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_모우어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지거든요. 행복한 사람은 마음이 따듯해져요. 몸도요!”
얼지 않는 물처럼 유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야자’의 말처럼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읽었던 것처럼 ‘이야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생각한 것보다 거대하거나 크거나 깊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다정에 대해 소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야자의 건넴이 다정스러워서 죽음들이 존재하고, 몹시 춥고 외로운 세계를 읽어나가면서도 춥지 않고 외롭지 않았다. 로비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생태 속 일부로서 인간 종을 더욱 자각하게 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분명한 힘이 있다. 강약으로 누군가를 제압하는 힘으로서가 아니라, 변화하고 일깨우는 힘으로서. 이야기 중 눈물이 차올랐던 건 ‘서프비트’를 읽으면서였다. 소설 속에서 많은, 다양한 이유에서의 죽음들을 만났다.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담은 ‘모우어’에서 언어는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잊혀졌다. 모우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불만이 되었다. 천선란 작가는 “인간도 처음에는 벌레, 곤충,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자연의 일부였을 텐데 왜 생태계로부터 떨어져 나갔을까 고민하다 보니 시작은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인간은 이제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달라져야 한다면서, 그는 “같은 현상도 언어를 바꾸면 느낌이 달라요. ‘지구 온난화’라는 미온적인 단어를 이제 ‘기후 위기’로 대체해서 쓰고 있는 것처럼요. 언어를 정신 차리고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모국어가 존재한다. 나와 다른 모국어나 내가 사용하지 못한 외국어의 공간에서 나의 언어는 어제와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언어는 사실상 절대적이다.
그는 그런 가지에서 뻗쳐나가 인간 종이 만들고 있는 파국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빠르고 무섭게 달려온 지금을 바꾸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불가능하다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슬픔과 상실감을 안고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용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나와 같은 인간 종이 그리고 내가 같이 공모하고 조력하여 망쳐버린 세계에서, 뒤늦은 후회와 그럼에도 남아있는 가능성들을 위해 곰곰 하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서로에게 피난처가 되고, 그것을 확장하며 구축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런 이들에게 건네는 마음과 같이, 천선란 작가는 말했다. “홀로 버텨야 하는 그 경계에서 조금은 덜 외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숨고, 누군가는 지키고, 누군가는 이름만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세상에서.”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게 되는 체념(諦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들여다보고, 기다리면 만나게 되는, 깊이 생각하는 체념(體念)일 수 있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나아가는 ‘우리’는.
<모우어>, 천선란 소설,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