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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가브리엘르 블레어_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by 수수


섹스를 하는 모든 이들이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임신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후 파생될 수 있는 결과 중 하나인 ‘임신’에 대해 원치 않을 때 선택될 수 있는/있을 ‘임신중단’에 대해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성’에게만 주목해왔다. 이 책은 ‘원치 않는 임신’을 만든 ‘남성’에게 더 주목하고, 책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해야 한 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연하지 않아서 너무 많은 고통과 문제가 만들어졌던 것에 대해 ‘사정’의 ‘책임’에 대해,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고. 남성만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고,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도 그렇다. 그런데 왜 한쪽만 피임을, 그것도 더 위험하고나 부작용이 큰 방식을 감당하고 임신 위험으로 불안해야 하는가. 남성이 피임을 하고(일단 제일 쉬운 콘돔!!), 함께 선택하고 논의한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책임의 결과로 고통받거나 힘든 이들의 경험이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 연애들을 생각해보았다. 동성 파트너를 제외하고 사정하며 정자를 내보낼 수 있었던 이성 파트너들과의 섹스에서 언제나 반드시 콘돔이 기본전제가 된 것만은 아니었단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과거형인데도 아찔해진다. 그때의 나는 운이 좋았다. 다행이었다, 고 말해야할까.. 그럼 누군가는 운이 좋지 않아서, 불행이어서 원치 않는 임신이나 임신중단을 경험하는 걸까? 나도 누군가도 이런 방식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책임감 있는 사정이다.


덧: 이 책의 저자는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이 책이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관점이란 것을 밝혔다. LGBTQIA+ 경험을 지워내거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는 결국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성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위해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기로 했”다고, 권력관계나 책임에 대해 나누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임신중단의 책임을 남성에게 묻다>, 가브리엘르 블레어 지음, 성원 옮김, 은행나무


p9 제 주장의 핵심은 임신중단의 99퍼센트는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발생하고, 모든 원치 않는 임 신의 원인은 남자라는 거예요. 임신중단을 둘러싼 지금의 논의는 전적으로 여성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지죠. 여성에게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있는지, 여성의 몸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식으로요.


p17 여자가 성관계를 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난자가 수정 가능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임신이 되지 않는다. 남자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는 항상 수정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임신시킬 수 있다. 이론상 1년 내내 생식 능력이 있는 남자는 생식 능력이 있는 서로 다른 여자(한 명 이상!)를 매일 임신시켜서 365번(또는 그 이상!)의 임신을 유발할 수 있다. 같은 1년 동안 한 여자는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과정을 단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다.

논의를 발전시키기에 앞서 생식 능력의 막대한 격차를 확실하게 짚어두어야 한다. 호들갑을 떨려는 게 아니다. 이건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생식 능력과 임신 유발 잠재력이라는 측면에서 동등하지 않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쪽의 생식 능력이 월등히 높다.


p18 남자들은 임신에서 부차적이거나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평생 유효한 남자들의 생식 능력은 모든 원치 않는 임신을 유발하는 주요한 동력이다.


p29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적어도 임신을 예방하고자 할 때 남자의 가임 상태가 아니라 여성의 가임기에 집중하는 행태가 얼마나 엉뚱한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사정을 의도성이 없고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마치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처럼 취급한다.

반면 배란은 사전에 정확히 파악하고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처럼 취급한다.

어째선지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p57 어쩌면 문제는 콘돔이 아니라 우리가 콘돔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콘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문제 일 수 있다. 콘돔 없는 성관계가 정복이라고 믿는 남자가 있다면 주변의 다른 남자들과 콘돔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p76 전원 남자로 구성된 동일한 의사 결정자들은 생리통 완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하지 말라는 결정을 내렸다. 어째서 일까? 이들은 생리통이 공중보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중보건 문제가 아니라고?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80퍼센트가 월경통을 경험한다. 지구인의 최소한 절반이 월경을 경험했으니 약 31억 명이 월경통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는 연구를 지속하는 게 타당하고도 남을 큰 수치다.


p81-82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심란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남자들이 콘돔을 쓰지 않는 성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조금 더 강한 몇 분간의 쾌락을 경험하기 위해 여자의 몸•건강•사회적 지위•직업• 경제적 지위•인간관계, 심지어는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다. 이 글을 쓰는 내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생각만으로도 위가 아파온다. 남자들은 정말로 여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몇 분간 조금 더 강한 쾌락을 택한다고?


p84 자위를 할 때 여자의 95퍼센트는 오르가슴을 경험한다. 처음 만나는 다른 여자와의 하룻밤 잠자리에서 여자의 64퍼센트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반면, 처음 만나는 남자와의 하룻밤 잠자리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는 7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능력이 부족해서 성관계에서 여자의 쾌락을 무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성애 성관계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접근법과, 바로 남자의 쾌락에 집중하는 태도다.


p107 정관절제술을 받은 남자, 콘돔을 항상, 정확하게 사용하는 남자, 무방비한 성관계를 거절하는 남자는 자기 음경을 가지고 하는 행동에, 자신이 사정하는 위치에 책임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 모든 남자는 무책임하다.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겠냐고 물었을 때 "글쎄, 그냥 여자들이…하면 되는데" 라 고 대답하는 남자는 사실상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데 아무 관심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p126 무책임한 사정이 모든 원치 않는 임신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면, 이 전제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임신의 신체적 결과를 짊어지는 사람이 마법처럼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가 사정의 책임을 여자와 나눌 수 있다는 발상은 참 흐뭇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나눈다는 걸까? 남자가 임신 기간의 절반을 감당하는 건가? 산고와 분만의 절반을 나누어 겪는 건가? 모유 수유를 절반 맡는 건가?


p148 어떤 사람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입양되어 원래 문화에 대해 배울 기회를 차단당했다. 그 결과 어느 문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에 시달렸다.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어떤 사람은 데이트 상대가 자신과 겹치는 DNA를 가지고 있을까 봐 두려워한다. 원가족의 병력과 그들에게 어떤 의학적인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성인이 되어 DNA 검사를 해보고 나서야 자신에게 부모가 모두 같거나 한쪽만 같은 형제자매가 있음을 알게 되어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입양이 항상 우리가 소비하는 동화적 결말로 막을 내린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절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아기가 원부모와 관계를 유지하도록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이다. 입양을 원치 않는 임신의 손쉬운 해결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p158 우리는 남자들에게 생식 능력을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르쳐야 한다. 남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생식 가능한 상태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p172 지금의 그 자리에서 시작하자

남자들이여, 당신부터 책임감 있게 사정하라. 그리고 모든 남자가 책임감 있게 사정하기를 기대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데 힘쓰라.

성관계를 할 때마다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라. 당신과 파트너에게 딱 맞는 콘돔을 찾을 때까지, 콘돔을 사용해도 이물감이 들지 않을 때까지 실험하라. 애정하는 콘돔을 침실 서랍에 채워두라. 자동차 글로브 박스나 가방에도 넣어 두라. 당신 파트너의 집에도 비치해 두라.

딱 맞는 콘돔과 윤활 방법을 알아내면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라.


p174 성교육을 필수 과정으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각 시기에 맞는 철저한 성교육을 시행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 능력의 차이와 이것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데 갖는 함의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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