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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Oct 31. 2023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

부추•우엉•돌김_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은 생활동반자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도 익히 만날 수 있는 이들의 이야기의 당사자들이었고, 그들의 책을 읽으려고 샀으면서 왜 이렇게 한참이나 읽지 않았을까… 쓰면서 든 생각은 부러워서, 배아플까봐? 그런 거였나? 그런… 막상 읽고보니 배 아픈 건 하나도 없고, ‘아, 정말 같이 사는 건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집을 짓는다는 건 정말 정말 힘든 일이구나’ 저자들의 고생에 끄덕끄덕 마음 보내는 읽기 시간이었고, 꼭 집을 짓고 또 같은 집에 살지 않아도 ‘생활동반’에 대해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 지금을 같이 살아가는 내 친구들과도 같이 읽고 싶어지는 시간이었다. (이 장면에선 누가 생각나고 등등) 부추가 우영과 돌김 셋이 너무 다 다르다며 쓴 글에서의 세 사람의 특성 조각들이 내게도 다 있어서 읽으면서 누구 하나 편들 것 없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함정은 나는 텍스트를 읽는 것뿐이고 내 일이 아니란 것. 지금도 혼자 사는 게 아닌 나는 타인과 살아가는 것의 힘듦과 어려움을 잘 안다. 부모와 자매 외 초중고 동창 친구들부터 사촌, 활동하던 친구, 고시원, 주거공동체 등 다양한 함께 살기의 경험이 다양한 주거 형태의 경험으로 있고, 또 혼자도 살아보았기에 자유로움이나 규칙, 불편의 상반성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늘 같이 살기를 꿈꾸고 상상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진 않겠지만, 나는 같이 사는 것에서 오는 불편보다 같이 사는 것에서 맞이하는 다정과 만족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싶다. (더 크다고, 가 아니라 더 좋다고가 핵심) 게다가 이들은 평생 같이 살자! 검은 머리 파뿌리 맹세가 아니다. 적어도 7년은 죽이되든 밥이 되든 살아보기로 했다던데, 결혼과 혈연 그리고 이성애가 아니면 각종 오지라퍼 작동 한국 사회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보기 왜 안되겠어?! 전 애인 어머니와 친구가 된 우엉과 그의 동반자들 돌김•부추 등 이 이상한 사람들의 함께 사는 삶이 좋다. 이상한 사람들아! 우리 많이 생겨나고 많이 드러나자!


<셋이서 집 짓고 삽니다만>, 돌김•부추•우엉 지음, 900KM


p7 셋이 함께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 숫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섯 번, 열세 번, 서른 번. 세 사람이 지금껏 각자 경험한 이사 횟수입니다. 요리를 포기하고, 햇빛을 포기하고, 취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셋의 주거 이력은

1인 가구로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죠. 결혼을 할 때까지 혹은 아이가 생길 때까지. 인생의 본편이 시작될 때까지는 부록처럼 사는 게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사회 이지만, 셋은 '지금‘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합니다. 하나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낫지 않겠냐며 함께 살아보기로 한 거죠.


p16 두 번째 살던 집은 처음보다는 조금 넓은 1.5룸이었다. 시장과 가까운 빌라촌이었는데 옆 건물과 거리가 심하게 가까워서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혼자 쓰기에 적당하다고 했던 부동산 사장님의 말씀과는 달리 매우 좁은 부엌에서 나는 음식을 해본 기억이 없다. (1인 가구라고 작은 부엌을 쓰고, 좁은 방에 사는 것이 정말 적당한 걸까?) 입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 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는 건물주는 1층 상가에 마트를 열 었고, 나는 하루 종일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가요를 배경음악 삼아 살아야 했다.


p33 정말 사람 일은 모른다. 금방 나갈 것 같았던 우엉은 끝까지 동아리에 남아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동아리가 해체되는 순간까지도 뒤에 들어온 후배들을 챙긴 건 우엉이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우엉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엉은 솔직하고 과감하고 다정했다. 서로 다른 결을 가졌지만, 우리는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관계였다.


p39 "우리 독서 모임 한번 해볼까?" 가벼운 제안이 오갔다. 그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부추와 우엉, 둘의 학교 후배인 J, 강화도에서 대안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T까지 다섯 명이 함께했다. 독서 모임 이름은 ‘똑서모임'으로 지었다. 똑소리나게 똑똑하게 책 읽자는 의미였다. 사실 모임 자체는 그렇게 짜임새 있지도, 구체적인 목표의식을 갖추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 지금의 답답함을 책으로 풀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다들 첫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진행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다 해서 딱 세 번 열렸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읽었던 책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p41 마지막 모임에선 부추가 제안한 <조건 없이 기본소득,(바 티스트 밀롱도, 바다출판사)>를 읽었다. 지금이야 기본소득이 꽤 익숙한 개념이지만 그땐 처음 접한 아이디어라 꽤 충격적이었다. ‘행복'을 꿈꾸지만 정작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는 잘 몰랐던 우리는 직업과 나이, 성별 상관없이 누구나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 책에 매료 되었다. 우린 어른이 되면서 많은 것을 잃는다. 상상할 자유, 작당 모의할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럴 시간에 일하고 돈 벌어야 하니까. 누가 야근하고 싶고, 투잡을 뛰고 싶을까? 누가 하루에 3시간씩 출퇴근해가며 살고 싶을까? 그런데 이 책에 선 '만약 우리 모두에게 60만 원씩 기본소득이 매달 들어온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p47 초창기 우리는 '같은 집에 살자'보다는 '함께 사는 삶'을 꿈꿨다. 그 시절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역세권'보다 서로를 위로해줄 '사람권'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부추와 돌김은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이었기에 내 인생에 그들이 가까이 있길 바랐다. 둘 또한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고, 셋이 함께 무언가를 작당하는 것은 어김없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부추와 돌김은 곧 작은 결혼식을 올렸고, 우리의 본격적인 작당 모의가 시작되었다.

 주거가 안정되면 삶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삶의 안정성이 높아지면 삶의 질도 높아진다. 삶의 질을 높이고 싶은데 돈이 없다? 그럼 우리 셋이 힘을 합쳐볼까?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 게 된 것이 대망의 '시점 프로젝트'다.


p59 함께 살기로 결심한 게 중요하지 장소는 큰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집을 못 구하면 땅 사고 직접 짓자! 시골이니까 그렇게 해도 훨씬 적은 돈으로 할 수 있을 거야!" 우린 정확히 일주일 뒤에 땅을 분양하던 부동산 중개인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다른 땅은 볼 필요도 없었 다. 사슴과 피노키오 아저씨,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거기에 있었다. 부추와 나는 강화도 나들길 위에서 처음 만났고, 우엉과 부추에게 강화는 제법 친숙한 공간이었다. 함께라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p74 최대한 너그러움을 발휘해 받아들이면, 주변인들은 나름대로 각자 자신의 경험에 따라 우리에게 걱정 어린 조언을 아낌없이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이, 어떤 이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우선순위이니까. 다만 우리는 그들에게 "뭐 하러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요? 육아 힘들지 않아요?", "왜 답답하게 아파트에 살아요? 전원주택이 훨씬 좋은데."라고 조언하지 않을 뿐이다.


p115 요즘은 일반 가족끼리도 공동으로 재산을 보유하는 세상이고 우리처럼 다양한 구성원이 결합한 가족 형태도 늘고 있는데, 법과 지원사업은 여 전히 가부장만이 세대주라고 규정하는 ‘정상가족' 중심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p192 “이 집구석 나가고 만다!" 서운함이 폭발해서 당장 짐이라도 쌀 기세로 씩씩댄 적도 여러 번이지만, 그 기세는 금방 사그라든다. 어렸을 때 만난 친구 사이거나, 그저 한때 즐기던 애인 사이였더라면 서운함을 내세우며 당장 인연을 끊고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어른이 돼서 스스로 선택한 동반자들이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살아야 한다. 아, 이렇게 가족이 되는 것인가.


p201 우리는 함께 사는 동시에 각자의 '나'로도 존재한다. 아무리 서로를 배려하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것도 결국은 '나'의 생각이다. 20년 넘게 각자의 '나'로 살아온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함께 산다는 건 그런

'나'들의 섞임이고 충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한지, 잘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각자만의 세계관과 방식으로 살고 있고 꽤 많은 서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평온하지만 종종 태풍 한복판에 있는 것같이 위태로울 때도 있다. 아마 우린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끝날 때까지 서로 삐치고 싸울 테고 또 그것들을 풀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p204 서운함이 커켜이 쌓이고 나면 폭발할 것 같아서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일을 깜빡한 우엉에게 '이러저러해서 서운했어.'라고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이내 자신의 쪼잔함에 낯부끄러워지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서운한 마음이 가시고 후련해진다고 한다. 부추가 이런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이제 우리 사이가 '이 정도는 이야기 해도 괜찮은 사이'라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p206 마음의 집에는 방도 있어

어떤 방은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어떤 방은 좁아서

겨우 자기만 들어갈 수 있지

- 김희경, (마음의 집,(창비, 2010) 중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이 클 때도 있고 작아질 때도 있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늘 똑같은 크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방이 좁을 대로 좁아진 날에는 그 방 안에 갇힐수록 힘들어진다. 그 방 안에서 서운함은 증폭되고, 상대가 더없이 미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럴 때 각자의 방법으로 전환을 꾀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평소엔 집이 그동안 꿈꿔온 '케렌시아' 같은 공간이지만, 반대일 땐 집은 외딴 섬이 되기 때문이다.


p209 처음엔 우리 관계를 '가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싫었다. 가족이라고 말하면 따라오는 그 이미지들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모여 살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가족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우리는 고민 끝에 우리의 관계를 소개할 때 '가족'이라는 말을 사용하되, 끈끈한 관계라는 뜻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진 단어를 함께 붙이기 로 했다. 그렇다. 우리는 '느슨한 가족'이다.


p260 최저가를 찾아 밤새 스마트폰을 검색해 얻는 작은 이익보다 서로가 서로를 먹여살리는 유기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런 관계망을 더 다양하고 깊게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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