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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Feb 24. 2024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는 전사들의 노래

홍은전_전사들의 노래

살아갈 방법도 죽을 방법도 없는 그곳에서 줄곧 맨 앞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기쁘거나 승리에 차 있거나 환호할 일들보다 막막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먼저 앞에 존재한 이들은 낙인과 차별의 존재들이 아니라, 같은 경우에 다른 결과, ‘함께’와 ‘존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다. 책을 읽으며 많이 울고 말았는데, 이 글의 텍스트들은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높낮이의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장애와 여성의 교차성,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차별이 존재함에 대해, 그리고 절박한 요구가 이어지는 의제 속에서도 그러니까 장애인권운동 안에서도 빠르게 흐르는 속도나 남성중심적 에너지나 방식들에서 그래 중요하니까, 라며 넘어가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를 질질 끄는 사람이 되었다는, 장애여성공감을 만든 박김영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얼마전, 경주에서 만난 이들도 생각이 났다. 비장애 기혼 여성들이 생태 활동을 하는데, 근래 페미니즘에 대해 읽기 시작했다고 했다. 거기서 생겨날 발견과 시너지가 어쩐지 영희를 만나며 기대되곤 했다. 당신과 나의 자리가, 문제가, 내일의 삶이 달라지는데 그리고 필요한 것들이 별개이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차린다는 것. 그리고 그 알아차림 뒤, 그 너머가. 세계과 확장되는 그 만남, 그리고 그 이후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홍은전 작가의 러브레터 같이 사랑이 가득했고, 그럼에도 낭만으로만 그치지 않는 이야기가 존재했다. 삶의 지긋지긋함은 낭만만 쫓는다고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이유로 얼마나 많은 좌절과 박탈을 쥐어 움츠리라고 요구했던가.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날린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여기 담겨있다. 숙명과 같은 기록으로 지워지지 않고 이들의 이야기가 분명히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에게. 내 삶을 놓지 않고 단단히 움켜쥔 명애가 은발의 머리카락 날리며 지금도 대구에서 큰 존재가 되어주듯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존재의 발화들은 응당 가 닿기 마련이겠다. 고유하게 근사한 이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그럼에도 영희는 자라서 그 누구도 아닌 영희가 되었다, 에서 끝나지 않는다. 혼자 극복하지 않아도 됨을 알았다는, 그런 금호에게도 금호가 필요하다.


<전사들의 노래>, 비마이너 기획•홍은전 지음•훗한나 그림, 오월의 봄


p5 내겐 소중한 사람이 언론에선 '불쌍한 장애인' 정도로 취급 됐다. 그것은 무척 모욕적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말과 글에 반격하고 싶었다. 내게 장애인운동은 싸우는 만큼 세상이 나아지고, 가장 약한 곳에서 세계가 확장된다는 믿음을 안겨줬다. 내가 경험한 장애인운동은 경이로웠고 황홀했다. 이 싸움에서 《비마이너》의 몫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오래 시달렸다. 《비마이너》만이 할 수 있고 《비마이너》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기록은 숙명 같았다. 기록되지 않은 생은 잊히고 왜곡되고 소멸한다. 한때 사건이 된 생조차 존재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p7 때로 시작하는 것, 그다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의도된 사건이다. 그것은 의지와 결단, 우연이 겹쳤을 때에야 가능하다.


p10 온 세상이 '전장연, 전장연' 하면서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장애인의 현실과 지하철 시위의 옳고 그름을 논쟁 하는 아름답고 토할 것 같은 4월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4월 20일 온 국민의 시선이 아침 여덟시 출근길 지하철에 집중되었을 때, 전장연의 장애인 활동가들은 박경석을 필두로 멀쩡한 휠체어에 서 내려와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는 난감하고 충격적인 시위였다.


p11 20분을 늦은 여자가 20년을 갇혀 산 여자에게 자신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핏대를 세운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이렇게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죠!!"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또 다른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 흘린다.


p12-13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는 언뜻 소박해 보이는 구호는 실은 장애인을 배제한 채 설계된 이 문명 전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작은 계단 하나조차 오를 수 없음을 목 놓아 외치는 건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일인가. '고작 버스‘조차 탈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이 거대한 세상에 맞서 싸운다는 건 얼 마나 막막하고 답이 없는 일인가. 그러니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서도 문제를 덮거나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로 하는 것이다. 2001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모든 것들을 문제 삼고 실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비장애인 중심의 질서와 문 명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장애인 권리 투쟁의 시작이었다.


p14 우리의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열,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차별과 저항이 역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p41-42 그렇게 조금씩 장애인들의 척박한 삶을 알게 됐어요. 나는 나만 그렇게 산 줄 알았어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내 의지로 16년 동안 밖으로 안 나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 요. 비장애인 중심적인 사회와 그 사회의 시선을 갖고 있던 내가 장애인인 나를 가두었던 거죠. 나는 노력만 하면 장애인도 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 리하는 벽이 그렇게 견고한지 생각도 못했어요. 장애인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가족들이 장애인을 장롱 안에 숨겼다는 얘길 듣고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 걸 알게 되니까 분노를 주체할 수 없더라고요. 왜 우리가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나? 왜 우리가 이렇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야 하나? 집에만 있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두려웠어요. 턱이나 계단, 버스, 시설 같은 물리적인 건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죠. 그런데 나와보니 시선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내 시선이 바뀌었거든요.


p52 누군가는 지금의 시선으로 그 시절의 우리에 대해 지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후회 안해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또 어여삐 여겼어요.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때 우리에겐 굉장히 재미있고 굉장히 힘들고 굉장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죠.


p67 우리는 타인을 구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p73 그는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가 그만큼 세상과 마찰하면서 살아왔다는 뜻이다. 영희는 장애 여성공감을 만들었고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한때는 진보정당의 정치인으로, 지금은 장애해방열사 단과 장애 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여성운동가로서 남성 중심적이고 비장애인 중심적인 운동사회를 가로지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p83 신부님은 우리는 모두 고유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어요. 각자 다른 나무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다름을 미워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세상에 존재하는 건 다 이유가 있으니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고요. 모두에겐 자유의지가 있으니 네가 원하는 걸 선택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또 사람은 살면서 계속 바뀐다고, 어렸을 땐 보호받아야 하는 자식이었다면 성장해선 누군가를 보호해줘야 하는 입장이 된다고도 했어요. 인간은 환경과 조건, 나이에 따라 서 있는 그 위치가 바뀌고 그것에 따라 새롭게 자신을 정체화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어요. 그때 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했던 것 같아요.


p87 그 기사에 문제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장애여성 문제가 뭔지 우리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회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장애여성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언어가 없었죠.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하지만 연구소에선 우리가 언론에 나가서 인터뷰도 하고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길 원했어요. 내실을 기하고 싶었던 빗 장 회원들과 밖으로 드러나는 성과를 원했던 연구소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어요. 연구소가 우리를 통제하고 동원하려는 느낌이 강했어요. 빗장은 회원이 80여 명 정도에다 장애여성들이 주체적 으로 모임을 이끌어갔기 때문에 자치성이 강했어요. 언젠가는 독 립해서 우리만의 단체를 만들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시작했죠.


p89 나중에야 알게 됐죠. 장애에 있어선 그 남성과 공감대가 있지만 동시에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불쾌함도 느꼈다는 거, 이중적인 감정이 생긴다는 걸요. 장애여성에게는 장애와 여성이라는 교차성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설명할 언어가 없었죠.


p90 몸의 차이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우리와 너무도 달랐죠. 아시아의 장애여성들은 얼마나 맞아 죽는지 얘기하고 아프리카 장애여성들은 얼마나 굶어 죽는지 얘기하는데 유럽 장애여성들은 레즈비언이 어쩌고저쩌고했어요. 한국은 우리가 얼마나 성폭력을 당하는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제대로 조사된 것조차 없어서 오로지 경험에 기대야만 했어요. 그런데 레즈비언이라니, 완전 신세계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장애가 있는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장애여성의 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과 함께 가기 같은 것들이요.


p97 여성주의에 대한 교육이었는데 그때 배운 것이 이후 운동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오랜 세월 여성은 어때야 한다는 억압적 관습이나 규정이 있었고 아무도 거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폭력의 배경에 대해 알았다고나 할까, 나에게 향하던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시선들이 어디에 기반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p98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 터득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운동을 하려면 어쨌든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현장이고 담론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고, 정책 같은 건 전문가들이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p107 우린 그렇게 다른 역할을 수행했죠. 물론 힘이나 속도를 추구하는 남성 중심적 장애인운동에서 분명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건 너무 중요한 일이에요. 공감은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관계와 문화를 바꿔나가는 운동을 지향했어요. 하지만 이 몸이 이동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문화를 가졌다 해도 확장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제도의 변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예요. 남성 중심적 운동에서 모든 걸 다 실현해낼 순 없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보태 균열을 내고 좀 더 평등한 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 거예요.


p123 장애인 차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관점에 따라 어떻게 지원하고 해결할지가 달라져요. 장애여성 공감에서 활동하면서 문화•차별•여성주의에 대한 경험을 쌓았고 장애인이동권연대 활동을 하면서는 다양한 장애인운동을 만났어요. 장애해방열사_단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알았고 정치 활동을 하면서 짧았지만 강렬하게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을 경험했죠. 그 모든 게 지금 활동하는 데 바탕이 돼요.


p128 나가서 일정 한번 소화하고 들어오면 '아, 힘들다' 하면서 죽은 듯이 잠을 자요. 활동을 많이 줄였어요. 가늘게 오래 하자고, 이게 또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죠.


p141 1954년생 박명애는 대구 질라라비장애인야학의 교장이자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공동대표다. 근사한 은발에 다정하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노장 활동가가 무대에서 사람들을 선동 하는 모습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중증장애인으로 살며 싸운다는 것에 대해 박명애처럼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수가 노래 한 곡에 영혼을 담아 부르듯이 그는 짧은 연설 안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 온몸으로 말한다.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 마흔 일곱에 야학을 만나 세상에 눈을 떴고 쉰셋에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다"로 출발해 동지 여러분, 더 이상 참지 말고 투쟁으로 세상을 바꿉시다!"로 끝나는 그의 열렬한 ‘투쟁 찬가'는 들어도 들어도 들을 때마다 뭉클한, 내가 정말 사랑하는 노래다.


p146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살던 시절에 마라톤 중계를 제일 좋아했어요. 선수들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게 좋아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요.“

 마라톤 중계가 가진 예상치 못한 기능에 허를 찔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명애를 바라봤다.

 ‘이렇게 열렬히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집에서만 47년을 살았을까. 그건 대체 무슨 뜻일까.’


p167 선생님들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저렇게 안 싸워도 될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나서 싸우는 걸 보면서 저 싸움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p189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건 일상이 열렸다는 뜻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고 살았던 지난 삶이 얼마나 억울한지 명애가 가슴을 치며 증언할 때 무대 위의 그도 울고 무대 아래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명애는 말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가슴속 에 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투쟁 현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 습니다.“

 자기 고통의 주체가 되어야만 기쁨도 희열도 선명하게 움켜 쥘 수 있다고 명애의 삶이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러 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일상을 원한다"고 외치며 아스팔트 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투쟁을 벌이고 노숙을 하고 밥을 굶고 오줌을 참는다.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짐작과 다르고 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근사하다.


p211 이 사고로 혜화역에 엘리베 이터가 설치됐어요. 그 경험은 나에게 큰 변화를 줬어요. 내 문제 에 기반해 집회를 했고 사람들과 함께 싸우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경험했죠.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그 과정에서 나도 바뀌고 있었죠.


p227 그들과 웃고 이야기하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어떤 여자를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면 안 된다는 거, 함부로 대시 하면 안 된다는 거, 친하다고 반말하면 안 된다는 거, 어깨나 손 만지면 안 된다는 거, 뭐 그런 것들을 배웠죠(웃음). 이동권연대에서 싸우는 걸 배웠다면 발바닥행동에선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웠어요.


p241 책을 받아보고선 더 놀랐다. 너무나 이상하고 재밌고 슬프고 기괴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었다. 한국사회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나 역시 규식을 인터뷰하며 짧게나마 생애 기록을 쓰는 중이었으므로 그들의 글쓰기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존경스러웠고, 그래서 몹시 부끄러웠다.


p244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상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는 없고, 환경이 갖춰진다면 중증 뇌병변 장애인도 말하고 쓸 수 있으며 자기 이야기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규식이 멋지게 보여주었 다. 규식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p251 그것은 그야말로 전면전처럼 느껴졌다. 점잖아지거나 둥글어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해진 경석의 '나 홀로 시위'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이유는 그가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늙어 예순둘이 된 박경석의 파뿌리 같은 백발은 이 운동의 끈질긴 역사와 변하지 않는 현실, 경석의 집요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때 생각했다.

 ‘나에겐 사랑이었는데 박경석에겐 삶이었구나. 나에게 그것은 사랑이어서 끝났다고 말하고 떠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삶인 사람에게 저 현장은 자기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거구나. 사랑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되고 있구나.’


p277-278 장애인운동의 본질은 만나고 겪는 데 있어요. 만나고 겪으면서 관계를 변화시켜야지만 기획이 생기고 발전해가는 것이지 현장이라는 토대 없이 뭔가 갑자기 기획되고 연결되지는 않더라고요. 살아남은 현장이 있었기에 우리는 2001년 어떤 죽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있었기에 그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죠.


p280 처참한 죽음도 싸우지 않으면 개인적 죽음이 되고, 사소해 보이는 죽음도 싸우는 주체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복원돼요.


p “노금호가 있었으니까.”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노금호라고 박경석이 말했다.

 “그가 없었다면 대구 지역 장애인운동은 지금처럼 확장되지 않았을 거야. 중요한 건 성과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중의 물리적인 힘을 조직해서 권리로서 쟁취하는 방식이지. 그건 시혜적으로 받는 것과 아주 다른 거야.”

 나는 물었다.

 “우와. 금호는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었는데요?"        

 박경석이 대답했다.

 ”금호는 전망을 볼 수 있었어. 전선이 어딘지를 이해했고 이렇게 싸워야지만 변화가 있을 거라는 걸 이해했어. 이해만 한 게 아니라 죽자 사자 사람들을 조직하고 실천했지. 자신감이 없으면 투쟁하기보다 협상을 하려 드는데 금호와 그 친구들은 규모는 작아도 자신감이 있었어.“


p353-354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법적 권한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척에게 부여되더라고요. 뜬금없이 공무원의 연락을 받은 친척이라 당연히 다른 시설로 보내라고 하지 않겠어요? 저희 같은 단체가 법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데서 정말 큰 무력감을 느꼈어요. 다른 시설로 올겨지면 완전히 낯선 곳으로 가는건데 중증의 발달장애인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거든요. 차라리 희망원에 그대로 있는 것보다 못해요


p362-363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꿈꿨고 그걸 실현하고 싶어서 시간과 건강, 청춘을 갈아 넣었어요. 그게 기쁨이고 희망이었어요. 그렇게 살면 불편할 수는 있지만 불안하거나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 았죠. 그런데 국가와 사회, 조직과 공동체는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나를 돌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생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게 됐어요. 요즘 돈 얘기를 많이 한다고 동료에게 핀잔을 들었어요. 저도 그러기 싫고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는데, 사회와 공동체가 내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거예요. 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요.

 평범하고 존엄하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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