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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06. 2023

장애시민 불복종

변재원_장애시민 불복종


<장애시민 불복종>은 “어학점수, 인턴, 취업 준비에 매진하며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 ‘착한’ 장애인으로 살던 저자 변재원이 학위 논문으로 만난 전장연과 장애인권운동이 이어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일어난 사건들, 달라진 일상의 모습들, 다른 시선들, 낯선 언어가 어떻게 익숙해지고 투쟁이 어떤 절박함을 지니고 평등으로 나아가고자 하는지 목도하고 배우고 성장한 시간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짧게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면, “데모는 왜 하는가”에 담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래 전, 아빠는 나를 걱정한다는 말로 데모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에게 데모를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불과 오늘만 해도 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동에 대해 여러 고민과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 변화를 만들 현실 정치에 대해 나눴었는데,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그간 멈춤 없이 이루어진 운동이 현실 정치와 무관했는지. 장애인권운동이 이룬 변화들이 없는지. 어쩌면 일상의 곳곳에 체감되는 변화들이 쉽게 간과되는 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이 책에서 전장연과 장애인권운동 활동가들은 투쟁밖에 모르는 투사 그 자체이면서도,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웃이자, 사랑과 용기를 주고받는 동료들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배우며 함께 길을 만들어간 저자 덕에 시끌벅적함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갈, 만들어 낼 평화에 대해 생각한다. 울부짖고 땅바닥을 기어가고,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자격 없음’으로 지워지고 내쳐졌던 이들이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하고 ’저항‘하며 바꿔가는 세상은 언제나 모두와 살아가고 싶은 세상, 누구도 외면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장애시민 불복종>, 변재원, 창비


p15 오늘날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언급되는 미국의 장애인들은 자신을 수혜자로 취급하는 문제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구호를 만들어 거리에 나섰다. 그들의 적극적인 외침이 미국 장애인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탈시설과 자립생활의 권리를 이루어 오늘날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사회로 향하는 초석이 되었다. 한편, 영국의 장애인들은 ’동정심에 오줌을 갈겨라‘(Piss on pity)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들은 국가에 시혜와 동정의 콩고물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다. 장애인들이 직접 구호를 외치며 영국 전역에서 '계단 차별 버스'를 막아섰으며, 대중교통에 탑승할 권리를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1995년 영국의 장애인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의 선진적인 장애인 정책은 민주주의의 신이 내려준 선물이 아니다. 국가가주도해 만든 결과도 아니다. 그저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만들 어낸 일상적 민주주의의 결과물일 뿐이다.


p45 평범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모두가 완벽해 보였달까. 어떻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휠체어 없이 움직일 수 있는지, 볼펜을 손에 잡아 책에 밑줄을 긋고 지우개로 낙서를 지우는 게 수월한지,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었던 손을 자유롭게 씻을 수 있는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공간에서 장애는 흔치 않은 불운의 상징처럼 아주 가끔 볼 수 있을 뿐이었지만, 사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들이 이 공간에 머물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균실처럼 차단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을 뒤늦게야 했 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왜 나만 여기 있는 건지, 그 이유를 한참 생각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낯선 감각과 시선이 며칠간 계속되다가 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추었다.


p52 코호트 격리는 집단감염과 집단사망의 규모를 키우는 실패한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예방의 실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가 주도했던 방역정책은 마치 생화학 실험실에서 실험군과 대조군을 둔 채로 병원균 테스트를 하듯 대상별로 다르게 전개됐다. 지역사회에는 간격을 유지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폐쇄병동에는 전부 몰아넣고 감금하는 조치가 시행됐다. 코로나19 국내 유행이 본격화되면서, 정부는 일상을 사는 사람과 시설에 사는 사람 사이에 차별적인 대응지침을 확립 했다. 일상 속 사회적 거리두기 원칙은 확실하고 안전한 대응책으로 소개됐다. 정책 규칙은 간단했고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이 2미터 이상이면 감염병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최대한 멀리 그리고 넓게 분산되어 있을수록 좋은 방역이었다. 그러나 집단 시설에는 적용되지 않는 방역 문법이었다.


p99-100 함께 거리를 나서는 동료와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정신적 교감을 나누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사실을 빗댄 말이었다. 활동가들에게는 익숙한 언어와 문화가 나에게는 너무 낯설게만 느껴진다고 그에게 토로했다. 잠자코 듣고 계시던 교수님이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표준어'를 고집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이념 대립이나 갈등 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태도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대학, 직장, 대학원 등에서 활용해 온'사회적 표준어'가 인권 현장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다를 텐데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노력했는지 걱정하는 의견을 덧붙였다. 교수님은 나에게 세상의 모든 집단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고유한 문화와 가치가 서려 있는데, 마음을 열지 않으면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아무리 가까운 것만 같아도 오랫동안 활동한 동료의 말을 알아 듣고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정책을 분석하는 노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p101-102 낯선 단어들이 내 귀에 들릴 때까지, 차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활용되는 표현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스스로의 편견과 오랜 시간 싸워야만 했다. 말과의 사투는 곧 나와의 사투였다. 우연히 시작한 운동으로 인해, 나는 평생 사 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몰두해온 표준어의 체계로 더 중요한 주변의 말들을 지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낯설게 되돌아볼 수 있었다. 현장 활동은 사장된 것처럼 느껴졌던 말을 구체적인 언어로, 추상적이라 느꼈던 말을 생생한 경험으로 번역했고, 언어의 온도를 뒤엎는 계기가 되었다.


p108 늦게라도 오늘 말씀드려요,아버지. 제 직업은 활동가에요. 저는 차별에 저항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사회를 바꾸기 위해 움직여요. 졸업장에 기대지 않고, 자격증에 기대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가치에 기대는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목소리 내며 차별에 저항하고 있어요. 사회는 그들을 투쟁밖에 모르는 사람', '투모사'라고도 불러요.

 아버지께서 언젠가 제 상사가 누구냐며 물었을 때, 누구 누구와 함께 일을 한다고 알려드리면서 제일 소개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저와 함께하는 활동가를 소개하는데 이보다 간결하고 명료한 단어는 없거든요. '투모사'라는 말. 싸움꾼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떼 쓰는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에요. 온몸으로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한평생 장애인을 향한 사회적 차별에 저항해온 올곧은 중증장애인의 활동 방식을 함축한 표현이에요.


p127-128 오랜 시간 투쟁을 외쳐온 사람들은 투쟁의 대상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한두 사람의 권력자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권위를 재생산하는 사회구조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이 아니라 구조에 맞서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당시의 나는 장애인 차별의 문제를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나에게 주어진 고난을 이겨내는 노력이 있다면, 성장과 성공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면, 자기계발이라는 업적이 인정된다면, 나는 나의 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때껏 살아왔다.


p132 활동가들은 저마다 주어진 조건에서 노력하는 모든 행위를 곧 투쟁이라 일컬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단단하게 일을 진행해나갈 때 투쟁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매

력이 느껴졌다. 편견을 내려놓고 보니 투쟁은 갈등과 싸움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를 바꿔나갈 용기를 지닌 자들의 능동적인 마음을 담아내는 표현이었다. 그 말에 더이상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빠르게 익숙해졌다.


p167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죽어가는 내 친구를 포기하지 말아달라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거리를 메웠다. 국가 장애인 정책을 논하는 다른 의제와는 달리 한 사람의 목숨을 이야기하는 기자회견은 사 소해 보일지 몰라도, 활동가들은 목숨이 걸린 문제 앞에서 더욱 절박했다. 시민 다수의 보편적 편의를 보장하라는 외침은 아니었지만 당장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단 몇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간절한 것이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당장 죽어가는 내 친구를 살리기 위한 투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울컥 솟아오르고 말았다.


p172 희귀질환 자녀를 치료할 수 없는 부모의 처지를 떠올려 봤다. 부모가 자녀에게 '돈이 없어서 못 고쳐준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좌절과 단념과 용기가 필요할까. 금쪽같은 내 새끼 살릴 약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돈이 없어 못 고쳐준다고 미안하다고 아버지가 말한 사실을 전하는 그의 흔들리는 눈과 말 너머에는 마흔이 아니라 열다섯의 슬픔이 보였다. 금호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장애인임에 체념할 때, 나로 인해 가족이 불행해진 건 아닐까 막막함을 느낄 때, 아 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는 못난 장애인 자식이었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 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좌절이 들 때, 그래도 이렇게 죽고 마는 걸까 하는 두려움을 가질 때 나타나는 슬픔들이 엉켜버린 모습의 얼굴.


p175 길거리에 우두커니 선 채 강한 마음과 약한 몸이 뒤섞인 장애운동의 복잡한 정체성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아스팔트 현장에서 마주하는 활동가들의 모습만으로 그들을 투사로 투시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서로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장애 인 활동가들이 운동 현장에서 좀처럼 티 내지 못하는 '손상'과 ‘고통’의 무게에 대해서 숨김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때로는 장애운동이 저상버스나 엘리베이터 설치같이 사회적 인프라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동료의 고통과 죽음을 막기 위한 소소한 운동으로도 있어야 하지 많을까. 금호와 형숙의 발언을 들으면서 장애운동이 모든 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동료의 취약성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187-188 한국 사회에서 장애운동이 대표적인 당사자운동으로 인정되어온 역사의 한편에는 '직접 물어보시겠어요?‘라고 반문하던 비장애인 조력자의 명료한 말들의 시간이 깃들여 있다. 장애인이 이끄는 투쟁의 역사에는 늘 비장애인의 지원이 궤를 함께했다. 당사자운동에 참여하는 비당사자들은 독특한 정체성과 고유한 인내의 힘을 갖고 있다. 장애운동에 함께하는 비장애인들은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근본적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한계로 삼지 않는다. 자기 옆에 휠체어를 탄 채 앉아 있는 장애인에게 마땅히 대답의 몫이 가야 한다고 여기며, 이들이 주체로 인정받기 위한 당사자운동이 모두의 권리를 지키는 방법임을 믿는다.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어서 주목 받지 못할지언정, 장애운동으로 사회가 누군가의 권리를 다시 주목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오래간 소외당했던 나의 장애인 동료가 되어야 한다고 마땅히 생각하는 이들이 비장애인 활동가다. 그들은 당사자운동이 오직 당사자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곁을 함께 지킨다.


p283-284 장애운동을 통해 박옥순 활동가를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과도 같다. 그가 던지는 단단한 질문과 함께 나는 성장할 수 있있고, 잘못된 가치관을 돌아볼 수 있었고, 삶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평가와 비난의 언어의 권위에 더는 기대지 않고, 신뢰에 기반하여 일하는 방식을 배웠으며, 무례함을 질문으로 받거나, 동료에게 사과하는 말들이야말로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통해 칼말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죽여야만 살아남는다는 잘못된 사회 규칙의 숭배에서 벗어나, 상대의 속도와 언어에 맞추어도 충분히 업무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장애운동이 오랜 시간 와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박옥순 활동가의 회의 중재 능력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가 따르는 소통 방식은 동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저마다의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신뢰를 쌓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당장 일에 지치더라도, 말에 지치지 말자는 그의 태도는 자신의 동료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느낌표보다 물음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그의 대화 방식은 모두에 대한 믿음의 온기를 안고 있었다. 활동가가서 있는 현장만으로도 이미 욕설, 비난, 평가가 만연하는 것을 잘 알기에, 내부의 모임 안에서라도 서로 상처 주는 말을 최소화하고, 오해를 부르는 말 대신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질문이 오가도록 하는 박옥순 활동가의 용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의심이 아니라 신뢰의 힘을 좇는 사람이다. 박옥순 활동가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소통이 평가나 비난의 언어 가 아니라 질문이 익숙한 방식이 되기를 꿈꾼다. 그것이 인권 현장이 지향해야 하는 평등한 언어일 뿐만 아니라, 장애운동이 지향해야 하는 상호 존중의 핵심 가치라고 생각했다. 믿음에 바탕을 둔 질문과 대답을 일상화하는 소통 방식이 곧 발달장애 인과 치매노인 등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이 오해 없이 소통 할 수 있는 사회로 향하는 길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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