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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28. 2023

독서가 산책이 되기도 하는 거지

박선아_어른이 슬프게 걸을 때도 있는 거지

이 책에 담긴 글의 모든 제목은 [어떤]산책이다. 이를 테면, ‘매일 한 자리를 지켜보는 산책’ 혹은 ‘해안선을 따라 긴 산책’같이. ‘슬픔이 많은 어른이라는 사실을 끄덕거리며’ 힘들 때 하던 습관인 산책이 하나의 책이 되었다. ‘어른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걷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는 프롤로그를 읽으며 슬픔에 대래 생각했다. 나는 슬픔으로 자라나는 사람도 있다, 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분노가 동력이 되듯 슬픔이 나에게는 기쁨과 사랑처럼 적지 않은 동력이 되는 것이었겠다, 이 글을 쓰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책에는 저자의 글 외에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다른 책이다. 하나의 글이 마칠 때마다 ‘산책’에 대해 쓰인 다른 문학/책의 해당 글귀가 삽입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함께 읽은 책’으로 제목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진이다. 이 책엔 사진이 몇 장 사이사이 삽입되어 있는데, 책 속에 담긴 다양한 풍경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독서시간이 나에게도 산책 비슷한 감각이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느새 대구에서 서울로 도착해 있었다. 같은 날, 같은 날씨에도 사람들의 옷차림이 참으로 다양했다. 모두 나처럼 추위에 취약하진 않겠지만, 하면서도 반팔과 반바지에 조금 놀라기도 하고 다양한 두께와 재질과 색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풍경처럼 흐르는 기분이 든 건 산책이 가득 담긴 책을 읽은 덕분이다.


<어른이 슬프게 걸을 때도 있는 거지>, 박선아, 책읽는수요일


p4 아끼는 이가 전해주는 말은 힘이 세다. 얼마나 셌던지 그 뒤로 슬플 때마다 이 문장을 동사만 바꿔 여기저기에 갖다 붙여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 른이 슬프게 퇴근할 때도 있는 거지.' '어른이 슬프게 밥 먹을 때도 있는 거지.’ ‘어른이 슬프게 웃을 때도 있는 거지’ 어디에 섞여도 친구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편안해졌다.


p37 비슷하게 보여도 같은 답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구나.’ 다들 외롭고 저마다의 방 법으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교실 안의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움을 말하고 나니 자연스레 외롭지 않았 던 시간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함께'의 즐 거움을 알게 되었던 적이 있었고 그게 너무 좋아서 더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많이 슬펐다. 이제는 슬픔이 좀 가셔서 다시 혼자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p95 그럴 때가 있다. 슬픔이 애매하게 돌아다니는 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어딘가에 그걸 둔 채 로 꾸역꾸역 살다가, 엉뚱한 곳에서 울만 한 일이 생기면 그대로 엉엉 울게 될 때가. 그렇게 울고 나 서야 자신이 그동안 슬펐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다. 요즘은 사실 울고 싶었다. 울고 있던 아침에 는 몰랐고, 이 밤에 오늘 일을 이렇게 적고 있으니 알 것 같다.


p115-116 "일상을 행복한 시선으로 보시는 것 같아요"라고 서점 주인이 말하기에 목 언저리를 긁적거리다가 "매번 그렇진 않고요.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친구에게 기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하루를 부지런히 기웃거리며 지내요. 오늘 밤에 통화할 때는 무슨 얘기를 해야 이 친구가 지친 하루 끝에 웃으면서 잠들 수 있을까, 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누가 행복을 물어도 망설임 없이 설명 할 수 있나 봐요. 이번 여름의 행복은 아마 다 그 사람 덕분일 거예요."

 미소를 지은 그는 손님용 노트를 꺼내왔다. 방명록처럼 여러 사람이 책에서 좋았던 구절이나 메 모를 남기는 것이었다. 어느 손님이 남긴 메모가 내 얘기와 비슷해서 보여주고 싶다며 한 페이지를 펼쳐줬다. 누군가 이렇게 적어두었다.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p123 사소한 일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한 사 람 안에서 사소했던 일이 점차 거대해지고. 한때 는 거대하다 여긴 일들이 한없이 사소해지기도 하 는 시간을 매일,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다. 이전에 는 몰랐던 작은 꽃을 보며 감동하는 마음이 아줌마 나 할머니가 되어가는 일에 포함되는 거라면, 어디 한 번 기꺼이 늙어볼 참이다.


p138 아니라는 걸 알면서 굳이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가령, 글을 쓸 때 쉼표를 자주 쓰는 것 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쉼표는 강제로 흐름을 끊 고 거기에 의지하다 보면 유연하지 못한 글이 되기 도 한다. 작법에 대한 수많은 책이나 작가, 교수가 그렇게 말해왔다. 쉼표에 기대어 문장을 완성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쉼표가 좋다. 온점을 찍 고 난 뒤에 드는 완강한 기분과 다르게 쉼표를 쓰 고 나면 느슨하고 허술해진다. 탈고할 때는 쉼표가 알맞은 지점에 들어가 있는지를 본다. 애매한 곳에 있다면 걷어내고 고민해서 가장 귀여운 자리로 배 치해준다. 쉼표에 대한 어떤 안 좋은 얘기를 들어 도 그가 하나도 없는 글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p177 여행지였지만 그 길을 따라 매일 산책을 했다. 일상이 아니었지만 일상인 줄 알았다. 사소하고 비슷한 일을 매일 반복하며 걸으면서 도 지루한 줄 몰랐다. 이렇게나 멀리 오고 나니 그 때 오래, 잠시 머물다 간 마음들에 고마워진다. 걸을 수 있을 때, 나란히 걸어주고, 쫓아올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쫓아와준 마음들 덕분에 나는 이렇게 텅 빈 새벽에도 혼자 웃어 보일 수 있다.

 어떤 기억들은 떠올리다 보면 이런 기억으로 남은 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매번 고맙고 또 고맙다. 말할 곳이 없어 원고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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