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수 Jan 23. 2024

지구 끝의 온실, 2024

김초엽_지구 끝의 온실


더스트가 지구를 뒤덮었을 때, 살아나가기 위해 세계 곳곳에 세워진 거대 돔은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비인간동물이나 식물, 나무와 같은 숲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또한, 돔은 모든 인간을 위한 곳도 되지 못했다. 세계를 재건하는 데에 돔 안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돔 안에서 하루하루를 잘 영위해 가고 싶었을 뿐.


돔 밖의 마을, 돔 밖의 내쳐지거나 비껴난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 ‘프림 빌리지’가 더 유지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기 위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계 곳곳네서 같은 시기에 모스바나는 퍼져 나갔고, 더스트의 영향을 줄여나갈 수 있었다. 비록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지만, 나는 그곳을 떠난 모두가 약속을 잊지 않고 일군 행위가 세계를 재건하는데 포인트가 됐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자꾸만 사랑하기 어려워지는 세계,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도 멈추지도 그만두지도 않고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특히 그때는 구체적 이름들을. 차별금지법을 떠올리며 그랬다, 고 기억한다. 이번에는 세계에 대해 사랑하자고 말하는 사람들 옆에 선 세계를 사랑할 수 없는, 세계에 버림 받거나 치워진 존재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랑해야 하는가? 나를 짓밟고 버린 존재를? 괴로움과 고통과 슬픔이 넘쳐도 나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이 어리석고 시시하대도. 망해가는 세계에서 혼자 우뚝 서지 않고, 같이 망해가더라도 망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장편소설, 자이언트북스


p63-64 수연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노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수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온유에 사는 공헌자 노인들이 좀더 품위 있고, 친절하고, 대하기가 까다롭지 않은 고객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수연은 덧붙였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영이 네가 아직 이해하기는 어렵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가도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당장 목숨이 걸려 있다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이기적인 선택을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수연의 말대로 아영 자신이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 이 꼬리를 물다보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게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존경과 의심 사이에서, 온유의 노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마치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듯한, 위태로운 느낌이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헌자들을 존경하고,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고, 또 그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온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돌아서서는 어두운 소문을 실어나르곤 했다.

 그런 소문은 어른들 사이에서 조용히 시작되어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아이들은 공헌자들 중에는 사실 자기 가족을 팔아 먹은 사람도 있다고, 재건에 기여한 게 하나도 없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연도를 대조해보면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p71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지. 정적이면서 아주 역동적이야. 나는 이 정원에 손을 안 대는데도, 자신들만의 균형을 절묘하게 이루고 있지. 참 흥미로운 존재들이야."


p75 “어쨌든 그 들이 있어서 인류의 명맥이 이어지긴 했으니까. 세계가 망했으면 좋겠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속 편한 소리지. 정말로 세계가 망한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으로서는 할 자격이 없는 말이야.”


p77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 것들이지."


p80 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라면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마음에 깊이 박혀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p128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성을 지녔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강하다는 것과 연결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처음 대피소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나와 아마라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척 기뻤다. 내성이 있다는 말은 모두 죽어가는 저 바깥에서도 안전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매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절반 정도만 옳았다. 더스트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아마라도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


p168 ‘중요한 발견'은 고작해야 숲의 지표 나무들이 조금 이상한 형태를 띤다거나 나무 밑둥에 버섯들이 새로 자라나기 시작했다거나 하는 정말이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이 마을 밖에서는 한 번도 우리에게 그런 임무가 주어진 적이 없었다. 나는 더이상 피를 뽑히지 않아도 되어서, 매일 밤 긴장 상태로 잠들지 않아도 되어서 이곳에서의 삶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서 좋았다. 이 마을이 나를 꼭 필요로 해주는 것 같아서.


p215 뭐가 옳은 건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 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p226-227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 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나는 지수 씨가 동의해줘서 기뻤다. 하지만 그가 그다음으로 말한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왜요?"

 지수 씨가 짧은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대안 공동체들을 봤어. 모두 같은 패턴이었지. 처음에는 거창한 기치를 걸고 모여. 유토피아 공동체를 표방하거나, 종교를 중심에 두기도 하고, 사냥꾼들이 모인 집단일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평화로운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해.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하니 지수 씨를 보았다. 그가 나를 마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 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p230 더스트 폭풍에 살아남으려면 덩굴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덩굴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워 보였던 푸른 먼지는 이제 고통의 근원처럼 느껴졌다.


p242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p243 그 짧은 침묵을 통해 나는 지수 씨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 지수 씨는 나를 존중했다.


p317 예전 같았으면 지수는 그냥 그들을 내쫓았을 것이다. 호버카는커녕 먹을 것 하나 주지 않고 떠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마을에 불안과 갈등이 그저 퍼져 나가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지수는 이제 이곳의 사람들을 아주 가깝게 느꼈다. 그들은 지수와 함께 싸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아이들도 자꾸 눈에 밟혔다. 수많은 일을 겪은 아이들은 더는 순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마을이 계속 유지되어 자신 들은 이곳에서 어른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수는 이 마을이 그렇게 손쉽게 해체되기를 원치 않았다.


p363-364 “한 명이 아니었어요. 한 장소도 아니었죠. 온실에서 떠난 이들이 거의 같은 시대에 각자 도착한 곳에서 모스바나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여기가 나오미와 아마라, 당신들이 도착한 지점이 죠. 그리고 여기는 중국 남부 지역이고요. 또 여기는 독일이고, 이렇게 점으로부터 퍼져 나간 선을 전부 그어보면····•• 거의 세계의 전 대륙에 최초의 모스바나들이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모스바나들이 그렇게 단기간에 지구를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영은 자신이 이 논문의 데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어떤 놀라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나오미도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아영은 나오미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지 켜보았다.

 나오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만이 아니었군요. 모두가 잊지 않았어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그곳을 떠나서도 프림 빌리지를 재현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결국은 그러지 못했지요. 그러지 못했는데....."

 나오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도 위의 점들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아영은 설명을 멈추었다. 이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나오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점들의 이름을.


p378-379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