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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Feb 26. 2024

타이틀 나인

세리 보셔트_타이틀 나인


<타이틀 나인> 북토크가 내일인데, 하루를 앞두고 책을 다 읽었다. 북토크엔 가지 못하지만, 그 시간이 함께 용기를 주고 받는 이들의 시간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은 1972년에 제정된 미국 교육개정법 제9편 (타이틀 나인)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교육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법. 이 법에 대한 이야기에는 이 법을 만들기 위해, 지켜내기 위해 애써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제일 먼저 앞에 선 사람, 그 앞자리의 사람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조력해준 사람, 경험하지 않아야 할 폭력을 경험한 당사자/생존자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페미니스트 운동가들, 견고한 이분법에 균열을 낸 퀴어들, 성평등에 동의하며 바꿔나간 정치인들 등 무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타이틀 나인은 만들어지기도 쉽지 않았지만, 만들어지고 나서도 숱한 공격을 받고 또 존재함에도 이 법을 모르는 혹은 무시하는 이들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타이틀 나인’이 없었다면 피해임에도 피해로 인정되지 못하고 지나갔을 많은 사건들과 함께 성평등 교육/스포츠/일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백래시도 아닌 퇴행으로 가는 사건들을 함께 만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이 학교로부터 외면당하는 모습에 화가 나고 슬프기도 했고. 그러나 언제나 그 속에는 멋진 싸움과 연대가 존재했다. 책에서 펼쳐진 지난 50년간의 이야기, 그러니까 함께 사건 대응을 하고, 성차별뿐 아니라 성적 지향/인종에 대한 차별 등 중첩적이고 복합적인 차별에 대응하는 모습들에 너무 좋았다. 타이틀 나인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 문제에서 나아가 “인종, 성, 계급, 성적 지향, 그 밖의 요소들이 겹치고 교차하는 효과에 대한 인식은 점차 높아졌다. 이제 사람들은 예컨대 유색인종 여성이 인종과 젠더가 맞물리는 효과로 인해 경험하는 차별을 더 뚜렷이 인식하게“ 되고, “OCR이 1981년 이래 모든 성폭력 관련 지침에서 사용해온 "성적 괴롭힘"이라는 표현은 불쾌한 성적 언사에서 난폭한 성폭행까지 전부를 포괄했다. 이번 지침 역시 "성폭력”을 분명하게 문제점으로 명시하여, 어떤 교육기관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하는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수많은 ‘나’들이 각각의 ‘나’로 존재했고 또 함께의 ‘우리’로 이어졌다.


어느새 50년전 상황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서도 목도한 문제들과 엮이는 2010년대 이후 이야기인 후반부를 읽으며 더욱 공감되기도 하고, 생각나는 사건들이 많았다. 하나의 법이 점차 포괄적 평등을 고민해가고, 또 그러한 이야기를 50년에 걸쳐 만나게 되는 엄청난 이야기를 단 한 권의 책으로도 만나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책은 팬데믹 상황이라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시기의 내용까지 담고 있다. 특히나 트랜스젠더 의제에 대한 반발과 차별 등 이미 우리도 경험하는,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이야기 될. 이것이 차별로서 더 많이 이야기되지 않기 위한 것 중 가장 기본처럼 갖춰져야 할 것 중 하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가장 앞에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것이 우리 사회엔 없다. 여전히 미국의 학교들은 타이틀 나인을 무시할 수 있다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하고, 한국은 차별금지법도 제대로 정치의 영역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버니스 샌들러의 말을 마음에 담으며 힘을 내고 싶다, 같이. ”길이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야. 멀리 보고 바른길을 가야 해." 그리고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던 일을 꿋꿋이 이어갔어."


덧붙임: 위즈덤하우스와 셰어가 함께한 북클럽 덕분에 좋은 책을 읽었다:)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지음, 노시내 옮김, 위즈덤 하우스


p20 그 모호한 각주는 샌들러의 취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불법이자 차별일 수 있다는 최초의 증거를 제시했다.


p23 놀이터를 찾는 엄마들 중에 가끔 대졸 여성이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이 시간제로 일했다. 그러나 샌 들러를 포함해 다들 아이들 얘기만 했다. 정치나 자기 전문 분야나 개인적 꿈과 희망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직업이나 시사 문제는 좁게 한정된 여성성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았다. 백인 여 성은 바로 그 협소한 여성성으로 평가당했고, 반면에 흑인 여성은 전업주부가 되고 싶어도 생계 때문에 취업해야 했다.


p25 1966년에 새로 전국여성단체 Now가 설립된 일은 알고 있었다. 베티 프리던, 그리고 민권 및 페미니즘 운동 분야에서 활약하는 천재적인 흑인 변호사 폴리 머리 등 여성 권리 지도자들이 세운 단체였다. 1967년 NOW는 8개 항목으로 된 여 성 권리장전을 지지하고, 평등하고 성별을 분리하지 않는 교육, 직업 훈련, 그리고 고용 성차별 금지법의 집행을 요구했다.


p26 하지만 1960년대 어느 시점에 자동차를 몰다가 난생처음 깨달았다. "나는 사람이야!" 그저 엄마, 아내, 딸, 자매가 아니야. 다른 어떤 사람에 못지않게 소중하고 응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그 자체 로 온전한 사람이야. 그는 운전하며 흥얼거렸다. "나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이야!" 자꾸만 반복해서 읊조렸다. 이보다 행복한 순간은 기억에 없었다.


p28-29 그날 밤 샌들러는 아이들 몰래 제리와 함께 현관 앞 공간을 개조 한 방에 앉아서 티슈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펑펑 울며 남편에게 자기가 너무 드세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제리는 아내가 실컷 울 게 놔두다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 박사과정에 있는 남자들은 안드센가?" 물론 드세다고 샌들러가 말했다. 다들 드센 성격이었다. 남자들이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당신이 아니야.” 제리가 말했다. "문제는 성차별이야." 당시 성차별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지만, 제리는 다른 차별 문제와 연관된 직무를 맡고 있던터라 더 예민하게 인지하는 것 같았다.


p46 1970년 1월 31일 토요일, 그러니까 샌들러가 "여자치고는 너무 드세다"는 생각 때문에 울었던 날로부터 약 1년 뒤, 샌들러와 WEAL은 메릴랜드대학교에 관한 구체적인 고발 사안과 함께 미국 대학 전체의 성차별을 고발하는 역사적인 집단 진정을 제기했다. 낸시 다우딩 WEAL 회장이 여기에 서명했다. 이 진정은 연방정부와 계약 관계에 있는 모든 고등교육기관이 행정명령 11375호에 의해 개정된 행정명령 11246호를 제대로 이행하는지 즉각 검토할 것을 슐츠 노동부 장관에게 요구했다.


p48-49 여성심리학협회 회장 조 앤 가드너는 피츠버그대학교 교원을 성별로 분류한 자료를 샌들러에게 보냈다. 가드너가 보낸 편지지 상단에는 “건방진 여자들이 뭉친다"라는 선 언이 인쇄되어 있었다. 샌들러는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건방진’이라는 말은 1800년대 이후 감히 인종주의와 계급적 위계질서에 대항하는 흑인을 경멸하는 말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고, 권력자가 보기에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더 나은 처우를 바라는 여성이나 이 밖의 사람에게도 쓰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와 1970 년대에 일부 페미니스트가 민권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이 단어를 회수하고 포섭했다. 이 표현은 여성운동이 민권운동이라는 더 광범위한 투쟁에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건방진 여자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p54 미네소타주 칼턴대학교에 다니는 그랜트의 딸은 총장 채용 공고에 "남성 선호"라는 표현을 넣은 대학 당국을 비판하고 다른 학생과 함께 성차별 반대 운동을 조직했다. 뉴욕주 코넬대학교에 다 니는 아들도 성차별주의의 피해자라고 그랜트는 덧붙였다. "저는 아들이 걱정됩니다. 왜냐하면 여자를 끌어내려야 남자가 올라설 수 있다면, 어떤 남성도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 든요."


p74 머리는 인종차별 투쟁과 성차별 투쟁이 "똑같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차별주의를 제인 크로라고 부르며 짐 크로 인종주의와 연결 지었다. '제인 크로'라는 표현을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머리였다. 그는 인종, 젠더, 연령, 계급 억압이 중첩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p108-109 타이틀 나인의 제정으로 이제 학생들은 성차별에 저항할 새로운 방법을 얻었다. 이전에는 학교 관계자에게 비공식적으로 항의하든지 아니면 소송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OCR에 공식으로 진정을 내어 학교가 타이틀 나인을 위반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타이틀 나인 시행규정이 국민 의견 수렴 등의 긴 절차를 거쳐 법적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시행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p156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를 명명해야 했다. 그들은 우드와 상담하면서 '성학대'sexual abusc, ‘성적 위협 scxual intimidation, ’성적 강압' scxual coercion 등을 거론했다. 1975년 4월, 그들은 다양한 행위를 넓게 포괄하는 '성적 괴롭힘’ sexual harassment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했다. 곧 언론도 그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p162 처음부터 원고들은 익명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p181 이런 위험과 스포츠계 여성 다수의 전반적인 정치적 보수성 때문에 타이틀 나인을 학교 스포츠에 적용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은 당시 새롭게 성장하던 동성애자 권리 운동과는 대개 별도로 전개되었다. 인종 정의 운동이나 장애인 권리 운동도 각기 따로 흘러가다가 그 모든 흐름이 물줄기로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한꺼번에 모여서 반짝이는 호수가 되어 여성운동에 몸담은 사람들의 관점을 넓혀 주었다.


p184-185 다른 많은 여성 옹호자와 마찬가지로 샌들러도 타이틀 나인과 같은 법으로 모든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려면 모든 형태의 차별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p231-232 대학 성폭력에 관한 최초의 전국 설문조사에서 32개 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 6159명 중 27.5퍼센트가 강간 또는 강간미수 생존자라고 응답했다. 조사자들의 결론은 강간 반대 운동에 몸담은 여성들이 10년 넘게 강조해온 메시지와 동일했다. "강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만연해 있다." 이후 수십 년간 많은 연구가 여자 대학생의 20~25퍼센트가 성폭력을 경험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p232-233 페미니스트들은 -흔히 유색인종 여성들의 주도로- 중첩되는 억압이 단순히 각 부분을 합친 것 이상의 문제를 초래한다는 관념을 두고 점점 더 치열하게 고심했다.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운동을 따로 나눠 별개의 경로로 유도하는 일은, 예컨대 유색인종 여성의 체험을 주변화한다. 유색인종 여성에게 차별은 그렇게 딱딱 깔끔하게 나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시하는 해결 책이 도움이 안 되고, 각종 차별 반대 운동이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인다.


p275 밀류티노비치가 보기에 여자 스포츠에 대한 저항은 1991년 이래 이 대학 총장을 맡고 있는 존 웰티의 탓도 일부 있었다. 웰티는 전에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스포츠 프로그램을 축소하면서 남녀 운동부를 각각 7개씩 남겼으나, 거대한 미식축구 부를 유지하기 위해 여자 선수 자리를 불공평하게 줄였다. 그때 체조 선수 돈 파비아의 주도로 여자 선수들이 타이틀 나인 소송을 제기했다. 대학이 그렇게 선수 자리를 줄였기 때문에 OCR이 요구한 공평한 스포츠 참여 3대 요건 중 두 번째 요건(여성에게 스포츠 기회를 확대해온 꾸준한 전력이 있을 것) 또는 세 번째 요건 (여자 선수들의 관심과 능력에 맞을 것)은 충족할 수 없었다. 따라 서 타이틀 나인을 준수했다는 판정을 받으려면 첫 번째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다시 말해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 자리가 재학생 전체의 성비에 상응해야 했다. 법원은 대학 측에 여성 운동부 2개 를 되살리라고 명령했다. 고의든 아니든, 재정적인 어려움을 성차별의 구실로 삼을 수 없다고 법원은 판결했다.


p278 그 학생들은 1992년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브라운대학교는 재학생 중 여성 비율은 48퍼센트인데 운동선수 중 여성 비율은 37 퍼센트였다. 자금이 모자란 것도 아니면서 학교는 스포츠 예산의 대부분을 남자 운동부에 지출했다.

 브라운대학교는 패소를 거듭하면서도 6년을 싸우고 소송에 약 200만 달러[약 26억 원]를 지출했으며, 전 국민이 주시한 이 사건에서 온갖 상투적인 주장을 펼쳤다. 대학 측 변호사는 3대 요건은 역차별이며 여자는 남자만큼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브라운대학은 최후의 필사적 시도로서 연방대법원에 사건 심사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1998년, 하급 법원은 브라운대학의 여학생 비율과 이 대학 운동선수 중 여성 비율의 차이를 3.5퍼센트 범위 내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 사항을 담은 시정 조치를 승인했다.


p282-283 한편 전국 각지에서 '비주류' 종목 남자 선수들이 타이틀 나인을 막으려고 소송을 걸기 시작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그들은 미식축구 부, 남자 농구부와 야구부가 학교의 비호를 받으며 비대해지는 현상에 항의하는 대신, 자기들 종목이 축소되는 것을 타이틀 나인의 탓으로 돌렸다.


p291 타이틀 나인은 남자 운동부를 축소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규제 기관도 남자 운동부의 축소보다는 여성의 경기 참여 확대를 선호한다고 OCR은 언급했다.


p293 “경기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경기장과 탈의실에서 동성애 혐오가 점점 증가했다." 루시 제인 블레드소는 1997년 <하버드 게이 앤드 레즈비언 리뷰>에 적었다. "여자 스포츠 홍보자들이 여자 경기에서 레즈비언 이미지를 씻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스포츠에서 여성이 설 자리를 위해 오랫동안 힘겹게 투쟁한 레즈비언들 - 그리고 레즈비언으로 불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성애자 여성들 -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여자 선수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p359 가해자가 책임을 시인하는 서면 자백이 있었는데도 예일대 당국은 브로드스키에게 정식 조치를 취하지 말라고 말렸다. "너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남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조언했다. 브로드스키는 타이틀 나인에 대해 몰랐다.


p367 OCR이 1981년 이래 모든 성폭력 관련 지침에서 사용해온 "성적 괴롭힘"이라는 표현은 불쾌한 성적 언사에서 난폭한 성폭행까지 전부를 포괄했다. 이번 지침 역시 "성폭력”을 분명하게 문제점으로 명시하여, 어떤 교육기관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했다.


p371 1972년, 의회는 타이틀 나인을 제정함으로써 이전부터 공평한 교육을 요구해온 소녀와 여성들에게 도구 한 세트를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단단한 막대기 정도에 불과했던 이 둔탁한 용구의 도움으로 그들은 여성운동의 물살 위에서 방향을 잡아갔다. 1979년 OCR의 정책설명은 타이틀 나인 시행규정이 제공한 막대기 하나를 좀 더 유용한 모양으로 다듬었으며, 여성들은 그것을 노로 삼아 공평 한 스포츠를 향해 맹렬히 저어갔다. 이제 성폭행 생존자들은 2011 년에 나온 〈동료들에게〉를 통해 제대로 된 노 한 쌍을 얻었다. 그들은 그 노를 힘차게 저어, 성폭력, 인종차별, 경찰 잔혹 행위, 경제 불 평등 확대에 반대하고 성소수자 권리와 이민자•난민에 대한 인도적 처우를 옹호하는 각종 사회정의 운동이 소용돌이치며 한데 합쳐지고 가속화하는 지점으로 진입했다.


p382 피노는 모범생이 되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UNC에 합격하자 꿈이 실현된 듯했다. 하지만 성폭행이 그의 삶을 뒤바꾸어 놓았다. 그는 하이힐을 신거나 드레스를 입는 일도 그만두었다. 달리기도 그만두었다. 전공 때문에 야간 강의를 들어야 하자 전공도 바꿨다. 학교 안이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폭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UNC 관계자가 자기를 보호하거나 도와주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 였기 때문이다.

 대학 성폭행 생존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부분을 가장 힘들어 했다. 그들이 사랑한 학교가,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하는 학교가 그들을 배신한 점 말이다.


p409 OCR은 2001년에 1997년 지침을 개정하면서 "성 고정관념에 근거한 젠더 괴롭힘으로 학생의 (교육) 프로그램 참여 또는 수혜 능력이 충분히 심각하게 부인 또는 제한될 경우 타이틀 나인을 적용한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따라서 예컨대 한 소년이 너무 여성스러워 보인다고 다른 학생들에게 놀림 당한 나머지 성적이 떨어질 경우, 학교가 가해 학생들의 행동에 대응할 책임을 질 수 있었다. 또한 OCR은 "피해 학생이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고정관념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을 경우 그것은 성차별일 수 있다"라고 2001년 지침에 적었는데, 이것은 트랜스젠더 학생들에게 생명줄과 다름없었다.


p434 피노에게 그건 유체이탈 체험이었다. 무대 스태프들이 리허설 때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배우들도 다가와 그들을 포옹하고 "고맙다"라고 했다. 그러나 피노는 그 영화가 성폭행 생존자 가운데 성소수자 학생이 얼마나 많은지 명확하게 다루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더 헌팅 그라운드〉에서 내가 라틴계 퀴어 여성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그는 궁금했다. 젊은 라틴계 퀴어 여성들이 그 영화에서 자신들이 대표되는 모습을 봤으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또한 그 영화는 '영웅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깔끔하지 않은 부분은 덜어냈다. 이를테면 피노가 여러 차례 겪은 공황발작은 화면에 전혀 나오지 않았다. 활동가들이 대체로 건강보험이 없다는 사실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퀴어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족과 쿠바인 공동체에 그 점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는 장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쿠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피노가 강간당해서 퀴어가 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p487 사춘기 이후의 트랜스젠더 소녀 중에는 '평균적인' 시스젠더 소녀보다 경기에서 유리할 수 있는 호르몬을 투여받는 학생도 있고 아닌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경기에 포함할 가장 공정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분법적 젠더 범주에 잘 들어맞지 않는 인터섹스나 젠더 중립 운동선수는 어떻게 아우를 것인가? 이 문제는 학교 스포츠에서 성이나 젠더가 꼭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을 다시금 던진다.


p501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소식에 버니스 샌들러의 딸이 속상해하다가, 어머니가 그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길이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야. 멀리 보고 바른길을 가야 해." 샌들러가 딸을 위로했다. "참정권 운동을 했던 여자들은 가는 길이 평탄치 않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어. 그들은 장애물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운동을 멈추지 않았어. 사는 동안 그들이 하는 일의 결과를 보지 못할 것도 알았고. 그래도 하던 일을 꿋꿋이 이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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