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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Jan 21. 2024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_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선생님의 신간을 읽었다. 밑줄을 잔뜩 그어가며.


2015년 여성주의 책모임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읽은 책은 정희진 선생님의 <페미니즘의 도전>(개정판)이었다. 약 20년 전에 나온 그 책의 약 10년 후 개정판으로 페미니즘 책을 시작한 나와 친구들이었다. 그때 그 책은 입문서라고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배움이 되었고, 세계관을 새로이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던 읽기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10년까진 아니지만, 약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 출간되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의 개정판이 아니라 새로운 책이 나온 것. 정희진 선생님은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변화된 여성주의, 정체성의 정치 위주의 담론을 분석’하며 ‘기존의 논쟁 구도에 문제를 제기 하고자 한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3-4장을 읽으며 그 이야기를 왜 하셨는지 이해했다. 나에게 1-2장은 부숴버리는 충격보다는 명료함에 가까웠고, 잘 정돈되었다. 물론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 더해져서(이를 테면 공중보건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 신선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3-4장은 나에게도 그렇고, 무엇보다 잠시 생각해도 떠오르는 논쟁의 사람들/상황들/공간들/주장과 운동이 생각이 나기도 했다. 3장의 트랜스젠더/인터섹스 이야기는 나에게는 더 이상 논쟁이나 찬반의 이야기 거리가 아니니 논외로 치더라도 섹슈얼리티와 동물성애, 그리고 폭력적 이성애 규범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풀어지는 글은 사실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기도 하고, 동물성애=수간으로 절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4부에서 성매매의 폭력/노동에 대한 글 역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성매매가 본질적으로 폭력임을 말하는 것에서 그는 자유의지나 강제성으로서가 아니라 ‘구조 안에서 개인의 대응이 결과적으로 여성 개인과 집단 전체에 차별을 가져오는 구조적 폭력’으로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성매매는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나 ‘노동’이며, ‘폭력’인 것으로 노동이냐, 폭력이냐 혹은 자발이냐 강제냐 등의 범주를 넘어서서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왜 이토록 불공정한 성적 교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정희진 선생님은 이전의 다른 책에서부터 그리고 처음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부터 가정폭력(아내 구타) 피해 경험자와 성매매 (피해/경험) 여성들을 주되게 이야기하셨다. ‘미투’ 때도 그러했다. ‘미투’할 수 없는 이들로서 이 책에서도 그들에 대해 주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여성운동의 주체들이나 의제들보다 이에 대해서는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나’라고 생각되기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 들었다. 그것에서 오는 이 주체/주제/운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였고. 끝으로, 내가 어린이/청소년이었을 때 나온 논문을 이제는 그 고민을 받아 안을 수 있게 이해할 수 있을 때에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여전히 그 논문에서의 어떤 생각들은 유효한 고민거리가 있었고)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교양인


p7 분명 페미니즘은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한계 없는 자본주의, 인류세 시대의 한국 사회 페미니즘에 대한 억압과 금기, 반발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삶의 ‘기본값’이 된 반면, 그만큼 남성 문호의 저항도 심해졌다. 이 문제의 양상은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의 의미는 이전과 달라졌고, 남성 문화는 그저 당황하고 있다.


p10 20대의 젠더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불안정하다. 국가가 남성들을 징병제로 차출하는 동안 일부 극소수 여성들은 '차별 없는' 시험 제도를 통해 사회에 진출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이고 일부 여성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 임금의 60퍼센트를 받고, 경력 단절의 위협과 위험 속에 공사 영역에서 이중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대 일부 남녀의 삶이 전체 남성 과 여성을 대변하는 듯 여겨지면서 착시 현상이 발생한 데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성평등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이가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p12 섹슈얼리티(여기서는 재생산)는 이렇게 다른 사회적 모순과 함께 사고해야 한다.


p19-20 또한 서구 여성사를 개척한 거다 러너의 말대로, 여성/사회적 약자들은 자기 동료의 글을 모르고/읽지 않고 '초기 개척자의 사명'을 반복한다. 여성의 글은 인용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식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러니 언어의 발전이 없다. 나는 이 문제가 사회적 약자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본다. 이 글을 부록으로 게재한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의식도 있다. 더불어 여성 운동은 대중화되었으나 대중화를 민주주의로 오해하고 있는,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아도 여성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닌 일부 여성주의자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p24-25 사회적 약자의 피해와 고통이 저절로 규명된다면 이미 유토피아이고, 사회 운동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가 자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가해자가 '내가 받은 상처 이상으로' 처벌 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피해와 가해 여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다. 문제는 성 중립적(gender neutral) 사회는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의미한다.

 피해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경합적 가치다. 즉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곧바로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 피해자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저항은 평생에 걸친 과정일 수도 있고, 생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제주 4•3 사건도 그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일상적으로는 여성이 겪는 성폭력이 대표적이다.


p26 나의 경험이 "피해였다"라는 자각과 '피해 의식'은 다르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피해자 정체성은 더 위험하다. 피해자라는 위치가 곧 피해의 근거가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이토록 만연한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구체적 정책이 필요할 뿐이 다. 집단적 억압이든 개인적 사건이든 가해자는 자신을 해방할 수 없고 피해자는 성장하기 어렵다(나부터 그렇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만든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식민주의적 사고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존중하는 언설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의 곤경과 그들을 위한 언어가 얼마나 빈곤 한지 보여줄 뿐이다.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는 말로 이 곤경을 정확히 해석했다.


p30 여성과 딸은 다른 사람, 다른 범주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작동 방식을 상징하는 용어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귀결은 남성 연대이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남성 연대는 강조되고, 딸은 동성인 어머니가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와 연결된다. 여성이 인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딸, 어머니, 누이, '창녀' 등의 성 역할 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 역할과 인간 개념은 일치하지만, 여성에게는 배타적이거나 택일의 문제가 된다.


p32 저출산의 원인만큼 오도된 문제도 없을 것이다. 저출산은 출산 기피가 아니라 결혼 기피와 만혼의 결과이다. 그러나 정당, 진보• 보수, 여성 단체 할 것 없이 출산 기피에 해결책을 맞추고 있다.


p38 비혼은 외롭다고? 그러면 결혼한 여성은 외롭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외로울 것인가이다.


p40 “여성은 남성보다 (취업 여부에 상관 없이) 더 오래 집안일을 한다.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OECD 회원국 전체의 평균을 냈을 때, 남자는 하루 141분 집안일을 하고 여자는 273분을 일한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이다." 대한민국은 여섯 배 이상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 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43 대통령의 배우자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국제적인 공식 회의가 있어서 대통령을 따라간 배우자가 그 나라 빈곤 지역의 심장병 아동을 찾아가, 조명을 설치했다는 루 머는 뒤로하더라도,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전쟁만 폭력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전쟁도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집단 전체를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다(심장병 어린이를 돕고 싶으면 조용히 치료를 주선해줄 수 있다).


p50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은 착하고, 여성을 비난해서는 안 되고, 아무리 여성이 범죄를 저질러도 남성의 범죄보다 약하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여성주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자원이 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상이다.


p60 지금 성적 수치심 개념은, 여성은 성적으로 수치심을 당한다는 혹은 당해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남성 문화가 여성을 보는 시선, 이것이 그들의 성적 수치심이다. "여자는 몸 간수가 좋 요한데, 몸에 기스가 났으니 참 창피하겠다"는 식이고 이것이 그들의 자기 인식이다. 개인에 따라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남성 문화가 투사한 '성적' 수치심이어야 하는가

 (중략…) 여성의 수치심이 성과 관련될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남성 사회의 비난 때문이지 '여성= 성적 수치심'이라는 공식은 없다. 왜 성희롱 개념에 수치심이 필수적인가? 왜 분노를 느끼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가해자는 피해자의 수치심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받아야 한다.


p68 성폭력이 지속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성 문화에서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거나 약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가해자를 위한 남성 연대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p68-69 성폭력 발생 원인은 남성 중심적 성 문화에 있지, 피해자의 인구학적 특성(나이, 학력, 직업……)과는 무관하다.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의 행위만 판단하면 된다.


p73-74 가해자다움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범죄가 변호사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기 시작하면 성폭력은 젠더 모순이 아니라 계급 문제로 인식될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성범죄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로 발생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그러나 남성 담론은 피해자는 논외로 한 채 남성들이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p78-79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이다.


p79-80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여전히 피해자의 동의와 저항에 관한 질문은 집요하다. 더는 동의, 저항 여부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가해자에게 질문 하자. 절도나 사기 사건, 즉 다른 형사 사건의 피해자에게도 성폭 력 피해자에게 하는 것만큼 질문하는가? 아니, 사건 발생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일단 법정은 가해 용의자에게 질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고, 뭐든지 질문해도 된다는 권리 의식이 있는 듯하다.


p80-81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 노동을 시켰습니 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 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 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 까?


p87 다만 "노동자에 게 조국은 없다“고 외쳤던 이들이(좌파) "난민보다 더 어려운 우리 국민이 있다"고 말하고,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예멘 남성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성폭력 공포"를 주장하며 "그들에 대한 재사회화" 대책(?)을 제시하는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타인의 정체에 대한 확신에 찬 규정과 머릿속의 '처리' 방식까지 마음껏 발화하는 것, 이것이 혐오이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근대 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슬로건이다. '여성'과 '국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여성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 여성은 젠더와 민족, 모두로부터 억압받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에 한국과 일본 여성들이 함께했고, 남성 국가의 프레임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적국이지만 두 나라 여성들은 평화 연대에 성공했다.


p88-89 난민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수용 여부 자체'보다' 한국 사회 내 부의 차별과 순혈주의 망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민 반대' 는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다.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하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이다. (…중략…) 성폭력은 오래된 범죄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해자의 70~80퍼센트가 아는 사람이며, 그들의 30퍼센트가 친인척(가족)이다. 범죄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퍼센트 이상이 남편이나 파트너이다. 즉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의 세력은 모르는 난민이 아니라 가까운 남성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가해자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피해자도 아니다. 문제는 젠더가 다른 사회 구조와 결합하여 성폭력 공포가 조성되는 방식이다. 권력은 무엇이 가해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페니스가 아니다.


p94  ‘미투 혁명'.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에 대해 '혁명’보다 정확한 명명은 없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미완이라는 의미에서, 곳곳에 반동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불가피하다는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충격과 격세지감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혼란 속에서는 늘 장사꾼과 '밀정'이 활보한다는 의미 에서·•···· 모두 그렇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 언어도 제도도 구비되지 않은 혁명, 대안 없는 혁명, 매번 실패하기 때문에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미투는, 혁명이 분명하다.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파시즘', 매카시즘', '문화 혁명'의 성격을 띠기 쉽다. 하지만 남 성 지배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려면 어느 정도의 파시즘적 열정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아니, '파시즘'은 여성들의 실천에의 한 것이라기보다는 언론의 상업성이 주도하고 있다.


p107 노동의 성애화, 성의 매춘화가 가속화되는 사회에서 매력과 자원의 성별화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남녀의 자원에 대한 사회적 평가, 교환 원리는 정반대다. 이것이 차별이다. 남성은 능력, 여성은 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곧 성을 의미하지만 남성 의 몸은 그렇지 않다. 남녀 간의 사랑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다. 불평등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 불평등 교환을 잘 이용하는 소수의 여성이 있긴 하지만 모든 여성이 성공하지는 못한다.


p110 쟁점은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다. 젠더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젠더를 이해할 때 미투 운동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미투는 젠더 체제에 비하 면, 너무나 갈 길이 먼 시작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는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먼지만 한 움직임(범죄 신고 캠페인)이지만, 이 작은 실천조차 남성 문화는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고 있다. 그들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자신들이 진공 상태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남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들 을 ‘이해한다'.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이 어떤 사회를 향한 징조인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 정지 작업으로서 미투인지를 되묻는 일이다.


p114 지인의 소개로 내가 상담한 어떤 사례에서는 가정폭력 가해 남편이 처제, 아내 친구, 조카, 자기 딸, 동네 어린이까지 일곱 명을 성폭행(강간)했다.


p122-123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가치는 몸이 아니라 그가 사회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에 의해 정해진다. 하지만 여성은 몸(예쁜가, 젊은가)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흑인과 백인에게 '검다'는 말,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바보 같다'는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흑인의 피부색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다. 남성은 정신으로, 여성은 육체로 여겨져 왔기에 여성의 몸과 외모에 대한 언급은 남성과는 달리 모욕이나 폭력의 문제가 된다.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언설에 여성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이런 문화적 문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원예의 대상이 아니다.


p128 20대는 취업과 진로 고민이 지배적인 시기다. 20대의 젠더 관계는 다른 세대와 쟁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20대 남성들이 징병제에 불만을 터뜨리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징병제는 국가를 상대로 문제 제기해야 할 사안이지, 군대에 못 가는 여성이나 장애인이 책임질 일이 아니고, 여성가족부 장관이 결정할 업무는 더더욱 아니다. 한편 실제로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군 입대에 부정적이다. 징병제 자체를 검토할 시기가 온 것이다.


p139 내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왜 이 논의가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 전개되는가이다. 여성들의 주장대로 “내 몸이 바로 생명이다". 이토록 간단한 진실이 있을까. 그동안 한 국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짓밟은 이들은 진정 누구였는가.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가족계획 사업(강제 낙태)을 주 ㅣ도한 것은 국가가 아닌가


p140 임신 중단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p147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 인력의 편중과 부족이다.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다. 선진국 일본에 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산부인과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소아 환자의 진료 거부 사태는, 성형 시 술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만일 의료 인력 편중으로 ‘우리' 누군가 아플 때 의사가 없어서 사망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모든 의사가 성형외과를 전공하고(심지어 이 인력도 모자라서 정형외과 의사가 미용 성형에 동원되기도 한다), 대부업과 연계되어 여성의 성형 시술을 부추기고, 일부(?) 여성들이 성형 시술로 의료 인력을 독점한다면, 여성주의는 이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p149 인식론으로서 여성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아동용, 10대용, 성인 용이 난이도가 아니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이론적 접근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성주의는 성별, 나이, 인종, 계급, 장애, 지역 등 여성들 간의 차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50대 여성의 젠더 이해와 10대 여성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 과 흑인 여성의 페미니즘은 다를 뿐 아니라 갈등 관계다. 50대에게 는 젠더보다 건강이 더 큰 관심일 수 있고, 10대에게는 진로가 더 큰 고민일 수 있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양상에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이론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래서 나는 10대를 위한 여성주의 책은 10대의 젠더 권력관계를 잘 아는 사람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p150-151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출산 과정에 국한할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섹스의 전제는 출산이 아니라 피임이다. 계획 에 따른 출산은 피임에서 시작돼야 한다. 지금은 순서가 반대다. 한국 사회는 포르노 산업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남성 성기 중심의 삽입 섹스에 집착한다. 이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성교는 성 활동의 극히 일부분이다. 성에는 다층적 차원의 사회성이 있다. 인간은 재생산(출산), 자아실현, 쾌락, 정체성, 건강, 친밀감 형성, 치유 등 다양한 이유로 성 활동을 한다. 내 주변에는 무성애자도 상당히 많다.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 가 아니라 인권과 공중보건 교육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타인 몸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줄 알며, 자기 몸에 대한 존중감을 키워주는 게 성교육이다.


p175 정체성과 일상의 실천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이나 아동과의 관계는 합의가 어려우므로 무성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는 인간의 몸의 성별, 즉 생물학적 의미의 섹스인 'male', ‘female’로 구분된다는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이들의 인권을 위해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이성애를 상대화하고 이성애의 문제들 (성폭력, 성 상품화, 가부장적 성적 규범·•··•)을 문제화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섹슈얼리티 개념의 가장 문제적이고 좁은 개념은 남녀 간 성교이다. 이 행위가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 변화도 가능하다.


p179 동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는 이들이 남녀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전복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존재 자체로 양성 개념을 교란한다. 이들의 가시화나 인권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 운동보다 더 가부장제를 위협한다.


p183-184 몸은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중립적인 몸은 없다. 모든 몸은 사회와 문화가 체현된 몸이다. 모든 사회에 남녀 구분 질서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남성 성과 여성성의 사회적 가치는 각각 다르고, 남녀 구분의 기준도 다르다.


p186 누가 여성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해부학?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구호는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양성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을 혼동한다. 실제로 이 둘은 정반대다.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 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 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남녀로 구별한다. 이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p187-188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같은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 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 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일단 이 '진정한 여성' 기획은 불가능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여성 개념은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p193 문제는 누구와의 섹스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다. 딜도를 이용한 자위를 포함하여 인간의 성애에서 삽입 섹스, 즉 무엇인가를 몸에 넣는다는 행위는 몸을 공간화한다는 의미에서 폭력성을 띠고 있다. 주파일을 상대 방(동물)의 동의 없는 수간으로만 인식하는 편견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동물성애자에게 파트너 동물의 의사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여성들이 당하는 각종 젠더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에게는 기본적으로 이성애보다 남성 연대가 더 중요하다. 이성애는 남성이 다른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농촌 총각'이 사회 현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성적 소수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터부시하고 혐오해야만 가능하다.


p194 특히 섹슈얼리티는 젠더, 연령, 장애, 인종, 계급 등의 사회 모순에 따라 시민권의 경계를 규정하고 규율하는 첨예한 정치학이다. 정상적인 성, 아름다운 사랑은 '젊은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녀'의 관계에 국한된다. 이를테면 노인, 죄수, 노숙자의 사랑은 '독립 영화'의 주제가 된다.


p198-199 모든 소수자성은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경계다. 시공간에 따라 그 의미와 범위가 다르다는 뜻이다. 인간의 성 활동은 다양한 형식과 양식을 띤다. ‘LGB/IT/'라는 범주 역시 이성애를 강제하는 제도 안에서 타자화된 영역으로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성적 소수자의 개념이나 정체성은 일종의 흐름이지 게토가 아니라는 것이다.


p215-216 성매매방지법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는 여성주의 인식론의 핵심 문제이기도 했다.


p217 그러나 기존의 자유주의 (선택)와 구조주의 관점(젠더)에서 본 폭력, 노동, 교환 의 의미는 현재 다양한 성매매의 성격과 양상을 설명할 수 없으며.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피해 여성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각으로는 일반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교착 상태에 빠지기 쉽다.


p220 대개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보 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어떤 맥락에서 폭력인가 아닌가 여부가 아닐까. 회유는 폭력인가? 저항으로서 폭력은? 솔직히 필자는 폭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폭력 없는 세상은 모든 인간이 '쿨'하고 우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 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약자는 분노하고 강자는 차분하기 쉽다. 그렇다면 약자만 폭력적인가? 이 논의는 대단히 복잡하다. 권력은 곧 폭력이라는 주장부터 권력이 있다면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까지.


p221 이처럼 폭력 개념을 개인의 의지에 반한 것으로만 설명할 때 우리는 폭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피해 또한 여성 의 관점에서 정교하게 드러낼 수 없다. 아내에 대한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 산업보다 더 안전하다는 일상의 인식은 가족주의에 불과하다. 남편과 손님 중 누 가 더 폭력적인가? 이것은 개별 사안의 문제이며,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의 폭력이 더 은폐되기 쉽다. 더구나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성에게 식사 를 제공하지 않는다.


p224 노동과 폭력의 두 요소가 다 있기도 하고 기준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성 노동은 당연히 노동인 사안을 노동이라고 반복함으로써 성 판매 노동에 대한 남성 중심적 노동의 가치를 강화한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여성이 성 판매를 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와 남성이 받아들이는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른 언어가 필요한 것이지, 성 판매가 노동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p226 노동의 개념은 다양화되었다. 노동의 성애화, 성의 매춘화 현상과 더불어 '감정 노동' '돌봄 노동'이라는 용어도 익숙해진 지 오래다. 살인 청부업, 전쟁주식회사(용병회사)의 존재는 폭력도 노동임 을 말해준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 폭력을 당하는 것도 노동이다. 몸(뇌)을 쓰는 모든 일이 노동이다. '지식인'은 '머리'를 쓰고, 성노 동자나 건축 노동자는 '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노동은 뇌를 사용하고 손발을 사용한다. 노동하는 도중 생각하지 않으면 다친다.


p228 성 역할 -이성애- 결혼 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은 “신성한 결혼과 매춘을 동일시하다니!"라는 분란을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연속선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교환 법칙의 공통점 때문이다. 어느 관계에서나 남성의 자원은 돈, 지식, 지위 등 사회적인 것인 데 비해 여성의 자원은 외모와 성, 성 역할 행동(애교, '여우짓', 성애화된 행동)이다.


p229 앞서 말한 대로 성매매가 폭력인 이유는 남녀의 자원에 대한 사회적 평가, 유통기한, 교환 원리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차별이고 폭력이다. 여성의 몸은 곧 성을 의미하지만 남성의 몸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불평등 교환을 잘 이용하는 소수의 여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성공하지는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원 있는 남성 역시 소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교환 관계는 일 대 일, 개인 간의 교환으로 보이지만, 실제 여성은 자신 의 몸을 '파는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에이전시'들의 착취 구조에 의해 '팔리는 상품'이다.


p230 1) 불공정한 성적 교환 2) 남성 연대의 확인으로서 윤간 혹은 집단 성 구매("00동서“) 3) 다른 직종에서는 볼 수 없는 낙인과 폭력은 성 산업만의 특성이다. 고실업 시대 '흙수저' 계층의 10대들은 성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취업의 경로를 걷는다. 남성이 주로 폭력 산업과 실업에 머문다면, 10대 여성은 주로 성 산업으로 유입된다. 이 계층과 이 연령대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시적으로 '높다. 이 격차는 이들 자체의 경쟁력이 아니라 구매자의 선호에 의해 결정된다.


p231 ‘젠더폭력으로서 성매매'는 불평등한 교환의 법칙으로 조직화된 성매매 산업의 엄청난 규모와 다양한 변형을 밝혀내는 논의가 되기를 바란다. 거듭 강조하건대 문제는 불평등/불가 역적/고정된/차별적 교환이지, 노동이냐 폭력이냐가 아니다. 성 산업뿐만 아니라 노동과 폭력이 아닌 인간사는 없다.


p243 공간을 자연으로 확장하면 여성의 자연화와 자연의 여성화가 동시에 관찰된다. 흑인은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라는 믿음처럼, 여성은 (남성과 전혀 다른) 자연과 (남성과 일치하는) 인간 사이의 중간 존재로 간주된다.


p245 공간을 그릇으로 인식하는 공간의 대상화는 위계적 인식론을 동반한다. 그릇으로서 공간은 성별화된다. 공간의 대상화는 공간은 여성적인 것으로 시간은 남성적인 것으로 범주화해 왔다. 시간은 (남성) 주체의 내부가 되지만 공간은 주체의 외부가 된다. 앞서 언급한 지리학자 투안의 인본주의 지리학에서도 장소는 여성화된 것 이었다. 여성은 공간(space) 혹은 장소(place)로 간주되어 왔다.


p252 집단 강간을 통한 강제 임신은 상대 공동체 를 물리적, 문화적으로 파괴하는 공식적인 전쟁 정책의 일부이다. 전쟁 시 집단 강간은 통제력을 상실한 병사들의 돌발적 개별 활동이 아니라 명령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진다. 보스니아 무력 분쟁 에서 강간에 참여한 한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했어요. 내가 여자들을 강간하지 않았다면 상관들은 나를 죽였을 거예요."


p258 현재 성폭력 반대 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당한다"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여성주의가 극복해야 할 인식이라는 데 있다.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젠더 개념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하여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 프로젝트에 기능적이다.


p260 유독 성폭력 문제에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해야 하는 상황과 이 주장이 과격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조건 자체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 보여줄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오히려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 증명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지운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진 술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성폭 력 사건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이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p264 성폭력이 정조, 순결 침해의 문제로 인식될 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가족, 국가 등 여성이 속한 남성 공동체의 소유가 된다.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개인이 지닌 것 이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몸 밖에 있다. 그러므로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이른바 '꽃뱀' 여성과 성폭력 피해 여성은 연 속선상에 존재하게 된다. 여성의 성이 여성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매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의 몸/성이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남성의 성을 위한 제도인 성매매와 성폭력은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p265-266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남성이 여성에 가하는 성적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리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원으로 삼기 위한 '자기 결정'을 하는 경우에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가 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성적 자기 결정권은 '10대 원조 교제(청소년 성매수)'나 성매매 문제같이 여성이 자기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하는 논리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폭력처럼 성적 자기 결정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주장할 수 있지만, 성매매, 다이어트, 외모 관리, 여아 낙태처럼 여성이 자 기 마음대로 (대개 남성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자원, 투자, '처벌', '학대'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로도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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