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연_태어나는 말들
<태어나는 말들>의 첫 문장은 ”2018년 5월 7일, 어머니가 자살했다.”이다. 어머니의 자살, 자살생존자인 저자가 다시금 써내려가는 고통의 언어와 애도의 글. 그러나 그 ‘다시’의 과정은 손쉽게 오지 않는다, 결코. 그럼에도 허은실 시인이 썼듯 ”쓰일 수밖에 없는 글이“ 있는 것이겠지. 울면서, 날뛰면서도 쓰는 글. 가슴을 움켜쥐고도 쓰는 글이. 온전히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실과 추정이 뒤섞인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들과 그의 원가족의 그러한 이야기가 어떤 과정을 가지고 쓰여졌을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책을 읽기도 하였고, 그 이야기 자체의 무게와 깊이로 이 책을 읽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애초 편할 수 없음을. 왜 편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랬다면 이 말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이 언어가 될 때, 게다가 나와 타인의 고통의 공존을 설명하는 불가능의 시도가 어찌 아무렇지 않고 편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저자의 글이고, 저자의 몫에서 토해낸 결과이다. 나라는 사람이 온전하게 나에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방식으로 엮어지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인 ‘나’로 존재하기에 이 경계를 지어 나누기 어려울 법하다. 그렇기에 엄마를 엄마로서만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작업이 되고, 그것이 나라는 여성과도 얽히며 사유되는 것이다. 가부장제 남성중심적 이성애규범 사회에서 엄마란 여성이 받아온 성별화된 설움과 폭력은 대를 지나서도 끊기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이 세상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성적 폭력과 차별들은 딸인 여성들에게로 이어졌다. 저자 역시 자살 사고와 불안 공황 장애를 경험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전, 연인이었던 이의 자살을 겪었고, 미끄러지는 연애들로 자기파괴적 시간을 보내었다. 이어받고 싶지 않은 유산 아닌 유산이 되어버린 ‘더러운 것’들은 이 여성들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왜 이 여성들에게 내려졌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이 여성들이 아닌 이들이 답해야 할 일이리라. 여성들이 ’미쳐버리고‘, 뛰어내리지 않도록. 술에 취하지 않고, ‘미쳐버리지 않고’, 죽어버리지 않고도 이 서러운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주었다면, 아니 애초 그렇다면 이 설움이지 않았을지도.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이 세상의 여성들은 그토록 ‘미쳐버렸을까’. 이 ‘미친’ 여자, ‘아픈 몸’의 여자의 목소리들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지궁내막종 수술과 엄마가 사랑없이 폭력으로 시작된 친부와의 결혼을 끝내고, 그가 아닌 다른 남성을 만나고 새로이 가정을 꾸렸을 때 가졌던 일종의 안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분노였고, 지금에 와서도 안도일까 싶은 현실이지만서도.
덧: 내일 제주에 간다. 일을 하고 나서 짧은 혼자의 시간을 오랜만에 제주에서 보낼 예정이다. 스쟈가 알려준 김녕의 책방이 이 책에서 언급되었다. 다음주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 2곳 중 한 곳인데 과연? (휴무일과 내 일정이 거의 겹침..)
<태어나는 말들>, 조소연, 북하우스
p29 어머니의 유품 전부를 정리하는 데는 꽤 시간 이 들었는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완전히 외면했다. 한편 아버지는 이 유품을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물건을 하나하나 버릴수록 그를 짓누르는 부재와 상실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진다는 주문에 걸린 듯이.
p33-34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실감은 바다의 심연과 같아서 우리는 점차 희박해져가는 공기 속에서 한 줄기의 빛, 한 모금의 공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 부재가 주는 숨막힘은 나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갈구와 열망으로 이끌었다. 어머니에 관 한 진실을 재구성하고, 말하기 힘든 침묵의 행로에 숨통의 길을 내고 싶었다.
p36-37 그녀는 어떤 남성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이제야 삶의 기쁨이나 몰입이 될 만한 어떤 사건이 생겼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 들었다.
p86 그 부끄러움은 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배운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비해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아는 자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교양 없음이 부끄러웠고, 수치와 분노와 슬픔을 거침없이 '세련'되지 못하게 표출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본능적인 방식으로는 어머니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이 결코 세상에 이해 받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평생 육체노동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를 사무직 노동자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을 과연 계급 상승이라고 봐야 할까?
p111 어머니의 심연 속에 나는 오랫동안 갇혀 살아온 것만 같다. 어머니와 나에게 자행된 성추행은 오랫동안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컴컴한 어둠 속에 봉인하도록 했다.
p142 그러나 어머니가 가족들이 자신을 해하려 한다는 환 청을 듣고 음식에 독을 탔다는 자신만의 논리적 귀결에 따라 지속적으로 경찰과 구조대에 신고한 것이라면, 그때 그녀가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를 나는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미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폭풍의 잔해 속에서 나는 그 유해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 유해들만이 내가 어머니를 이해할 유일한 단서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를 이대로 어둠 속에 내버려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대로 밤의 침 묵 속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그 무력함이 나를 압도하는 밤이면, 나는 그 말할 수 없음'에 대하여 '쓰기'로써 엄혹한 침묵의 시간을 건너가기로 했다.
p164-165 나의 자궁은, 여성의 자궁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혹'을 키우는 일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 흘리며 삶을 기억한다. 모든 여성적 기억과 상처를 품어낸다. 흘려보낼 한 방울의 피가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기억하고 애도하며 어둠을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p175-176 한국에 돌아온 뒤로 나는 이고르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사랑으로 새롭게 차올랐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p184-185 치욕을 이기는 건 사랑이다. 이제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멈추지 않는 일은 사랑의 한 방식이다. 기억함으로써 생의 소멸에, 냉혹한 망각에, 삶의 치욕에 저항한다. 지금은 없는 어머니의 결혼반지, 그 작은 동그라미를 떠올리면 치욕도 삼켜진다. 응급실에서 차가운 알몸으로 식은 어머니는 금반지가 아닌 청동빛으로 바랜 싸구려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싸구려 반지의 동그라미가, 그 마음이 나를 키워냈다. 어머니의 굳은 손가락에서 그 반지를 빼내던 날, 나는 영원히 그 동그라미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의 동그란 마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의 연민, 그것이 나를 살려낸다. 그 동글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굴리며 나는 살아간다.
p189 오늘 하루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순환하는 계절이 있다. 자연의 리듬으로 매 순간 살아내며 자연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리고 나를 충분히 돌보고 계절의 냄새를 맡고 타인의 안부를 살피는 일.
p190 일상이 비루하고 남루할지언정 그것을 살아낸 내 일상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일, 그 일상의 비천한 조각들이 모여 현재를 통과한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아침의 나는 오후와 저녁의 나를 통과해 밤의 내가 된다. 밤새 거친 땅을 떠돌던 영혼은 다른 존재로 태어나 아침의 빛을 맞이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은 파동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리 고 이 세계와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 세계와 우주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p198-199 말하지 못하던 것을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를 전시하는 것이 아닌, 객관화하고 관찰하고, 기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병든 상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픔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기 시작하면 치유되기 시작한다. 치유된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들어찬 슬픔의 덩어리를 낱낱이 풀어 헤치는 작업이다.
p263 역사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역사적 비극은 결국 개인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것을 겪은 개인은 자신의 몸속에 남은 깊은 상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