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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Jan 13. 2024

[미식일기] 제일함흥냉면(겨울), 강릉

겨울에만 맛 볼 수 있는 냉면집의 떡만둣국, 여름 별미 아쉽지 않은 겨울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하루를 쉬어가는 2024년 새해의 첫 빨간날, 첫 휴일이었다. 전날 늦게까지 밤을 지새워가며 '옛해'가 새해로 넘어가는 시간을 만끽하면서 우리는 '다음 날 새해 동 트는 것을 보러 가자'는 개뿔, 이 김고로와 이쁜 여자를 그렇게 부지런하고 낭만있는 사람들로 오해하면 큰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해 첫날에는 그래도 떡국 먹으면서 하루를 더 먹자고 하는 유서 있는 전통 같은 것도 지키지는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그리 반갑지 않은 나이도 나이거니와, 김고로와 이쁜여자로만 이루어진 핵가족의 전통은 우리 마음대로 지키고 싶은 대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휴일에 어디를 놀러가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도 00시 이후에 수면을 취한터라 아직 잠에 취한 것이 다 풀리지 않아 오후에는 집안에서 햇볕을 쬐면서 내내 누워서 쉬고 앉아서 쉬던 우리에게 슬슬 대충 먹은 점심의 여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금방 해가 져버리는 겨울이라 저녁 시간이 되지 않아도 이미 저녁같은 분위기도 한몫을 더했다.


"고로씨, 그래도 저녁에는 뭔가 제대로 된 것 먹어야 하지 않을까?"


뜨뜻한 온수매트에 누워 노곤노곤한 몸을 뒤척이며 이쁜 여자가 말을 건낸다.


"음...그래, 저녁도 대충 먹고 야밤이 되어서 배고픔에 광분하는 것은 별로야."


"새해니까 떡만둣국 먹으러 갈까?"


'떡만둣국'이라는 소리에 나도 마침 배가 고팠던터라 귀가 쫑긋한다. 이쁜 여자가 이 주변에서 떡만둣국을 먹으러 가자고 나의 손을 잡아 이끌 곳은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전부터 먹고 싶다며 얘기를 종종 하던 곳이 있지. 떡만둣국이라면 서부시장의 '문화식당'도 훌륭하지만 우리는 아직 맛 본적이 없는 떡만둣국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제일함흥냉면 가자, 거기 겨울에는 떡만둣국도 하잖아."


'제일함흥냉면'이라 함은 식당 이름 그대로 영동식 가자미식해가 올라간 함흥식의 냉면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지난 여름에는 이쁜 여자가 좋아하는 가자미 식해가 올라간 쫄깃하고 얇은 냉면을 먹으러 갔다가 아주 맛있고 즐거운 미식 경험을 했었다. 애초에 이 식당을 소개해주셨던, 이전에 강릉중앙시장에서 로스푼티노를 운영하셨던 사장님 부부가 소개해주실 때에도,


'제일함흥냉면은 여름에는 냉면만 하고, 겨울에는 떡만둣국만 해요. 환절기에는 냉면을 하는지 만둣국을 하는지 전화해보고 가세요.'라고 하셨기 때문에, 탁월한 미식 취향을 가지신 로스푼티노 사장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 가자. 새해 첫날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거기 떡만둣국도 잘한다고 그랬어, 로스푼티노 사장님이."


자신의 취향에 잘 맞는 식도락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이 되면 천하의 게으름뱅이에서 갑자기 부지런한 일개미처럼 돌아다닐 준비를 하는 김고로는 이쁜 여자의 시내 식도락 제안에 즐겁게 옷을 입고, 이쁜 여자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선다.


새해 첫날이라고 강릉의 추위가 사그라들거나, 인간들을 위해 조물주가 추위를 조절해준다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추위도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 짧은 나들이를 떠나는 김고로와 이쁜 여자를 막을 수는 없지. 강릉의 제일함흥냉면은 강릉시내에서 옛택시부광장이었던 커다란 광장의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강릉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현지인의 설명만으로는 찾아가기 어렵다, 본인이 잘 사용하는 지도 어플을 꺼내들고서 상호의 위치를 설정한 뒤에 길을 보면서 잘 찾아가거나 친한 강릉 사람에게 부탁하여 수고비를 주어서라도 잘 찾아가기를 바란다. 지금은 롯데시네마라는 거대한 빌딩의 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시내와 그 뒷골목을 지나쳐서 길바닥의 벽에 커다랗게 '제일함흥냉면'이라는 간판이 기대고 있는 밝은 파란색의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식당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반투명한 유리와 짙은 초록색 테두리를 가진 미닫이 문에 붉고 굵은 '함흥냉면'이라는 글자만 크게 쓰여져 있어서 처음 이 식당을 보는 사람은 진한 노포의 향기 혹은 들어가기 쉽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는 식당이렸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이쁜 여자와 여름에 방문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식당의 진가를 알고 있다, 겨울이라서 더 이상 여름처럼 냉면을 먹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들어가니 주문을 받으시는 아드님이 안 보이시길래 부엌으로 잠시 얼굴을 빼꼼 밀어넣었다, 마침 어머니 되시는 사장님이 계시기에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안녕하세요. 뭐 드릴까?"


"저희 떡만둣국 두개 주시겠어요?"


"떡을 많이 드릴까? 아니면 만두를 많이 드릴까?"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이쁜 여자는 떡 보다는 만두를 훨씬 더 많이 선호하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고.


"만두 위주로 주시면 감사하죠."


"두 그릇 다?"


"네네, 그럼요."


사장님과 부엌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며 주문을 마친 나는 이쁜 여자가 앉은 자리로 돌아와서 음식을 기다렸다. 만약에 겨울에도 함흥냉면을 하셨다면 냉면 하나에 만둣국 하나를 시켜서 먹고 싶었지만 그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얘기겠지. 바깥에서 가게로 돌아오신 아드님과 다른 손님과의 대화가 들린다.


"여기 냉면 되요?"


"겨울에는 냉면을 안해요~"


"아이, 맛있는데. 겨울에는 냉면을 왜 안하셔요?"


"날이 추워지면 냉면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떡만둣국만 합니다."


그건 그렇지, 재료를 준비해놔도 주문하는 수량이 적어서 가게 매출에 도움이 안되면 과감하게 정리하고 잘 나가는 메뉴만 집중해서 장사를 하는 것이 더 낫겠지. 십분 이해되는 심정이다. 잠시 후 사장님께서 커다란 그릇에 김치 1/4포기와 깍두기를 담아서 반찬으로 가져오신다, 김치에는 주방용 가위가 함께 따라왔다.


"알아서 잘라 드셔요~"


"네네~"



김치가 1/4포기로 통째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가게에서 본인들의 김치와 깍두기에 대한 자부심을 얼마나 갖고 있는 대략 알 수 있었다. 김치를 썰어먹는 방식이 손님들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김치를 얼마나 맛있길래, 얼마나 자주 찾으면 그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 통쨰로 가위와 함께 갖다주시는 걸까. 이쁜 여자가 김치를 젓가락으로 잡아 들어올려 고정하고, 나는 가위로 서걱서걱 잎사귀부터 몸통까지 가위를 썰어나갔다.


"썰때마다 김치 양념이랑 발효된 냄새가 어마어마한데. 시원함이 코에서부터 느껴져."


"이거 무슨 젓갈로 담군걸까나. 궁금하다."


김치포기의 끝부리 부분까지 야무지게 잘라내니 그릇에 김치가 수북하게 쌓였다. 그 맛이 궁금해 김치포기 해체작업을 마치자마자 잎사귀와 몸통부분을 맛본다.



아삭아삭 사각사각


"와..."


"오오...김치 진짜.."


양념은 살짝 매콤하면서 발효된 약간의 산미와 감칠맛이 가볍게 혀를 감는다, 발효가 잘되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몸통은 숨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속살이 상큼하고 씹을 때마다 발효된 시원함과 청량함, 잘 익은 채수의 맛이 터져나온다. 오랜만에 맛있는 김치를 먹는다. 이쁜 여자와 필자는 집에 김치가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정도로 한식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맛있는 김치가 있다면 당연히 반하기 마련이다. 한국인이 아닌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한국에 오랫 동안 살게되면 김치의 맛으로 해당 한식집의 수준을 판단하기 마련인데, 한국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은 어련할까.


"떡만둣국 드릴께요, 뜨겁습니다~"



김치와 깍두기가 워낙 맛있던터라 배고픔도 해결할 겸 김치들을 먹고 있던 우리에게 만둣국이 모습을 드러내니 완벽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만두의 겉을 보아하니 김칫소가 가득하고 국물은 뽀얗고 걸죽한 빛으로 형광등의 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사골을 많이 넣고 진하게 우려낸 육수다."


만둣국을 받으니 이미 고소한 육수의 향기가 피어올라 코를 타고 들어온다. 뜨겁고 진하며 고소한 고기육수의 냄새, 숟가락을 참을 수 없다. 이쁜 여자는 이미 식사를 시작했다.


후룩


"고소하네"


"육수 좋다"


묵직하고 구수한 맛이 먼저 혀에 닿으면서 뼈와 뼈에 붙은 고기들을 우려낸 진한 소의 맛과 고소함이 매력적이다. 쇠고기의 진하고 무거운 국물이 극에 닿지만 간이 세지 않아서 더 좋다, 국 안에 들어간 김치만두는 그만큼이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겠지.


밥만 말아서 김치를 얹어 먹어도 맛있을 국물이다



큰 밥숟가락 위에 올려도 숟가락의 둥근 부분을 다 덮고서도 튀어나오는 큰 크기의 만두가 마음에 든다. 직접 손으로 만두를 빚으셨는지 만두의 끝맺음 부분이 울퉁불퉁하고 살짝 두껍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수한 고깃국물과 함께 만두를 한입, 크게 베어먹는다.

김칫소에 당면, 약간의 두부와 숙주나물, 파 등 주로 식물성 재료로 구성된 김칫소의 간이 원재료인 김치의 맛처럼 살짝 매콤하면서 심심한 맛에 아삭거리는 씹을 맛이 좋은 만두라서 고소함과 짭짤한 맛이 진한 국물과 궁합이 좋다. 육수에 부재료로 들어간 들깨와 참깨, 맛김들이 간과 고소함을 더해주는 것도 육수, 김치만두와 조화를 이룬다. 다시 한번, 육수와 함께 만두를 입안으로 넣어본다.

만두를 반 썰어서 육수를 채우고 먹으면 더 맛있다

묵직하고 고소한 고기 맛이 입안을 덮으면서 쫄깃하고 부들거리는 만두피를 씹으면 매콤하면서 사각거리고 입안을 즐겁게 간지럽히는 김칫소들이 치아와 혀 사이에서 씹힌다, 그리고 나서 김치와 깍두기를 같이 넣고서 씹어먹으면 입안이 상쾌하게 정리된다. 그렇게 먹다보니 수북하게 김치의 산이 쌓여있던 그릇은 이미 밑바다을 보이고 깍두기도 거의 다 사라졌다. 우리가 그렇게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나? 그건 아닌데, 제일함흥냉면의 김치가 무지막지하게 맛이 좋다는 증거다.


먹다보니 손만둣국도 은색 스테인리스 바닥을 보일 때까지 싹 긁어먹는다, 육수 안에 송이 버섯이 들어있는지는 몰랐는데, 만두를 다 먹고나서 남아있는 국물과 많은 양의 떡을 퍼먹다보니 쫄깃한 식감과 향미가 만두와는 또 다른 식감을 선사하면서 속도 따끈하고 든든하게 채워준다. 한 그릇 안에 들어있는 코스요리와도 같은 오감만족, 이래서 취향에 잘 맞는 음식점을 가면 식도락이 즐겁다.

영동지방의 떡만둣국, 옹심이 등의 탄수화물 재료가 기반이 된 따뜻한 국물요리에서는 송이버섯이 국물내기 혹은 부재료로 들어가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서 나와 이쁜 여자는 더 먹고 싶지만 더 먹지 못하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로 일어서서 가게를 나선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서글서글한 미소를 띄우며 식사를 마친 나와 이쁜 여자에게, 다른 손님들에게도 하시듯, 반갑게 인사를 건내시며 계산을 받아주신다.


"그럼요, 손만둣국도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사장님께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다시 강릉시내와 남대천 사이의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나서면서도 강릉 지역민으로 보이시는 손님들이 식당을 찾아 가게 사장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잡으러 들어가는 모습이 정겹다. 사장님들께서 오래오래 이 자리를 지켜주시길, 복을 빌며 식도락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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