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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Jan 08. 2024

우리에겐비빌 언덕이 필요해

최정_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

언젠가부터 알게 되어 페북을 통해 소식을 접했던 윙과 최정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긴 <우리에게 비빌 언덕이 필요해>. 책을 통해 윙의 시작과 지금에 오기까지의 과정들, 그 속에 존재했던 무수한 시도와 도전, 행동들을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그러기 위해 해온 공부들 그 배움들에 대해서도.  이 책과 윙, 그리고 최정은 선생님께 중요한 무엇을 꼽자면 계속해서 배워가는 그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앎을 알려주기만 한다. 누군가는 배우기만 한다. 누군가는 행동하기만 한다. 알고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배우고, 그 토대 위에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듯 해보이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기에 윙의 과정을 무엇하나 허투루 볼 수 없다 생각한다. 또한,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주고 건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기 위해 노력해온 고민이 참 다정하고 환대롭다. 이것은 나 개인에게도 많은 파동을 주며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친구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기 위해, 또 내가 찾을 수 있는 비빌 언덕을 위해ㅡ 자립이란 결국 함께 잘 살아나가기 위함처럼 이 책을 통해 서울에 있는 공간으로서의 윙만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함께 살아가기 위한 동료 시민, 활동가, 친구, 또 나 자신으로서-를 생각해본다.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분투해온 시간을 참 쉽게도(그래서 감사하게도) 텍스트로 읽어 앎을 얻고 시간을 벌고, 고민할 기회를 얻었다. 고마운 독서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비빌 언덕이 필요해>, 최정은, 오월의 봄


p8 나는 이 책이 아픈 과거를 가진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친구들이 겪은 여성폭력과 그 폭력을 떠받치는 사회구조에 대해 성찰하는 일 역시 중 요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가 끝내 자기 삶과 존엄을 놓 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며 나아갔던 이들의 기록으로 읽히길 바란다.


p21-22 쉼터는 결코 단일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아니다. 그 곳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에게는 거주하는 집이었지만, 사회복지사들에게는 일터였다. 삶의 뿌리가 되는 주거 공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쉼터에서는 타인의 삶이 양해 없이 수시로 공유됐다. 일주일에 몇 번은 낯선 이를 식구로 맞아야 했으며, 잠깐의 사색을 위한 혼자만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p28 돌이켜보면 내가 윙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여성들의 주도적인 삶과 내면의 힘, 경제적 자립에 관한 의미와 가치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문득 넉넉한 웃음으로 은성원의 안과 밖을 서성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구든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던 아버지는 나에게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일러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p42 손상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결핍감은 늘 친구들의 발목을 잡았다. 흔히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과거의 어떤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과거의 결핍은 현재의 무기력에 대한 변명이 된다.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결핍에 두면서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도피하며 그것을 받아주는 쉼터의 안온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p44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우리는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일단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핍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결핍을 채워야만 하는 걸까? 가족의 결핍을 쉼터에서의 유사가족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가족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확장이다.


p54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관계를 횡단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을 '가출 청소년' '탈성매매 여성' 등으로 손쉽게 묶고 분류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개별적인 고유함을 말소시키는 일이다. 그건 결국 그들을 낙인이라는 유리 감옥 안에 가두는 일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기에는 감옥이 아닌 쉼터이지만, 정작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리 감옥 말이다.


p91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지원이라기보다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적 사유"라고 역 설하는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이 출간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이미 '가난한 사람들을 위 한 인문학'으로 노숙인들에게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성프란시스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런 시도들을 보며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p92-93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쩌면 훈련이 아닌 교육이 아닐까. 지금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며 인생의 파도를 용감하게 즐기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 그러니까 가슴속에 한 송이의 장미를 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절실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렇게 탄생한 윙의 인문학 강좌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서 우리는 자활•자립의 기본이 되는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통해 내면의 기초를 다지는 철학적 사유를 시도했다.


p99-100 앎은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동안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다. 그 앎이 실은 삶을 통해서만 도착되는 것임을 길벗서당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공부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는 일도, 책을 읽는 것도 우리의 몸을 통과해야 가능하다.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단순히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윙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애정 어린 수업 준비와 강의 그리고 정성이 깃든 밥상 또한 모두 그들의 삶 속에서 빚어진 것들이었다.


p103 연구자들은 윙과 친구들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고, 우리는 그 물음에 열심히 응답했다. 우리의 대화는 갈수록 깊어졌다. 연구자들이 현장에서 처음으로 포착한 것은 친구들의 '무거운 신체'였다. 친구들의 우울과 무기력함을 알아 본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의 무거운 신체 뒤에 숨어 있는 우울과 무기력함을 파헤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p104 이처럼 새로운 개념을 접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는 신체보다 정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와 정신은 평행하게 움직인다. 즉 신체적 변용이 정신적 변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의 신체는 늘 '수동'이었다. 친구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언제나 '귀찮음' 과 '무기력함'이었다. 이렇듯 특정한 신체적 변용을 지속하게 되면 특정한 습속이 형성되고 정신의 사유 능력 역시 저하되고 만다.

 그런데 윙에서는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정신의 문제 로 진단했다. 친구들의 무기력함이 정신적인 상처에서 비롯된다고 인식했기에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정서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신의 문제에 천착한 나머지 몸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상적인 활동을 할 때도 언제나 정신적 치유가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마땅한 일자리가 생겨도 도망가기 일쑤였고, 활동가들 서서히 지쳐갔다. 친구들의 삶은 그야말로 회피의 연속이었다.


p108-109 어느 날 인문학을 가르치는 이수영 선생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윙의 주방은 왜 한 명의 여성에게 모든 노동을 의존하는 것이냐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당황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 지원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보니 규정에 따라 취사원이 배정되었고,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관행에 따라 취사원이 해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한 명의 취사원에게 세 끼를 모두 요구하는 것이 좀 버거운 일인 것 같아서 점심은 자체적으로 다른 분을 고용해 해결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방식에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오래전 남산에 있는 수유너머에서 본 주방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밥을 할 때 성별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른 위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또한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자연과 농부의 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몇 사람의 수고에 기대지 않고 각자 자신이 먹은 그릇을 설거지했다. 고백하건대 그 주방은 내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가부장적 사고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p113 법상을 준비한다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인 동시에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수도 없이 밥상을 차릴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듯, 혼자 잘 살 수 있을 때 여럿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밥을 통해 알게 되었다.


p115-116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일이다. 당장 시급한 일도 아니고, 반짝반짝 빛나는 일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일도 아니다. 모든 일상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의 삶에 작은 먼지처럼 쌓인다. 그것은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힘이 되고 역량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항심’이라고 불렀다


p172-173 세상에 어떤 노동이 하찮은 노동일 수 있을까,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책임 있는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의 삶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충고하는 그 상담원은 과연 한 번이라도 은주와 함께 일해본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회구조나 사람이 아닌 환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실하게 쌓아가는 오늘 없이 내일은 뭔가 달라지겠지 하는 생각, 너와 나의 노동은 형편없지만 세상에 다른 멋진 일은 많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은 비록 이렇게 살지만 언젠가는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 이런 것들이 야말로 우리 삶에서 걷어내야 하는 환상이 아닐까?


p190 고단했지만 끈질기게 살아냈던 언니들의 삶과 함께 누군가의 곁에 서 있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답을 내렸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언니들과 함께 나의 시간도 무르익었다는 것을.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체로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p194-195 활동가가 직언을 할 때 대표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조직이 흔치 않다며 오랜만에 건강한 조직을 경험하게 되어서 놀라웠다고 했다.

 이 경험은 나를 커다란 성찰로 이끌었다. 누구든 뜻하지 않게 실수할 수 있으며, 그럴 때 머뭇거림 없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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