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고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다 보면 소크라테스가 선의 이데아를 설명할 때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이성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사람이 시각적으로 혼란을 느끼는 것은 명암이 교차할 때네. 즉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옮겨갔을 때나 그 반대의 경우지. 영혼도 이와 같다네. 그래서 이러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린다 해도 결코 얕보거나 비웃지 않네. 비웃기보다는 그가 밝은 곳에서 살다 와 상대적으로 어둡기 때문인지, 어둠 속에서 살다 와 눈이 부셔 그런 건지 생각해 볼 걸세.
... 밝은 곳을 보기 위해서는 몸 전체의 기능을 전향시켜야 하듯, 영혼으로 하여금 밝은 부분을 볼 수 있도록 관조하면서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네.]
보이는 것이 당연한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큼성큼 걷는 사람은 더듬거리며 걷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 소크라테스는 선의 이데아를 향한 진정한 교육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겠지. 저 구절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신이 아니기에 내 경험을 넘은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지하다. 그렇다면 진실을 추구하려면 내게는 없을 타인의 서사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구나. 유추하고 관조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공평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각자의 시간은 각자의 속도로 흘러간다. 같은 1년이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누군가에게는 쏜살같으며 이는 사람에 따라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기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래서 기다림은 어렵다.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때문에 스스로를 기다려 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벗어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또한 나의 바깥에서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때 타인과의 관계가 쓰인다. 나 혼자만의 시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살아내는 그 시간의 총량도 속도로 그저 각자의 것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잠시 만나 함께한 그 순간에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멀어지는 타인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속상해하지 말자. 본래 어느 누구도 같은 시간을 살 순 없는 거니까. 생각은 또 흐른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외로움의 정체일 수 있겠지. 아, 그런데 멀어진 반짝임 하나가 나를 기다린다. 옷소매로 두 눈을 한번 꾸욱 찍어내고 그곳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기다림은 꽤 많은 순간 우리를 살 수 있게 한다.
이만큼이나 이성적인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감성적인 접근이라니. 그래도 책은 쓰이고 난 후에는 작가의 손을 떠나 읽는 독자의 몫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도리어 내게는 내가 이성적인 사고를 좇는 상당히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확인이 되었다. 가끔 이렇게 고전을 읽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영감을 받는 감사한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