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괴물들

클레어 데더러_괴물들

by 수수

앞서 이야기는 남성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괴물이었거나, 괴물 작품을 탄생시켰거나 하는 이들. 그런 이야기 중 <롤리타> 부분을 읽다가 <거의 황홀한 순간>이 떠올랐다. 분노하게 되는 지점, 그리고 둘 사이의 차이. 저자는 “롤리타의 내면은 험버트에게 무시되고 나보코프에게도 무시되는 것 같다”고 했다. 롤리타의 목소리 없는 삶이 소설에서 빛을 내었지만, 그것은 “가슴 아픈 부재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거의 황홍한 순간>을 읽고 무영도 희태도 오히려 평범한 이들이라고 썼다. 원치 않지만 일어나는 폭력들이 너무 무수해서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동 성폭행은 단순한 성행위가 아니라 유년 시절을 전부 도둑질하는 행위다. 인격의 소멸은 그 행위가 남긴 끔찍한 흔적”이라고 썼다. 희태는 무영의 유년 시절도, 그의 이후 인생도 도둑질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가해자에게 자꾸만 마이크를 쥐어주고, 서사를 쥐어줘야 할까?


한편으로는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나온다. 괴물 취급 받은 여성 예술가들은 성적 폭력을 행한 남성 예술가들과 다른 사유로 인해서 괴물이 되었다. 엄마였던 여성들이 아이 대신 예술을 택함으로서 그들은 괴물이 되었다. 임신 기간을 즐기기도 했다는 저자가 그럼에도 누군가의 임신 소식에 철렁하는 마음이 나는 사실 이해가 된다. 누구나 원하는 임신을 잘 할 수 있고 안전한 환경이길 바라지만, 사실 여전히 나는 임신 이야기에 마음이 쿵하는 것이 존재해왔다. 물론 변함없이 그대로이진 않지만. 데버라 리버가 쓴 이혼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그는 잔잔했던 물 깊이에서 헤엄치고 있던 이가 20년 만에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폭풍과 회오리 바람이 몰아들었다고, 배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이내 자신이 돌아가고 싶지 않음을 알았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이혼했다. 어떤 삶이든 힘들지 않겠냐마는 쓰는 여성으로서, 그런 나로서 살아가기 위했던 여성이 엄마가 되어서도, 아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이혼하지 않고서도, 죽지 않고서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무엇일지 질문을 나눠야 하는 거 아닌가. 그녀를 괴물, ‘미친’ 여자로 만들지 않고서 말이다.


또한, 이 책에는 나의 삶의 안전하지 않았음과 안전하길 위한 이야기를 하며 다른 존재를 지워지게 하는 이들도 나온다. 이상한 이들의 존재가 인정받던 세계관을 써내려갔던 이가 현실에선 이분법 규범 속에서 존재를 지우거나, 해사한 미소로 나치즘을 옹호하는 이들. 내가 직접 누군가를 죽이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폭력이 되고 많은 이들이 죽음 당했던 혐오차별에서 우리는 어때야 할까.


저자는 어떤 정답을 주진 않지만, 그의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좋은 핑계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 그렇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책의 예술가들은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사랑했던 음악 속에서도 수두룩 찾을 수 있다. 그를 사랑했다거나 좋아했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라는 존재일 수도 있고, 그가 창조한 결과물일 수도 있고, 그때의 나일 수도 있고, 나와 연결되어 생성된 어떤 감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즐겨 들을 수 없지만 나는 가끔, 여전히, 그 노래들이 그립다. 클레어 데더러는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당신을 나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의 사랑이 나의 미움으로 깨진 것이 아닐 때, 그 깨졌으나 사랑이었던 것을 어떻게 만지고 느끼고 가지고 살아가야할지 나에게 역시도 다른 방법들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 생각을 오가게 한 책이었다.


<괴물들>,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p35 그럼에도 나는 이것만큼은 원치 않았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온 현실이라는 이 매끄러운 화면에 균열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쨌든 곧이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트럼프 시대의 불평과 소음이 우리의 새로운 현실임이 밝혀졌다. 이후 몇 달간 이 녹취 사건은 대통령 후보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 녹취 테이프의 비윤리적이고 메스꺼운 영향력만 점차 증가했다. 그 불평과 소음 안이 우리가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소음 한가운데서, 이 불평의 맥락 안에서 나에게도 끝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나쁜 남자들이 만든 훌륭한 작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p46 트럼프 취임 몇 달 후였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괴로워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여자들을 말하고 여자들이란 곧 나를 의미 한다. 길에서 여자들끼리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 없이 걸어갔다. 여자들은 이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여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페이스북에 장문을 올리고 트위터에 단문을 올리고 분을 삭이며 산책을 다녀와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돈을 기부하면서 생각했다. 왜 내 파트너와 우리 애들은 설거지가 저렇게 쌓여 있어도 손 하나 까딱 안 할까. 여자들은 설거지 패러 다임의 해악을 깨닫고 있었다. 여성들은 너무 바빠 급진파가 될 시간도 없었는데 점점 급진파가 되어 갔다.


p54 나는 앞서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 즉 동의를 암시하거나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우리'에 불만을 표한 바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에서는 '우리'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 '우리'는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돋보기였고 확성기였다.


p63-64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허물을 들춰내는 페미니즘이었다. 진실의 목소리이며 "나는 고발한다"였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존재 방식이 있다. 남자들을 괴물이라 부르는 페미니스트 그리고 문제를 무시하는 사람.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여기지만 그와 동시에 비난과 지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 경멸하고 징벌하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덧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p73 우리는 개인사가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고,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하나의 얼룩은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온 이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취소(캔슬) 당했거나 취소당할 예정이다.


p84 인터넷상에 엄청난 분노가 일어났다. 포터 키즈들의 일부는 트랜스젠더였고 그들은 당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분노 밑에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었다. 사랑하는 무언가에 얼룩이 졌다는 슬픔이었다. 롤링의 이야기가 일어난 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이었지만, 그 장소에 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p149 과거는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와 여성혐오가 문학의 씨실과 날실로 엮인 시절이었고, 여성은 떨어진 단추들처럼 상자에 보관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여러 개의 상자였지만 여성은 궁극적으로는 분류될 수 있는 존재였다. 학대가 정상적이었고 학대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상성을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옛 작품을 읽거나 소비할 때 우리는 당시에는 평범하다고 여겨진 참으로 다양한 개자식을 만난다. 아내 구타자, 아동 학대자, 인종주의자 등이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과거는 빙 크로스비가 자신의 아이들을 때리는 곳이다.


p156 나도 프라이의 안타까움에 공감한다. 그는 자신의 상실감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 작품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 지도 감지한다. 하지만 이 발언에서 프라이는 바그너를 오염시킨 주체는 히틀러와 나치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역사에 의해 얼룩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에게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잘못이다.


p158 그녀는 히틀러가 평소에는 여자 운전자를 병적으로 불신했지만 자기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잘 올라탔다며 또다시 즐거워한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다른 여자를 보면 “조심해, 여자 운전자!'라고 소리 지르곤 했습니다." 자신만큼은 예외였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성 괴물성이다. 나와 같은 성이 인정받지 않는 곳에서 나만 인정받을 때의 기쁨. 우디 앨런의 〈맨해튼〉에 관해 서만큼은 '쿨한 여자'가 되고 싶다는 내 어린 시절 욕망의 사촌격이 라 할 수 있다. 나를 선택된 사람으로 만들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선을 긋겠다는 전략이다.


p184 험버트는 특별하지 않다. 험버트는 비범하지 않다. 험버트는 프랭크 라샐이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험버트가 평범하다면 롤리타 또한 평범하다. 그녀 역시 어디에나 있다. 롤리타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삶이 산산조각 나버린 소녀다.


p186 롤리타의 내면은 험버트에게 무시되고 나보코프에게도 무시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 없는 삶은 소설의 중심에서 서서히 빛 을 내는 가슴 아픈 부재가 된다.


p216-217 어쩌면 여성 작가인 당신은 자살을 하거나 아이를 유기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포기했을 것이고 자신의 일부를 버렸을 것이다. 책을 한 권 끝내고 나면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보인다. 깨진 데이트, 깨진 약속, 깨진 만남. 이보다 더 중요한 항목도 놓쳤다. 아이들의 숙제를 확인해 주지 못했고 파트너에게 전화하지 못했고 배우자와 잠자리를 하지 못했다. 책을 위해서는 그 같은 일상의 일부가 깨어져야만 한다.


p246 어렸을 때는 이렇게 보았다, 아니 느꼈다. 임신은 선택권의 사망을 정의한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확고했다. 도리스 레싱이 제니 디스키에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 임신을 하면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도중에 식는 것을 느낀다. 엄마로 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 심지어 나는 임신 기간도 즐겼다. 하지만 독자로서 임신은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임신은 서사의 종말이다. 모든 문이 한꺼번에 닫힌다. 앞으로 네 인생의 선택권과 영영 작별할 작정이야? 임신한 등장인물에게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다.

엄마됨은 나에게 일어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는 아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p296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 나이드는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