 박제하기 위한 글쓰기와 사진술을 훈련한다. 영원은 순간이고 순간은 영원하다. 누군가의 낙서를 편지함에 넣는다. 그것이 마치 누구라도 된다는 듯이.
p176 엄마가 세상에 더는 있지 않게 되어도 엄마가 했던 농담이나 엄마가 지었던 표정이나 엄마의 고유성 같은 것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슬픔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엄마를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p197-198 나는 이제 사랑에 대해 쓰려고 한다. 몸에 힘을 다 빼고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불신과 누추함 질투 열등감 같은 것을 떼어낼 수 있을까. 나는 사랑 앞에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습기는 땀으로도 뺄 수 있다니까 이제 나는 사랑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불안하면 불안하다고 그리우면 그립다고 모르면 모르겠다고 알면 알겠다고 알아도 몰라도 사랑한다고 나만 나를 잃고 너는 너를 잃지 않는 게 무섭다고. 사랑에 빠져드는 느낌은 통제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느낌인데. 내가 바라는 건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랑을 계속하는 거라고. 이제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p201 들여다볼 구석이 많은 글은 공백이 많은 글이 아니라 문장 뒤에 맥락이 아주 많이 쌓인 글이다. 공백이 아니라 맥락이야 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