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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앨리스웡_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by 수수


장애인권 활동가 앨리스 웡의 첫 단독 저서(아직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는 읽어보지 못함)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은 제목처럼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온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정상성’ 사회에서는 ‘망가졌다’고 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 앨리스 웡은 ‘신탁’이라 부르며, 비장애인들보다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장애의 신탁 예언자로서. 다양한 공간과 방식으로 활동하는 그의 이 책 역시 그 방식이 다양하다. 일기, 블로그, 에세이, 인터뷰, 기고글, 대화, 방송, 사진, 그래픽 등 이미지 등이 다양하게 엮여있다. 비장애중심성의 문제를 꼬집는 앨리스 웡의 글의 방식은 장르를 횡단하며 단일한 방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마치 우리가 운동을 이야기하며 횡단의 정치, 교차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리드미컬하게 만나지는 것 같았다. 상호 의존으로 공존해나가야하는 ‘우리’는 모두 각자만큼의 취약성이 지금 현재 존재하고 그것은 멈춰있지 않기에 모두를 위한 접근성은 중요하며, 그것에 대해 사랑으로 서술하는 앨리스 웡의 이야기가 나에게 다정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의 투쟁력은 단단함을 보여주었고. 호랑이 기운으로 단호하기도 하고 성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했던, 미래에서 날아온 앨리스 웡의 회고록.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 앨리스 웡 지음, 김승진 옮김, 오월의 봄


p11 여러 가지의 존재론적 위협을 중층적으로 안고 살아가면서, 저는 주변화된 집단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 다른 운동들을 아우르며 유대를 형성하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 말고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거나 구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p73 나는 장애를 가진 상태로 판토마임을 하면 왜 안 되느냐고 질문했다. 가령,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을 표현하는 판토마임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선생님은 충분히 신체적이지 않아서 안 된다고 하셨다. 합리적 편의제공이라는 개념은 튜더 선생님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생활지도 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항변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모욕적이었다. 이것은 순전한 차별이었다. 튜더 선생님은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는데, 선생님은 내게서 단지 신체의 기능적인 제약만을 보셨다.


p74 나는 장애 또한 나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중국계 이민자라는 사실과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렇듯이 말이다. 나의 위치는 이와 같은 더 큰 맥락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것을 깨닫고 나니 내 경험과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p160 보조공학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것은 무용하다. SF 덕후로서 나는 테크놀로지와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스타트렉〉 에 비유하곤 하는데, 장애인은 지금 가장 깜깜한 암흑의 타임라 인을 살고 있다. 적어도 미국 트럼프 행정부 아래에서는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우리가 연결되고 소통하고 사회적인 삶에 참여하는 방식을 혁명적 으로 바꿔준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다.

활동가들은 장애인 권리를 위해, 또 사회안전망과 주변화된 집단에 대한 공격에 맞서 계속 싸우고 있다.


p171-172 플라스틱은 값싸고, '안티-럭셔리'이고, 낭비적이고, 환경에 해롭다고 여겨진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에 더해 플라스틱은 내 건강과 삶의 질에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신경근육장애가 있어서 수분과 영양을 섭취하는 데 플라스틱 빨대가 꼭 필요하다. 현재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에서 환경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다.


p174 비장애인인 고객은 공짜로 제공되는 것을 편리하게 이용 할 수 있는데 왜 장애인인 고객은 음료를 마시기 위해 무언가를 직접 가지고 다녀야 하는가? 이것은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으며, 환대 업종의 서비스에 걸맞지도 않다.

이것이 당신을 위해 지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자신이 장애가 없는 상태로 누리고 있는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의 요구 때문에 우리[장애인]는 무한한 추가 노동을 하면서 자신을 설명하고 변명해야 한다. 어떤 날에는 정 말이지 다음과 같은 말을 녹음해서 틀고 다니고 싶다. "장애인이 하는 말을 믿으세요, 쫌!" 나는 내 신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물건을 소비하 고 폐기물을 내놓는다. 우리 모두 폐기물을 줄이고 재사용하고 재활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동시에, 사람마다 필요가 다르므로 폐기물을 줄이는데도 서로 다른 해법이 필요 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플라스틱 빨대나 산소 튜브처럼 나 를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주는 플라스틱 물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괴물인 것은 아니다.


p200 나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간을 내 자아와 내가 속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으려 애쓰며 보냈다. 비장애중심주의나 교차성 등 오늘날의 나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 어휘나 개념들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장애인의 자긍심과 장애인 정체성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다른 장애인들을 찾아보고 만나보려 노력하기 시작하자 이 과정에 속도가 붙었다. 그들이 꼭 나와 같은 종류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나 내 절친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그들에게서 우리 삶의 실제 경험에 대해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라는 이해와 인정의 느낌을 받 을 수 있었고, 그것이 내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p201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앞으로도 내게 계속 존재할 혼란, 부끄러움, 내면화된 비장애중심주의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수많은 장애인들이 베풀어준 사랑과 너그러움 덕분이다. 사랑과 친절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를 상호의존의 유대로 묶어주는 집합적인 힘을 구성한다.


p203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본질상 정치적이다. 우리는 행동과 활동을 통해 명시적으로, 또 은밀하게 우리가 동류이고 동지임을 선언한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아니지만 모두가 날마다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람을 찾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p271 2015년 아시아계 미국인 미디어센터가 음력설에 대한 구술사를 수집했을 때 나는 엄마를 인터뷰했고(엄마는 우리 집에서 두 번째로 외향적인 사람이다), 그 덕분에 우리의 중국계 이민자 가족 이야기가 미래까지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것은 과거의 덫에 갇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리법이나 음식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은 무엇이 '정통'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심판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과 지침을 전해주는 것이다. 발효시켜 만든 장류처럼, 이야기들도 시간이 풍미와 깊이를 더해준다. 이야기들은 살아 있고, 우리 곁에 존재하면서 우리에게 영양분을 준다.


p320 어떻게 장애인들이 이러한 도구를 우리의 문화로 '크립'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 어떤 공간을 '크립'한다고 할 때, 이는 그 공간을 장애인들의 존재, 문화, 신체, 사고로 변모시킨다는 뜻이다.


p329 앨리스: 안무 같아요, 그렇죠?

패티: 네! 와아, 그래요!

앨리스: 장애인으로서 간병과 활동지원을 받는 건 솔로 공연이 아니에요. 이건 앙상블의 프로듀서가 되는 일이고 성공적인 공연이 되느냐의 핵심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죠.


p332 앨리스: 이제 잘 시간이에요. 엄마가 산소기계랑 에어 매트리스를 켰어요.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이런 생각을 전하며 마치겠습니다. 장애인과 그 들을 돌보는 사람 모두 취약성과 회복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질은 우리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종류의 세상인지를 반영합니다. 우 리의 노동은 가치가 있어요. 우리는 함께 더 강해집니다.


p352-353 중층적인 억압의 축 아래서 살아가는 것은 버거울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정체성들과 당신이 살아가는 많은 경험들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당신을 더 예리하고, 더 온전하고, 더 비범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은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믿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믿 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리고 우리의 경로가 다시 만나지 않고 우리가 다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고 해도, 저는 이 우주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당신의 동지,

앨리스


p360-361 죽음과 깊은 불확실성은 장애인과 만성질환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장애가 있는 신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일상의 모든 일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샤워를 하는 것은 올림픽 금메달만큼의 가치가 있는 성취다. 그리고 장애인의 삶과 예측 불가능한 위기들은 글쓰기의 밀당에 또 하나의 층위를 부가하며 잘 짜인 글쓰기 계획마저 언제든 불구덩이에 처박힐 수 있게 만든다. 집세 걱정 없이, 통증이 갑자기 찾 아오거나 아프게 되는 일 없이, 건강보험을 잃을 걱정 없이, 가족과 자신을 돌봐야 할 걱정 없이 미리 짠 일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p367 우생학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나 있었던 고릿적 유물이 아니다. 우생학은 지금도 버젓이 살아 있고 우리 사회의 문화, 정책, 실천 속에서 뿌리 깊게 작동하고 있다. 전문가들과 의사결정권자 들은 의료 분야의 인종주의, 노인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또 그 밖의 여러 편견으로 과도하게 악영향을 받는 집단들을 시급히 정책 결정 과정에 포함하고 그들과 협업해야 한다.


p372 집단수용시설은 안전과 돌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시설은 애초부터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살아가는지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고안되었다. 이런 시설들은 투명성과 책임감 없이 운영하도록 사실상 허용받고 있다. 이런 시설에서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살아가게 되고 착취, 폭력, 방치에 처하게 된다.


p392 장애인, 만성질환자, 비만인, 면역계 손상자, 또한 필수노동자, 미등록 이주자, 노숙인, 수감자를 포함해 모든 고위험군 사람들이 우선순위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촉구해주세요. 고위험은 고위험입니다. 우리는 처분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p423 정직한 것과 더불어 취약한 것은 집합적인 해방을 이루는 데서 핵심이다. 이것은 장애정의의 원칙들 중 내가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한 가지다. 집합적인 해방은 양초 하나 사서 불을 붙인다 고, 팟캐스트 한 편을 듣는다고, 회고록 한 권을 읽는다고 갑자기 벌어지는 게 아니다. 여기에는 날마다 있어야 할 의도, 자기 성찰, 그리고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제공해주는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취약하다는 것은 당신을 고통에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추가적인 감정노동을 필요로 한다.


p474 어렸을 때 근위축증 학회의 텔레톤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30세, 40세, 50세가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른이 돼서 무엇이 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린아이가 그런 개념과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었겠는가? 의사와 과학자들은 내 미래를 닫아 버렸고, 슈록 선생님을 비롯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닫힌 문을 부수고 내 미래를 활짝 열어주었다. 가족과 친구들(그리고 테크놀로지, 인터넷, 메디케이드, 그 밖의 서비스들도)과 더불어 슈록 선생님께서 내 생명을 구하셨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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