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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Feb 17. 2024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이태원참사작가기록단_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 친구들을 인터뷰한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를 읽었다. 관련 책으로는 얼마 전, 김초롱님의 책을 읽었는데 그와는 또 다른 이야기와 감정들이 오갔다. 기록단은 20~30대의 이야기로부터 기록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의 참여자도, 희생자의 상당수도 그 세대이지만 실제 그들의 목소리를 쉽게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 “놀러 가서 죽은” 이들의 죽음이라 쉽게 조롱하고,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기록단의 이야기처럼 20~30대 생존자들과 그 곁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모님으로 대표되는 유가족과 또 조금은 다른 고민과 공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이 사건이 중요한 초점에서 비난과 조롱들로 쉽게 비껴나 버리지 않게 형제자매인 유가족이나 20~30대의 이야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많은 부모인 유가족분들의 적극적 활동으로 감동이라 말하긴 이 단어가 신경 쓰이는, 여튼 그러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 속에서 위안도 얻으시겠지만, 많은 힘을 얻으시며 고통과 우울에 침잠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증언에 참여한 이들 중 과반수 이상은 유가족/연인/친구였다. 물론 생존자이면서 함께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생존자, 생존자이면서 유가족인 경우, 유가족, 친구 등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의 증언은 정말 그야말로 다양한 위치와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또 관통하는 동일함 역시 지니고 있었다. 앞서 말한 생존자의 책을 읽으면서도 좀 힘들었는데, 이 책 역시 숨이 차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으면서 자꾸 눈물이 나서 혼자 멍한 시간을 갖곤 했다. 왜 놀러갔냐, 왜 거길 갔냐는 말은 이제 이미 의미 없는 말. 그러니 유가족분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에 대해 우리는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을 나누고, 애도를 하고, 책임을 묻고, 진상을 규명했으면 좋겠다. 어떤 방향의 질문을 가지느냐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말도 안 된다고, 믿기지 않는 참사를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그리고 그 참사는 여전히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되지 않고, 여전히 조롱하는 이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다시 참사가 일어났다. 차마 믿겨 지지 않는,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 생존자들의 증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에 숨이 차던 일이 우리 사회에 또 일어났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하는 목소리들을 외면하고 다시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일상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가 이토록 어렵고, 위험하다면 그것은 정말 너무 위험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P.s. 마지막 글을 기억하고 싶다. 이 책의 앞선 증언 중에도 결혼을 앞두고 있던 생존자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는 ‘정식 유가족’이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혼을 앞두고, 같이 살아왔지만 이 국가가 인정하는 가족의 범주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글은 ‘친구’란 말로 정리되어버리기 쉽고, 삭제되어버리기 쉬운 관계의 곁이었다. 이해, 하겠으나 결혼•혈연의 원가족이 아니기에 서로 상주가 되기로 약속했던 사이임에도 그 어떤 것에도 결정할 수 없던 이의 이야기는 이 참사가 아니어도 우리 일상에 존재한 돌봄, 죽음, 다양한 가족구성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22년 10월 29일 참사가 있던 날. 그 날 수 시간 일정으로 돌봄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나는 그와 보냈었고, 서울로 돌아간 지친 몸의 그에게 벌어진 일이 이 참사였다. 그가 ‘언니’와 오려던 여행은 혼자 오게 되었고, 여행 중이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만났었다. 나에게 너무 일상이었던 그 시간들이 무심히도 흘렀겠구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라다크의 그를 멀리서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어 기뻤다. 그의 애도를, 그의 지금이ㅡ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 씀, 창비


p5-6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침잠된 시민의 애도입니다.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가 아닌 '왜 그곳에 갔느냐'는 말들 이 상처난 몸과 마음을 할큅니다. 진상규명 요구가 과도한 특혜처럼 왜곡되면서 피해자를 향한 적대가 사납게 몸집을 불립니다. 줄어든 애도의 크기만큼 늘어난 건 피해자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과 혐오. 여기에 통상적인 참사보다 오랜 시간 지속적인 애도와 관심을 받아온 세월호 참사조차 뚜렷이 해결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반복되는 참사에 대한 고통과 우울을 가중시킵니다.


p10 재난을 기록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재난만큼이나 고립이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무력감은 외로운 사람을 좋아하기에 재난 이후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힘은 누군가를 치유하는 힘이기도 하니까요.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토닥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폐허와 절망에서 구원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존엄하고 평온한 일상을 향한 열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p19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왜 살았을까?'라는 의문을 떠올려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에 대해 이 한마디 외에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159명은 왜 죽어야 했습니까? 제가 운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159명은 그저 운이 나빠 그렇게 되어야 했던 것입니까? 이 참사가 그저 운으로 생사가 갈려야만 했던 일이었습니까? 당연한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p21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지 않은지, 뭘 하고 싶은지, 하고 싶다면 얼마만큼 하고 싶은지를 잘 구분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안 하고 싶은 거 안 하며 살아요. 누군가는 어떻게 그러고만 사느냐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그게 나의 삶의 행복과 만족도를 높여주는 일이란 걸 아니까. 그래서 저는 삶을 너무나 잘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요.


p28 겨우 얕은 숨만 쉴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때 죽음을 떠올 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경찰에든 119에든 신고했겠지, 금방 구출하러 오겠지 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당연히 곧 구출돼서 용산에 차 주차한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상황에서 처음에 봤던 파란 옷의 여성분이랑 딱 눈이 마주쳤는데 그분이 이제는 울지도 않고 멍하니 제 쪽을 바라 보고 있었어요. 아마 제 위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오고 또 쌓이는 모습을 보고 있었겠죠.


p30 그때 생각했어요. 쓰러진 저희한테 보이는 건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클럽 입구에 있던 사람들의 시야에서 보이는 건 모두 죽어가는 사람들이잖아요.


p38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리고 싶어서 뉴스 취재든 인터뷰든 뭐든 열심히 응했어요. 그리고 얘기했죠. 사실관계는 이랬고, 마약 같은 건 없었고, 그냥 골목이 좁은 곳에서 예년처럼 질서유지나 안내를 해주던 경찰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지, 그해 그날에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생한 게 아니라고요.

 제 신상을 공개하면서까지 인터뷰를 한 이유는, 저랑 가까이 지내는 분들은 제가 다친 걸 알지만 가까이 지내지 않는 지인들이라든가 아니면 서로 존재는 알지만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내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이런 사람들이 뉴스를 통해 저를 보면서 그들이 알던 제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가 되거든요.


p43 저는 시간이 지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이태원 참사를 제가 겪은 일, 제가 살아가는 인생의 한 트랙 정도로 여기고 있어요. 물론 때론 정부가 참사를 대하는 모습에 엄청 분노도 하 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면 안 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이태원 참사 이후로 일상이 바뀌거나 인간관계가 달라지거나 삶의 가치관이 변하지는 않았어요.


p51 주영이 부모님은, 너무 죄송해서 제가 사실 뵐 면목이 없었는데 저를 품어주셨어요. 저를 미워하실 수도 있는데 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시고 걱정해주시고. 너무 고맙고 또 너무 죄송하고…. 주로 주영이 어머님과 통화하고 매주 포천에 있는 봉안당에 주영이 보러도 같이 가요.


p89-90 저는 현장에 존재하는 위험 요소들을 정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실제로 참사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다 갈아엎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 던 일이 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실제로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그리고 이 참사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리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p90-91 그리고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희생자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100퍼센트 아무 잘못도 없는데 희생자가 마치 잘못한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부분 때문에 유가족들이 외치는 것이고, 외쳐도 힘이 없으니 결국 모여서 활동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p114 이태원 참사는 이태원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태원에 간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참사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를 이렇게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말한 것처럼 “왜 갔느냐"가 아닌 "왜 못 돌아왔는지"를 말이에요.


p131 가족 곁에 선 언니 친구들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참사 직후 친구 동생이 걱정된 언니의 친구들은 짐을 싸들고 동생 집을 찾았고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뎠다. 슬픔을 기꺼이 나눠 가지려는 이들은 두손에는 먹을 것들을 들고 가슴속에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평택, 천안, 안산에서 김제 집을 매달 찾아가고 있다.


p201 ‘놀러 가서 죽었다'고 하잖아요. 그냥 지나가다 죽은 사람도 있고, 일하러 갔다가 죽은 사람도 있지만, 맞아요. 놀러 가서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놀러 가서 죽었다고 해서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인 건가요?


p209 어느 유가족분이 "유가족협의회의 목표는 유가족협의회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요. 우리가 유가족협의회에 같이 모인 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함도 있지만, 결국에는 각자의 자리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저희의 목표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매일 만나러 오는 거예요.


p326 언니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니와 가까운 관계인 사람들이 너무나 걱정됐어요. 그래서 언니의 가까운 친구들만 초대하는 추도식을 내가 열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마저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언니가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언니가 기억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언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좋은 이별을 할 권리가 그 친구들에게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도식은 언니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에서 이틀에 걸쳐 진행했어요. 발인한 다음 날부터 언니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어요. 그 분들로부터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을 받았어요. 한쪽 벽에 그 사진들을 붙이고 아이패드로 영상도 계속 틀어놨어요. 그 사람들도 다 언니의 일부분만 봤을 거잖아요. 언니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모습도 보길 바랐어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언니와의 기억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


p333 그러니 저는 저의 의문을 풀기 위해 싸우고 싶어요. 나는 왜 내 친구를 잃어야 했나? 어째서 내 친구는 그렇게 먼 지역으로 이송되어야 했나? 어떤 루트로 그곳에 갔나? 언니야 그 답을 이미 알겠죠. 그러니 우리에게는 산 사람의 질문이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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