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볼까 시리즈] 05 핸드스피크
가끔 저희 예술 활동이 (장애의) 극복이라는 테마만 가진다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희가 이런 활동에 처음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다 보니 주변에서 (농인 예술 활동이) 어려울 거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주제가 극복만은 아니고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예술활동을 통해 보여드리는 것뿐이에요. -핸드스피크 박지영 아티스트
핸드스피크는 농인의 문화예술 활동 소외와 참여 기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농인의 수어 공연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고 다음 세대 농인 아티스트를 발굴, 양성한다. 2020년에도 수어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 수어 랩 ‘손만 잡고 잘게’, 수어 뮤직비디오 ‘누가 죄인인가’ 등의 공연을 올리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서울혁신파크는 파크에 입주한 다양한 혁신단체와 함께 그들이 꿈꾸는 미래를 독자에게 제안하는 <해볼까>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이번엔 핸드스피크 정정윤 대표와 박지영 아티스트를 만나보았다. 박지영 아티스트는 최근 뮤지컬 <영웅>의 커버 뮤직비디오 <누가 죄인인가>에서 안중근 의사 역을 맡으며 주목을 받았다. 이 인터뷰에는 수어 통역사 김보석 님이 함께했다.
핸드스피크를 설립하신 지 10년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철학을 담으셨는지 궁금해요.
정정윤: 농인 청년들의 문화예술 참여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했습니다. 농인 아티스트 지연, 혜진, 희화 그리고 저까지 네 명이 함께 창립해서 현재는 스무 명의 아티스트와 꾸려나가고 있어요. 저희가 2016년 일본, 2017년 홍콩 해외공연에 초청을 받아 참가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해외 농인 청년들이 예술에 대한 꿈을 이뤄갈 수 있는 시스템이나 복지가 정말 잘 갖춰져 있어서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활동한지 10년이 넘었지만 크게 변하지 않은 사회를 보면서 사회문제가 피부로 느껴졌고. 여전히 사회 인식이나 문화예술 시스템을 개선하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인 아티스트 콘텐츠를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더 많은 농인 청년들이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나아가려 합니다.
핸드스피크에는 어떤 아티스트들이 함께하고 계시나요?
정정윤 : 처음에는 춤을 추는 댄서들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나다 보니 다양한 예술 분야에 도전하는 아티스트들이 많아졌어요. 연기나 노래, 랩, 영화, 디자인까지 다양하죠. 하고 싶은 것들이 다양하다 보니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데요. 아티스트들이 정말 원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을 우선순위에 두려고 합니다. 비즈니스적으로 되는 사업, 안 되는 사업을 먼저 구분하지 않고 이 안에서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요.
박지영 : 핸드스피크를 아신다면 수어 랩 영상을 보셨을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노래를 농인 아티스트 김지연님이 번역해서 수어 랩으로 보여드렸던 영상이에요. 농인들끼리 뮤지컬을 만들기도 하지만 청인들과 함께 수어 뮤지컬을 꾸미기도 해요.
박지영 아티스트님은 어떤 계기로 예술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박지영 : 제가 열두 살 때 미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거기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드라마에 배우 한 분이 수어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청인배우가 수어를 배워서 수어연기를 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농인배우가 출연해서 연기하는 거였어요. 제게는 충격이었죠. 그때부터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예술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가끔 저희 예술 활동이 (장애의) 극복이라는 테마만 가진다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저희가 이런 활동에 처음 발을 내딛는 사람들이다 보니 주변에서 (농인 예술 활동이) 어려울 거라고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주제가 극복만은 아니고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예술활동을 통해 보여드리는 것뿐이에요.
노래 같은 걸 창작하실 때는 수어를 먼저 만들고 거기에 박자를 입히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아티스트님만의 창작 방법이 있나요?
박지영 : 노래 창작은 음악을 먼저 받고 노래 가사에 수어번역 후 박자를 맞춥니다. 저만의 창작 방법이기보다는 제가 보청기를 착용하면 음의 높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음을 잘 모르는 농인 배우님들에게 "지금 이 가사가 고음이다. 저음이다. 길게 끊는다." 이렇게 하나씩 알려주면서 함께 연습 진행을 합니다.
박지영 아티스트는 2019년 수어 뮤지컬 <미세먼지>, 수어 뮤직비디오 <누가 죄인인가>, 에 참여했다. <누가 죄인인가>는 유튜브 조회 수 3만 회를 훌쩍 남겼다. 예술 콘텐츠를 만드는 아티스트로서의 삶에 대해 더 듣고 싶었다.
수어로 예술을 할 때의 특징이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수어를 할 때 표정이 풍부해지니 예술을 할 때도 유리할 것 같습니다.
박지영 : 처음에는 농인 아티스트들 표정이 풍부할 거라고 생각하시죠.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런데 실제로 연기를 해보니 어떤 표정을 짓는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청인분들이 보기에 수어 하는 표정이 풍부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연기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제 편견이었네요! 수어에 대한 다른 편견도 있을 것 같아요.
박지영 : 있죠. 예를 들면 수어가 정말 아름다운 언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저희에게는 그냥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잖아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농인 두 분이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대화를 보던 청인들이 와서 수어가 너무 아름답다고 했대요. 그냥 겉만 보고 아름답다고 한 거죠. 그런 게 고루한 편견이지 않을까 싶어요.
아티스트로 살아간다는 게 청인에게도 굉장히 힘든 일인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박지영 : 예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티스트 활동을 함께 했어요. 사실 힘들었죠. 아르바이트하면서 체력을 다 빼앗기니까, 끝나고 연습하러 오면 기운이 없더라고요. 지금은 핸드스피크에서 저를 정식으로 고용해주셔서 아르바이트는 그만뒀어요. 특히 농사회에서 예술에 도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래도 (극복하셔서) 한번은 시도해보셨으면 좋겠어요.
핸드스피크에 속한 아티스트들의 활동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 그러나 정정윤 대표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직 우리 사회에는 농인 예술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농안 아티스트로서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까?
배우님이 가장 자신 있는 공연은 어떤 건가요?
박지영 : 수어 뮤직비디오 <누가 죄인인가>에서 안중근 의사 역할을 했는데요. 정말 연습을 많이 해서 자신 있는 곡이에요. (공연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누가 죄인인가>를 촬영하기 전에 뮤지컬 <영웅>을 직접 보러 갔어요. 티켓을 샀는데 뮤지컬 자막도 없고 수어 통역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대본을 달라고 했는데 저작권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설득 끝에 공연 한 시간 반 전에 대본을 받고 다 읽은 후에 돌려 드리기로 했어요. 제대로 보진 못했죠. (뮤직비디오 촬영이 어려우셨겠어요) 후에 농학교에 재직중인 역사 농인 선생님을 모셔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자문을 받기도 했어요. 다 과정이죠.
아직 농인들이 문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시스템이나 제도가 부족한 것 같아요.
정정윤 : 왜 수어 통역이나 문자 통역이 필요한지 매번 설득을 해야 해요. 수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도 많아요. 농인이 사회에 진출한 경험이 적다 보니 수어 통역을 위한 예산도 잡히지 않고요. 초반에는 저희 비용을 부담해야 할 때가 많았죠. 사회적으로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나가다 보니 모든 것이 첫 번째 시도고 도전이에요. 요즘엔 다행히 응원해주는 분도 늘었고 핸드스피크의 가치를 인정해주시면서 좋은 기회나 제안을 많이 주시는 것 같아요. 유명한 분들이 콜라보 제안도 많이 해주시고요.
핸드스피크의 공연 영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다. 핸드스피크에 합류하고 싶은 농인 아티스트들도 많아질 것 같았다. 핸드스피크와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티스트님처럼 예술을 하고 싶은 농인분들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요?
박지영 : 핸드스피크에서는 먼저 농인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들의 지원을 받아요. (잘하면 뽑히는 건가요?) 김지연 연출가가 함께 할 수 있는 아티스트의 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고민이셨다고 해요. 농인이 연기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는데 연기를 잘한다 못 한다를 기준으로 사람을 뽑는다는 게 앞뒤가 안 맞잖아요.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면 실력이 없는 게 당연한 건데요. 그래서 공부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을 뽑고 있다고 해요. 일 년에 한 번, 상반기에 오디션을 보는데요. 함께 하게 되면 전문안무가와 배우들을 붙여서 훈련을 합니다.
앞으로 아티스트님과 핸드스피크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박지영 : (농인에게도)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예술을 시작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정정윤 : 농인 청년 아티스트들의 행복한 삶이요? 지금도 하고 있지만 어떻게 더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박지영 아티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아르바이트하면서 예술을 하는 게 힘들다 보니 창작과 연습에 대한 보상을 늘 고민하면서 방법을 찾고 있어요. 아티스트들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스스로 계속 고민하면서 발견하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기회를 계속 만들어 주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농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에 더해서 사회의 리더로 성장했으면 해요.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하지 않는 사회 전체의 리더요.
여기까지 인터뷰를 읽었다면 유튜브에서 꼭 핸드스피크와 박지영 아티스트의 공연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박지영 아티스트의 연기를 보면 소름 돋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청인이 수어를 꼭 배울 필요는 없지만, 수어로 표현된 예술을 접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아쉬운 일이다. 수어 뮤직비디오 <누가 죄인인가>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영상을 보니 수어가 뮤지컬 언어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어 뮤지컬이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좋은 건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싶어서요.”
핸드스피크 홈페이지 handspeak.kr
핸드스피크 페이스북 fb.com/handspeak.korea
인터뷰 ㅣ박초롱 딴짓매거진 편집장
영상 촬영 편집 ㅣ요지경필름
사진 ㅣ서울혁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