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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혁신파크 Nov 28. 2019

치유, 내 존재의 소중함을 스스로 아는 힘

[인터뷰]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

< 임종진 사진치유자 & 공감아이 대표 인터뷰>


치유(治癒), 내 존재의 소중함을 스스로 아는 힘


지난 10월 31일부터 11월 17일까지 옛 남영동대공분실(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사진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가 열렸다. 과거 이곳에서는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수감되었고,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 사진전의 모든 사진은 대공분실에서 살아남은 5명의 간첩조작피해자가 찍었고, 임종진 작가는 그들을 찍었다. 그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꼬박 3년 반이 걸렸다.

카메라는 신기했다. 세상과 대면하기 어려워하던 사람들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하면 조금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찍는 행위를 통해 감추고 외면했던 장소에 다다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사진작가로 살아온 공감아이 임종진 대표는 이런 카메라의 특성을 잘 알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던 이들에게 약물 대신 카메라를 쥐여 주었다. 카메라로 그들을 움직였고, 사진으로 새로운 기억을 찾아주었다. ‘사진치유자’라는 생소한 명칭으로 스스로를 정의한 임종진 대표의 진심을 들어보았다.





‘사진치유자’라는 용어가 생소해요. 어떤 의미이고, 왜 사용하게 되었나요?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 2006년에 그만두었어요. 기자로서 찍는 사진에 만족하지 못했거든요. 기사 사진이란 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만 전달하다 보니 정보 전달 이상의 것을 하기 힘들더라고요. 저는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삶을 항상 꿈꿔왔어요. 퇴사하고 국제구호활동가로 캄보디아에 갔을 때, 사진을 어떻게 사람을 위해 쓸 것인가 많이 고민했지요. 그때 생각한 건 ‘사연전달자’였어요. 사실 누군가를 찍어 전시하거나 책을 내면 관객이나 독자들은 사진 속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작가인 저만 보거든요. 제가 아닌 사람들의 삶과 존재적 의미를 봐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연전달자라는 이름을 쓰게 됐지요.

‘사진치유자’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한국에 돌아와서였어요. 수원의 한 정신보건센터에서 후천적 정신장애를 가진 분들과 6개월 동안 사진치료 과정을 진행했었는데, 사진이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감흥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계기가 됐죠. 그래서 상담심리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가고, 사진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을 땄습니다. 사진심리학은 서구에선 보편화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도입단계라 더딘 편이에요. 아쉬운 마음에, 스스로 공부하면서 ‘행위중심 사진치유’라는 개념을 만들었어요. 사실 전 사진심리상담사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상담’이라는 말 속에는 내담자를 약자로 취급하는 의미가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수평적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이 “넌 치유자야”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사실 치유자란 말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명명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사진치유자라는 명칭을 쓰고 있습니다.


‘행위중심 사진치유’라는 건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건가요?

서구의 사진심리상담은 오브제를 찍고 그 감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식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은 상담자의 리딩 능력, 코칭 능력에 따라 많이 좌우되는 것 같아요.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원칙적으로 상담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역동이나 마음의 변화가 생기는 게 내 안에서 나와야 변화가 커요. 그래서 행위중심 사진치유라는 말을 쓰고 있어요. 본인이 움직이고 본인이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형태예요. 아시다시피 사진이란 게 그 대상과 대면하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나란 존재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수평적으로 교감이 이뤄져야 구현할 수 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 대상에 호감이 있거나, 좋아하거나,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잖아요. 그리고 그걸 찍으려면 근처에 가야 해요.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찍을 수 없는 거예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행위의 역동이 필요해요. 사실 사회도 인간이 함께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살과 살이,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우리가 느끼는 게 달라져요. 사진은 움직이게 하고 대면하게 하는 중요한 심리치유 방식이고 기제인 거죠.



저는 셀카도 많이 찍으라고 해요. 자신의 하루를 사는 과정이거든요.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카메라로 보는 것도 달라요. 맨눈은 왠지 두렵고 불편한데 카메라로 보면 보호되고 숨겨지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것도 중요한 치유 기제예요. 제가 만나는 분들은 대개 국가폭력피해자 분들이어서 고문을 받았거나 체포됐다거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고통의 장소가 있어요. 그 공간들의 건물과 명칭이 바뀌었어도 그분들 마음 속에는 다 있는 거죠. 두려워서 생각도 하기 싫지만 사실 그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안에서 썩고 뒤틀려 있어요. 5・18 피해자 분들 중 30~40%가 자살 충동을 갖고 있다고 해요. 극심한 우울감이 있는 거죠. 이분들에게 카메라는 그 두려운 공간으로 갈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거예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보통 사진치유 과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나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대개 2~3년 정도죠. 이번에 사진전을 연 간첩조작피해자 분들과는 2015년부터 함께했어요. 자신의 힘든 기억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필요해요. 처음에는 그분들의 옛날 사진들을 오브제로 사용해요. 그걸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자기 존재성을 일깨우면서 유희적 감정이 들게 하죠. 사진은 흥미로운 것을 찍는다는 사실을 느끼는 과정이에요. 그 후에 상처의 공간에 한 번, 두 번씩 가보는 거죠. 처음에는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면서 공간에 대한 해석을 스스로 바꾸는 거예요. 처음에는 두렵다가 분노로 바뀌었다가 다시 객관화해서 바라봤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결백과 그리고 살아 마땅하다는 존재적 당위성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념이 바뀌는 거죠.


사진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도 그런 치유의 과정을 담고 있나요?

전시는 ‘상처와의 대면’, ‘원존재와의 대면’ 이렇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원존재는 원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사진들이에요. 어릴 때의 추억, 자신을 들뜨게 하는 대상, 사랑하는 사람 등을 찍는 거죠. 김순자 님의 경우 ‘원존재와의 대면’에서 외손주들 사진을 전시하고 있어요. 79년도에 간첩으로 끌려가실 때 젖먹이까지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거의 굶어 죽을 뻔했다고 해요. 간첩의 자식이라고 하니 누구도 돌봐주지 않은 거죠. 그래서 외손주가 태어났을 때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대요. ‘상처와의 대면’에서 보여주는 사형장 사진은 함께 끌려 왔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장소라고 해요. 지키지 못했던 자식의 도리를 이제야 그 공간을 대면하며 풀어낸 것이죠.

사실 옛 남영동대공분실에 못 오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무섭잖아요. 일반인도 그런데 피해자들은 어떻겠어요. 하지만 전시하는 내내 그곳에 매일 계시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사진 설명을 해주셨어요. 피해자 분들에게는 이것이 전시가 아니라 일종의 치유 퍼포먼스였어요. 찾아오는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할 때 어깨 한 번 감싸주고, 손도 잡아주시고 그러시더라고요. 그 시간이 얼마나 따끈따끈했는지 정말 감동이었어요.


사진전 <나는 간첩이 아니다> 도록


국가폭력피해자 분들에게 치유가 중요한 이유, 이 시대에 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 스스로도 정말 많이 하는 질문이에요. 3년 반 동안 그분들과 꾸준히 이야기하고 함께하면서 치유란 결국 자신의 존재적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라는 걸 느꼈어요. 우리가 흔히 ‘왜 살지’라는 철학적 고민을 많이 하는데, 극도의 힘든 상황을 거치면서 자존감이 크게 훼손되고, 30~40년 오랜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살충동과 우울증을 겪는 국가폭력피해자 분들에게 ‘왜 살지’란 물음은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죠. 그분들에게 세상에 살 이유가 너무나 충분하다는 걸, 내 존재의 소중함을 스스로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치유라고 생각해요. 치유라는 말이 과도하게 소비되면서 피로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한국 사회에 치유가 필요하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흔히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말씀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굉장히 무책임하고 제3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불과해요. 아픔에 공감하지만 내 아픔이 아닌 거죠. 하지만 시간은 절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걸 많이 봤어요. 5・18, 세월호,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잊어요. 평생 가져갈 수밖에 없는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오늘’이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맞이할까 하는 거죠. <나는 간첩이 아니다> 사진전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인 것도, 40여 년 전 일이지만 그분들 역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분들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오늘을 살아가려면 과거의 사건을 마주하는 게 필수라고 생각하고, 그건 본인 스스로 해야 하죠. 저는 그걸 돕는 거고요. 결국 ‘덜어내기’라고 생각해요. 그 힘든 기억이 어떻게 사라지겠어요. 조금씩 덜어내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상처를 지닌 분들을 대한다는 면에서, 감정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어렵고 힘든 부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진이 빠진다고 하죠?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5시간 넘기는 건 기본이에요. 그분들의 이야기들을 끝까지 듣고 경청하는 자세가 중요하거든요. ‘아, 이 사람이 나에게 귀를 기울여주는구나’ 느끼게 해 주는 거죠. 그런데 무엇보다 그분들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그 성찰의 과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동정심, 연민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만약 그 안에 머물렀다면 지금까지 못했을 거예요. 동정심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는 걸 그분들과 대면하며 체득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 속에서 독특한 형식의 성취감도 갖게 됐어요. 저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실 때 정말 기쁘고 보람을 느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믿는구나’ 하는 생각, 이런 성취감 덕분에 할 만하다 여겨요. 그치만 정말 힘들 때는 마음과 몸의 문 다 걸어놓고 쉬기도 해요. 스스로 자기의 감정을 돌보지 않으면 힘드니까요.


개발도상국 주민들의 존엄성을 되살리고, 북녘 동포들과의 민족 동질감을 회복하는 일도 하시죠?

‘빈곤 포르노’라고 해서 가난과 절망을 파는 구호단체의 행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해 왔어요. 우리는 늘 타인의 고통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마땅히 굶주리고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우리와 동일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그들의 가난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해요. 북한 사진전의 경우는 오해를 많이 받아서 사진을 담아온 지 근 20년 뒤에야 전시할 수 있었어요.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사진인데 당시에는 민족 동질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힘든 시기였거든요. 실제로 빨갱이 소리도 듣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죠. 하지만 북한의 남녀는 어떻게 데이트하는지,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뭘 하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전시 때 탈북한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고향 온 것 같다고 참 좋아하셨어요.


현재 서울혁신파크 상상청에 입주해 계신데, 어떤 계기로 들어오셨나요?

사실 지금 하고 있는 활동들은 그 주제나 대상의 특이성 때문에 외부 지원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사비를 들여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면 외부 지원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 수 있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어요. 고용노동부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거친 후 마침 상상청 입주기업 모집공고가 나서 지원했는데 다행히 최고 점수를 받고 입주했죠. 그런데 정말 딱 그거 하나 된 거예요. 다른 여러 지원이나 공모사업들에 도전해 봤지만 번번히 실패를 거듭했어요. 이게 뭐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지원을 못 받는 건 그렇다 쳐도, 인정을 못 받는 게 정말 속상했어요. 심사 과정에서 사진심리치료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요. 이런 활동이 제도적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참 힘든 일임을 깨달았어요.


공감아이 사무실 한쪽 벽면에 자리를 차지한 카메라들


사진치유자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지만, 사회적기업가인 동시에 사진작가라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시잖아요.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없는지, 마음가짐이 다르진 않은지 궁금해요.

지난 10월에 아쇼카에서 주최한 <7인7색 체인지메이킹 토크쇼>에 사회혁신가 크리에이터로서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제 조금씩 내가 해 온 일들이 공적인 이슈로 받아들여지는구나, 그런 느낌은 있어요. 사회적기업 틀거리 안에서 일을 한 게 꼬박 3년 반이더라고요. 여전히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체성이 무엇이든 큰 틀은 똑같아요. 공감아이 회사 모토가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거든요. 저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사진기자를 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오히려 지금은 더 개념이 명확해졌죠.


앞으로 계획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실은 개인적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당분간 좀 쉬려고 해요. 그러면서 어떻게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게 좋을지 고민해 보려고요. 사실 이번 전시가 이슈화되면서 많은 곳에서 관심을 가져주시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사회적기업이 됐든 시민단체가 됐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생각이고요. 사진치유자 양성과정을 만들 계획이에요. 5・18 피해자 분만 해도 약 3500명 정도인데, 그 가족들까지 2차 피해자도 많아요.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치유공동체를 한번 만들어보려고 해요. 제가 꿈꾸는 세상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에요. 서로 얼굴 보고 사는 세상, 서로의 존재성을 알고, 알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이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인터뷰 & 글_ 슬리퍼

사진촬영_ 서울혁신센터 홍보문화팀  나무

자료제공_공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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