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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Feb 20. 2024

‘묘비 세우기’를 읽고

묘비 세우기를 읽고

<묘비 세우기>에는 8개의 단편 소설이 있는데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잃거나 상실한 사람들이 나온다. 책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자면, “책 속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잃는다. 동거하던 연인이 갑작스레 추락사하거나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배우자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약혼자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한다. 친한 룸메이트가 어느 날 홀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하면, 친했던 친구를 한순간의 선택으로 직장에서 내쫓기고, 같은 병을 앓으며 친밀해진 친구의 장례식에 가게 되기도 한다.”


동거하던 연인이 갑작스레 추락사로 사망하여 잃게 된, 제목과 같은 첫 소설 ‘묘비 세우기’를 읽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가벼운 농담을 나누듯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헤어졌는데, 그가 죽었다고 한다. 그 평범한 일상에 날아온 상실이 무거워 잠시 책을 덮었다. 우리 삶에 모든 죽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지내는 평범한 일상에 날아오고, 하루아침에 상실자는 깊은 수렁에 빠지듯 어려워지고, 무거워지는 것. 어떤 종류의 이별이나 상실, 애도나 분노, 슬픔 그러니까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은 더 이상 어제와 같을 수 없는 일상이 된다. 비록 예상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별과 상실은 언제나 느닷없이 밀려 들어오는 감각의 것. 이 소설에는 그런 이별과 상실들이 존재한다. 더는 찬 것을 먹지 않겠다는 애인이 언제라도 먹을지 모르니, 언제라도 먹을 수 있도록 아이스크림에 꽂았던 숟가락은 어느새 ‘묘비 세우기’가 되었고, 그는 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소하지만 다정했던 행위가 남겨진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 올 것인가, 그가 갖게 될 애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연인이 떠났으나, 나는 그의 죽음에 있어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둘은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법적으로는 서로 무관했다. 재언의 죽음은 연주에게 어떤 법적인 책임도 지우지 않는 동시에 어떠한 권리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관계와 죽음에 대해 언젠가부터는 주로 성소수자 커플/부부나 친밀한 관계의, 그러니까 결혼이나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고 또 법적 테두리로 포섭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로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이 책에서도 동성의 애인이 헤어지고 결국 남성과 결혼을 하는 이야기를 만났다.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그려나가는 퀴어의 삶을 많이 만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그러하기를 포기하거나 박탈당하기에.


그러다 이 책을 읽고 비슷한 시기 읽은 이태원 참사에서 결혼을 앞뒀던 연인을 잃은 생존자이자 유가족이라고 칭해야 하나 그 유가족의 범주를 채우지 못하는 이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법적 관계, 특히나 죽음에 있어서 권리와 결정을 할 수 있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정식 유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 이도 저도 아닌 경계 위에서 떠도는 사람. 그의 애도는 너무 이해받지만, 너무 외롭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일한 책에서의 마지막 인터뷰는 이제 결혼을 앞둔 연인들도 아니고, 그저 ‘친구’라 불리고 말 관계의 이야기였다. 서로의 상주가 되어주자고 약속한 결혼도 혈연도 또한 연인도 아닌, 그러나 내 삶에 있어 중요하고 친밀한 생활동반자를 잃고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결정을 할 수 없는 외부인으로서 그가 보낸 추모와 애도의 시간. 모든 죽음은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슬프다. 또한, 남은 이들에게도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게 되고, 추모와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자꾸만 작은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차오른다. 그게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앞서 말한 책을 읽으며 엮어졌던 내 마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집에 있던 연작 소설, 특히나 ‘심해로부터’가 좋았다. 그 속의 인물들은 어떤 면에서는 이 사회의 정상성을 움켜쥐고 살아가겠으나, 또 모든 이들의 정체성이 그러하듯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소수자성으로 움켜쥠이 아닌 움츠림을 안게 되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움츠림의 삶이 아니었던 다카코를 만나는 게 좋았다. 한국이 육지가 아닌 ‘섬’ 출신의 다카코와 일본의 내지인이 아닌 ‘오키나와’ 출신의 미노루의 사랑과 두 사람이 흐르는 삶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 불안할 수 있었음에도 어쩐지 평온함이 느껴져 좋았다. 두 사람의 삶은 결코 안온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곁이 되어주기로 하면서 그리하여 그렇게 평생을 함께 하면서 갖는 관계는 ‘서로의 침묵을 지탱’하는 안전과 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을 흔들리며 살았을 테지만, 흔들리는 삶의 와중이라 그러할까. 두 노년의 그 가만가만한 사랑이, 삶이, 스스로이기를 놓지 않고 도망치거나 억울함으로만 삶을 채우지 않았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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