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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Sep 20. 2023

아무도 몰랐던 폭력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_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성/폭력 피해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매일 나오는 뉴스가 그러니까. 그렇지만 사실 그건 피해에 대한 것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 에서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기 쉽다. 성/폭력 피해에 대해, 피해경험자들의 이후 삶에 대해 잘 모르기 쉽다. 잘 다뤄지지 않기 쉽다. 그리고 그것이 이주여성일 경우 더욱 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엮은 폭력 피해 여성들의 생존 분투기이다. 사례들 모두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폭력과 통제, 억압이었는데 특히나 마지막 이야기가 여러모로 힘들고 슬펐다. 결국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간 그의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들처럼 남편의 폭력이나 시댁 식구들의 괴롭힘과는 다른 남편의 의붓 아버지인 재혼한 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이 이뤄졌고 이에 대해 재판으로 싸우면서 이전에 베트남에서 고질적이고 고약한 생활풍습이란 이름으로 자행됐던 약탈혼(사실상 나이가 어려 법적 결혼을 한 것이 아니어서 ‘혼’을 붙일 수도 없다), 즉 납치되어 강간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함하게 된 경험으로 결혼 생활까지 끝난, 그러니까 아예 혼인 무효 소송을 당한 사례였다. 이것은 한국에서 경험한 성폭력 사건에서 과거의 일이 보호되지 않고 침해당하며 들춰지고, 그것이 혼인무효까지 가게 된 재판 자체가 폭력적인 경우였다. 이 지난한 삶의 과정에서 그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왜 십 대 소녀일 때, 납치당하고 강간당해야 했으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 선택한 한국의 결혼이주가 또다시 성폭력을 경험하고, 소송에까지 휘말려야 하는가. 앞서 나온 많은 사례들 역시 잘 살아가고 싶어서 선택한 한국에서의 삶이 왜 폭력으로 뒤덮이고, 고통이 되어야 하는가. 이 한 사례만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아야 할 범죄들이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어디에나 피해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또 어디에나 싸우는 여성들이 있다. 농촌에서 ‘싸우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났듯.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엮음, 오월의봄


p8 외국인 여성 피해자를 포함하지 않는 제도에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주여성은 가정폭력을 경험한 선주민 여성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가정폭력 피해를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신고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중개업을 통해 속성으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신뢰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았으며, 서로의 문화적 차이와 불완 전한 의사소통은 공고하지 못한 국제결혼 관계를 더 흔들었다.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부부관계가 틀어졌다면 이혼을 하면 그만인데, 한 국인 남편들은 외국인 아내가 이혼하고서 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외국인은 비자 연장을 통해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데, 비자마다 연장 조건이 다 다르다. 비자 연장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폭력 피해 이주여성이 순식간에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있었다. 출신국, 종교, 한국어 구사 능력, 피해 사례에 따라 저마다 사정이 다른 이 주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전문성이 필요했다. 이주여성 전용 쉼터가 필요했던 이유이다.


p20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엄마가 한국어를 모르면 아이도 무시를 당하거나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나에게 무언가 질문했을 때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설명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이나 시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시어머니는 “일을 시키려고 데려왔는데! 네가 뭔데! 공부하고 싶으면 집에서 나가! 공부하려면 필요 없다!" 하고 소리치곤 했다. 가족들은 툭하면 내게 나가란 소리를 했다. 나는 정말 일꾼으로 이 집에 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p26-27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도 가끔 캄보디아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쉼터에 온 지 2년이 지나도록 끝이 보이지 않는 소송이 지겹고, 아는 사람도 없이 한국에서 아이와 단둘이 살아갈 일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친정 식구들도 외롭게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이가 걱정되어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혹시라도 양육권 소송에서 지게 된다면 아이 없이 한국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 생각해보면 아이 를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아이를 키우지 못 하게 되더라도 한국에 살면서 아이가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 보자 싶기도 하다. 요즘은 아이도 자신이 아빠와 살게 될까봐 겁이 날 때가 많다고 한다. 아이는 아빠를 보고싶어 하지도 않는다. 법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밖에서 몰래 혼자 술 한잔하는 것도 이런저런 생각에 답답하고 복잡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한국에 온 것이 많이 후회된다. 나는 후회된다.


p31 고립은 피해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가정폭력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이다. 쏙카의 경우처럼,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만드 는 식이다.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하고,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외출을 감시하고 시간을 제한하며, 피해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면 이기적이라고 하거나 잘못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가해자는 무엇이 '좋은' 것인지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린 다. 그렇게 해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려는 피해 자의 선한 동기를 이용해 피해자의 행동을 통제한다. '누가 외국인 을 쓰겠냐?'라며 이주여성이 세상으로 나가려는 시도 자체를 좌절시킨다. 피해자는 괴로운 상황을 혼자 감당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p34-35 쏙카의 경우, "성적 착취, 강제노동이나 강제고용, 노예제도나 그와 유사한 관행'에 해당되는 착취를 당했다. 따라서 일종의 사기 또는 기만으로 결혼이 이용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부부로서의 관계를 맺는 '결혼'을 하고서 사실은 ‘밭에서 일하라고 돈 주고 데려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결혼을 빙자한 인신매매였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쏙카가 자유와 권리 를 박탈당하고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노동을 한 일련의 경험은 배우자가 아니라 노예로서의 삶에 가까웠다. (…중략…) 그러니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기초로 이뤄졌어야 하는 결혼이 어쩌다 인신매매처럼 변질되었을까? 어쩌다 결혼이 가족을 맞는 환대가 아니라 값싸게 일꾼을 들이는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나?


p51-52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상업적 속성 결혼 방식은 당사자들에게 결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만든다.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법률' 제10조의 2항에 따라 결혼 당사자들에게 국제결혼 중개업자는 신상정보 제공의 의무가 있다. 맞선 과정에서 서로의 정보(범죄경 력증명서, 건강진단서, 혼인경력, 직업 등)를 서로의 언어로 제공해야 하나 언어적, 경제적, 시간적 제약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러다보니 국제결혼 당사자들은 배우자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체로 결혼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배우자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더 나은 미래와 윤택한 환경을 꿈꾸 었던 이주여성이 한국으로 와서도 여전히 빈곤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p54-55 한계 상황에 있는 그녀에게 일거리를 주고 품삯을 주었던 시골의 공동체는 분명 고마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가 동네에서 받았다는 품삯은 최저임금을 거론할 수조차 없을 만큼 적은 액수였다. 농어촌에서 여성의 일당이 남성에 비해 낮다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온전한 일당을 받을 만큼의 수준이 아니었 다 하더라도 '비료 뿌려 5,000원, 고추밭에 일해 1~2만 원, 풀 뽑아 3만 원'은 하루 노동의 대가 치고는 너무 적었다. 젊은 일손이 부족한 농어촌에서 그녀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한계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 품삯을 받고도 고마움을 느꼈을까? 그런 면에서 그녀의 남편과 시집 가족만이 아니라 딱하다고 일거리를 주고 싼 값에 그녀를 부렸던 동네 사람들도 착한 얼굴의 착취자들이었다.


p61 내 남편은 농사일을 하지만 술을 먹지 않으며, 착한 성격에 성실하게 일을 한다고 소개받았다. 이것이 내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중매하는 사람에게 들은 남편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정말 그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되는지 한 번쯤은 고민이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남편은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결혼 당시에 나는 20대 초반이 었고 남편은 50대 초반이었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남편한테 더 사랑을 받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멀리 시집가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나이가 많은 한국 남편이 나를 더 아껴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믿고 한국에 왔다.


p69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선주민의 가정폭력 문제도 해 결하지 못하는 국가가결혼이주여성의 가정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결혼이주여성을 '특별히' 대하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한국 정부가 가정폭력 문제 자체에 너무나도 무능하기 때문이다.


p116 남편으로부터 이흔 소장을 받고 쉽터에 입소했을 때였다. 아직 남편과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때 체류를 연장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체류 연장을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갔다. 그런데 남편이 출입국사무소에 ‘우리 와이프가 도망갔다'고 이야기를 해버려서 신원보증이 해지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시댁 가족에게 나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쉼터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체류 연장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고, 아직 이혼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류 상태는 언제나 불안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주여성은 남편이 신원보증을 해지하면 언제나 미등록 상태가 되어버릴 수 있었다. 남편 말 한마디에 나는 언제나 불법체류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p118 재산 6,000만 원이나 연봉 3,800만원 은 이주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나는 직원의 답변에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직원에게 "선생님, 한국 사람도 한 달에 200만 원 벌기가 힘든데 우리 외국인이 어떻게 그 돈을 벌어요?”라고 하면서 싸웠다.


p130 나도 기사 속의 메이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2003년에 빳버를 당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재판을 할 때에야 내가 빳버를 당하기 바로 전해인 2002년에 베트남의 혼인과 가족법에서 조혼 관습을 배제하도록 규정했고, 빳버가 이미 불법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여자에게 드리운 나쁜 제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이 이게 불법이란 걸 알고 있을까? 불법임을 안다면 남자들은 빳버를 안 하고 있을까? 아닐 것 같다. 나는 그때 고작 열 세살이었다

 빳버를 당하면 어떻게 되냐고? 납치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래야 여자가 도망갈 수 없으니까. 나는 3일 동안 간혀서 강간 당했고, 그 후에 남자는 우리 집에 가서 예물을 주고 나를 아내로 삼았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다른 방식의 삶은 없었고, 있다 해도 알지 못했다.


p135 그런데 성폭력에 대한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재판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편이 내가 과거 베트남에서 '빳버' 되었던 때의 출산 사실을 이유로 혼인 무효 소송을 낸 것이다. 한국에 서 이런 재판은 처음이라고 했다. 출산 사실을 속일 작정을 하고 결혼한 경우는 혼인이 취소가 된다는 거다. 그런데 나처럼 납치당해서 애를 낳았던 경우도 혼인을 취소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되었 다. 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탄원서를 냈다고 해서 무척 놀랐다. 변호사 선생님들은 돈을 받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다. 쉼터에서도, 인권센터에서도 다들 나를 응원해주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지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쉼터 선생님들이 말하는 것이 진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p152 그러나 그 이주여성들은 쉼터라는 안정된 곳에 있으면서도 항상 불안,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남편만 믿고 살아보려 했지만 참고 견디다 못해 결국엔 상담센터를 찾거 나 쉼터에 오기까지 얼마나 외롭고 두렵고 막막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안아주기라도 하면 그들은 눈물을 뚝뚝흘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들은 쉼터에서 같은 처지의 다른 입소자들과 친하 게 지내고 자국 음식도 해 먹고, 쉼터에서 진행하는 개인•집단 상담, 심리 정서 안정•인간관계 치료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도 보였다.


p163 한국에서 이주여성이 활동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주민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또한 단체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합을 맞춰야 하는 일인 만큼 활동 가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주여성 인권 활동에 더욱 많은 이주여성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주여성을 위해 활동하면서 이루었던 것들이 내가 이주여성이기 에 가능했던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이주해 살아왔던 경험 들과 자국어로 상담할 수 있는 능력, 자국의 문화•네트워크 자원 들은 이주여성 당사자 활동가인 나의 강점이다. 한국어에 능숙해 의사 표현을 충분히 하는 베트남 이주여성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정보를 얻기 위해, 혹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늘 나를 가장 먼저 찾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이주여성으로서 나에게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고, 나는 그 동질감을 바탕으로 그들이 원하는 욕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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