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고로 May 25. 2024

[미식일기] 도화루, 강릉

여고 앞 오래된 중국집의 짬뽕이 내 울대를 매콤하게 가격한 것에 대하여

어느 시점부터는 강릉에서 멀리 타지로 나가는 일들이 그리 많지가 않아 자의 반, 타의 반, 강릉에 있는 음식들에 대해서 어디를 갈지에 대해 생각했을 때, 우선 집 근처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내가 가지 않았던 집들부터 먼저 방문해 보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처에 차고 넘치는 것이 식당이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고 싶어 할 만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곳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집 근처 골목상권들의 수많은 식당들 중에서 어디를 갈지 추려내는 일은 제법 어려운 일이다. 대도시들보다 식당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강릉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이러한데, 내가 수도권과 같은 큰 도시들에서 살았다면 어떠했을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머릿속에서 방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식당들 중에는 중화요릿집이 두세 곳이 있었는데 그동안에 방문하려고 했다가 며칠 동안을 갑작스럽게 영업을 하지 않아 김고로의 애간장을 태우던 중화요릿집 도화루를 결국 방문할 수 있었다. 도화루는 현재 거대한 L사의 아파트 단지와 도시공원이 건설되고 있는 강릉 택지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택지로 넘어가지 않고 강릉역 방향으로 택하여 들어가면 강일여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화요릿집이다.


도화루에서 자신감 있게 추천하는 메뉴는 바로 돼지고기를 잔뜩 넣고서 끓여낸 육(肉)짬뽕, 많은 중화요릿집들이 여러 이유를 생각하여 해물을 잔뜩 넣고 육수를 끓여내는 것과는 다르게 강릉에서는 일명 '교동짬뽕' 방식으로 불리는 고기와 해물을 섞어서 우려낸 묵직한 고기육수를 곧잘 사용하는 중화요릿집들이 교동사거리를 중심으로 그 근처에 분포해 있다. 중화요릿집들마다 각자 고유의 육수를 기반으로 짬뽕을 끓여내는데, 그 육수의 차이와 끓여낸 방식을 음미하면서 짬뽕을 먹는 것도 식도락가로서는 큰 즐거움이다.


건설현장을 지나고, 넓게 분포한 아파트들과 주택가, 서점, 학교, 카페, 술집들을 지나서 가다 보면 붉은색 바탕의 하얀색 글씨부터 이미 사람들의 군침을 돌게 하는 '도화루'라는 커다란 한글과 한자로 된 간판이 김고로를 반긴다. '25주년 기념 홀 짜장면 짬뽕 할인행사'라는 자축 할인 행사 현수막이 이 도화루라는 중화요릿집이 생각보다 꽤 긴 역사를 가진 중식당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오랜 시간이 맛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법은 없지만, 맛있는 음식과 주인장의 정성 없이 식당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없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는가.


아직 6월이 되지 않았건만 여름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서 있는 체감온도 32도의 강릉의 뙤약볕 아래 김고로는 붉은 도화루의 간판과 통유리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나열한 시트지로 덮인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간다. 유리문을 당겨서 열어젖히니 발밑까지 떨어질 것 같은 길이의 굵직한 발이 살랑거리면서 내 머리를 쓸어 넘긴다. 바깥에서 들어올 수 있는 해충들을 막기 위한 발이겠지, 거추장스러운 환영인사를 휘적이면서 가게로 들어오니 매장은 여대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식탁 외에는 손님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에어컨을 틀어놓지 않아 짬뽕을 이미 한 그릇 먹은 것처럼 후덥지근한 도화루의 내부에는 검은색 알루미늄 재질로 된 식탁, 의자들과 원목으로 된 가구들이 뒤섞여 10팀 정도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틈틈이 놓여있는 고량주, 빼갈, 공부가주 등 중국의 명주들이 가게 내부를 장식하고 가게 안쪽에 서있는 단무지와 양파 셀프바와 텔레비전에서는 종편 뉴스채널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네, 한 명인데요."


"편하신 곳에 앉으셔요."


부엌에서 계시던 앞치마를 둘러매고 안경을 쓰신 여성분, 무언가 씩씩한 분위기로 나를 맞아주시면서 물을 갖다 주시고는 잠시 메뉴를 고민할 시간을 주시는 듯 부엌으로 들어가시며 내가 본인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일을 다시 하시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고민할 이유가 없다, 이미 육짬뽕과 미니탕수육으로 구성된 혼밥을 먹기로 작정하고 왔으니까. 잠시 고개를 돌려 주방을 보니 고개를 빼꼼 내미시던 여사장님과 눈이 마주친다.


"뭘로 드려요?"


"육짬뽕에 탕수육 세트 부탁드려요."


"네~ 홀에 육짬뽕 탕수육 세트 하나!"


여사장님이 크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가게의 불이 꺼진 안쪽 방에서 검은 앞치마를 둘러매신 더 단단한 체구와 역사의 흔적을 가지신, 남편으로 보이시는, 남사장님께서 나오시더니 부엌에서 웍을 잡고 볶는 소리와 튀기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나, 요리를 하시는 분은 따로 계셨던 거구나 하고는 무릎을 탁 치는 김고로. 중화요릿집에는 역시나 주로 웍을 잡으시는 고수분들이 계시다.


손님이나 주문이 많이 밀려있는 것이 아니라면 중화요릿집의 식사가 나오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어느 정도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이 정상인 메뉴가 5분도 채 안되어서 나온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품는 김고로의 생각. 부엌에서 웍을 볶고 튀기는 소리가 다 사그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앞에 나타나는 시뻘겋고 커다란 짬뽕과 얇게 썰린 양파가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탕수육이 등장한다. 짬뽕에서 칼칼한 고춧가루와 진한 풍미가 코로 바로 올라온다, 모두 음식은 입으로 먹어봐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김고로의 기분 좋은 촉이 발동한다.



'햐아, 냄새가 어마무시하게 칼칼하고 진하구먼.'


중화요릿집에서 주로 사용하는 대왕오징어(훔볼트오징어)의 커다란 조각, 청경채, 숙주, 양파, 주꾸미, 새우, 돼지고기 등 일반적인 중국집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서민들과 친숙한 재료이지만 같은 재료라도 더 인상적인 맛을 창조해 내는 중화요릿집은 매력적이다. 거기에 재료들 밑에 가라앉아있는 면발의 양을 제외하더라도 도화루에서 짬뽕에 넣어주는 돼지고기의 양은 수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다. 냄새가 못 이겨 국물 맛이 궁금하다, 김고로는 숟가락을 먼저 든다.


꼴깍


'합격!'


묵직하고 칼칼한 매운맛이 아주 약간의 텁텁함과 함께 김고로의 울대를 당수로 올려친다. 으아, 매콤한 도화루의 육짬뽕은 합격, 합격의 맛이다. 김고로가 경험한 음식들 중 열의 아홉은 거의 첫 숟가락, 첫 입에 결정이 되는데 도화루의 짬뽕도 그러하다. 처음부터 엄청난 충격으로 입맛을 사로잡거나, 처음에 그러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생각나는 집들이 김고로로 하여금 다시 그 요리를 먹으러 방문하게 한다. 김고로는 젓가락을 들고서 청경채와 돼지고기 등을 가득 집어 먹는다.



아사사삭


식감을 잃지 않고 잘 볶아진 청경채와 숙주나물이 입안에서 살아 사각거리면서 씹힌다, 그동안에 잠시 머금은 칼칼한 짬뽕 국물이 그 옆에서 같이 씹히는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함께 입안을 진한 고기육수로 채운다, 국물과 재료의 끝맛에서 조화로운 고소함이 느껴진다.


'돼지고기는 안심인가? 아니면 불고기용 앞다리인가? 이렇게 얇게 저며서 넣어주니 훨씬 짬뽕에 잘 어울리는군.'


김고로는 얇은 돼지고기들을 붉은 국물에 가득 적셔서 입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불고기 양념에 어우러져 볶아질 듯한 외모를 한 돼지고기들이 입안에서 쫄깃하게 씹히며 다시 매콤하고 고소한 육수와 어우러져 김고로의 땀구멍에서 육수를 빼내는데 일조한다. 점점 붉어지는 존재는 짬뽕 속의 돼지고기인가 도화루에서 짬뽕과 더위를 먹어가는 김고로의 얼굴인가.


"에고, 더우신가 보다, 에어컨 틀어드릴게요."


딸랑 소리와 함께 혼밥을 하러 온 다른 손님을 맞이하다가 땀을 삐질거리며 흘리는 김고로의 얼굴을 본 여사장님이 급하게 에어컨을 틀어주신다. 김고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드리고는 다시 짬뽕에 몰두한다.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김고로다, 짬뽕 안에 숨어있는 건더기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얼른 다 찾아먹고 싶으니까.


'그래도 면을 너무 방치해 두면 맛이 없어지겠지.'



도화루의 면은 어느 중국집에서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계면이다, 부드럽고 탱글거리는 면발이 묵직한 짬뽕 국물에 벌겋게 물들어,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김고로의 입안으로 한번 꿈틀거리며 치고 들어온다. 그리고 짬뽕 그릇을 양손으로 붙잡고 국물을 마시는 김고로, 꿀렁거리는 짬뽕의 생명수가 김고로의 입맛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다.


고기육수의 묵직하게 진한 맛과 칼칼한 고춧가루가 종수반점의 스트레이트 펀치 같은 그 끈적이는 육수를 생각하게 하지만 도화루의 육수는 조금 더 깔끔하고 끈적이지 않는 육수다.


'탕수육의 맛은 어떠려나.'



간밤에 내린 눈처럼 탕수육을 덮고 있는 얇은 양파채들을 잠시 걷어내고, 진한 황토색으로 바삭하게 튀겨진 탕수육 조각을 맑은 갈색의 탕수육 소스에 조금 더 묻혀서 입으로 가져간다.


바사삭


쫄깃쫄깃


식탁에 나온 지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갓 튀겨진 것처럼 바삭거리는 탕수육은 튀김옷과 고기가 부드럽고 쫄깃하게 씹힌다. 무슨 조화를 부리셨는지 일반적인 탕수육보다 더 부드럽고 기름진 맛이다. 



'아, 이 상큼한 냄새는...!'


달콤한 탕수육 소스에서는 사이트러스 계열, 특히 오렌지나 감귤의 맛이 혀를 자극한다. 김고로가 사랑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중국집 '진짜루'에서도 도화루와 같은 탕수육을 했었다. 짙은 갈색이 될 정도로 바삭하게 튀기는 탕수육에 오렌지로 마무리한 탕수육 소스, 얇은 양파채를 상큼하고 새콤달콤한 탕수육 소스에 묻혀서 먹어본다. 양파를 그렇게 좋아하는 김고로는 아니지만 이 소스를 먹기 위해서 양파를 먹는다, 그게 김고로다.


'이렇게 사이트러스 종류 과일을 넣어서 탕수육 소스를 만드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오래되지 않은 추억의 맛을 소환하는군. 감동이야.'


바삭바삭



탕수육 한 개를 집어 먹고서는 또다시 한 개를, 계속 집어먹게 되는 탕수육, 맛있는 탕수육은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먹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멈출 수가 없지만 짬뽕을 아직 다 안 먹었기 때문에 칼칼함과 바삭함 사이를 오가면서 즐거운 식감놀이 시간을 가진다.


매콤하고 진한 고소함으로 입을 덥히다가 새콤달콤한 바삭 부드러운 고기를 다시 씹고, 다시 뜨끈한 육수로 돌아와서 식사를 마무리 짓는다. 짬뽕 국물이 맛있어서 빈 그릇으로 만들고 싶지만 그전에 먹었던 건더기의 양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는 김고로, 설거지를 못함이 아쉽다.


"휴우... 화끈했다."


식탁에 있는 냅킨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김고로는 카페인과 달콤함을 곁들인 후식을 즐기기 위해 다시 강릉시내로 페달을 밟았다.

작가의 이전글 [미식일기] 깜댕이칼짬, 강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