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뼈로 끝까지 끓여낸 뽀얗고 고소한 국물, 속이 꽉 찬 백암 순대
"나도 용인 놀이공원 가고 싶다. 김고로랑 가면 좋겠다."
"응?"
"샌마르 대장님네가 용인에 놀이공원 놀러 간다고 했잖아.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진심이야?"
"응, 나는 너랑 놀이공원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야."
이쁜 그녀가, 이루어준다면 인생에 여한이 없다고 말할 만큼 큰 '김고로와 놀이공원 가기'라는 소원에 의하여 용인으로의 여정은 3월의 어느 따뜻한 초 봄날에 시작되었다. 샌마르의 피자대장님이 직원들과 함께 용인의 놀이공원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요'라고 했던 한마디가 발단이 되어 김고로는 이쁜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하여 직접 커다란 승합차를 빌려서 용인에 있는 야외의 초대형 놀이공원으로 여행을 떠난 그날. 김고로는 용인에 갈 겸, 이전에 용인에 갔었지만 경험하지 못했던 그 유명한 '백암순대'를 먹고 올 작정이었다.
"그럼 놀이공원에서 오후 한... 5시? 까지 놀다가 나와서 백암순대 저녁으로 먹고서 오는 게 어떨까요?"
김고로가 제안한 놀이공원 이후의 식도락 제안에 피자대장님은 감사하게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마지막 방문 이후로 거의 20년이 넘어서 갔었던 용인의 놀이공원은 아주 오랜만에 김고로를 10대의 추억 속으로 되돌려 보내주었고, 놀이기구를 타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경험을 몇 번 하며 '배가 고프다'라는 느낌이 들 때쯤에야 놀이공원에서 퇴장했다. 김고로와 이쁜 그녀를 포함해서 6명의 인원은 이제 '나는 너무 지쳤어요 땡벌'과 같은 상태로 다시 차로 들어와,
"이제 저녁 먹으러 가죠?"
"우리 어디 가요?"
라고 속사포처럼 물어보면서 몹시 배가 고프니 어서 달리자는 신호를 보낸다. 김고로는 친절하게,
"전국에서 순대로 이름난 두 곳 중 하나인, 용인시 백암면의 백암 순대를 먹으러 갈 거예요. 오늘 갈 식당은 '제일식당'입니다."
40분 정도 고속도로를 잠깐 타고 국도를 타고 용인시 처인구의 백암면으로 들어가니 오늘은 5일장이 있는 날이었는지 주차를 하려고 했던 백암면의 공영주차장에 상인들과 트럭들이 가득이다. 어찌어찌하여 탑차트럭이 빠져나간 자리에 겨우 주차를 한 김고로와 일행들은 백암면의 대형 마트를 지나서 백암파출소 옆에 자리를 잡은 제일식당으로 향했다. 백암면에는 대략적으로 7~8개의 백암순대를 하는 집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식당 근처로 다가가니 돼지고기 특유의 쿰쿰하고 구수한 냄새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다 숨 쉴 때마다 몸속으로 들어온다. 덕분에 이미 순댓국을 눈앞에 든 상상을 하는 김고로.
가게의 외관은 깔끔한 통유리와 흰색 시트지로 메뉴를 적어놨고, 식당이 있었던 세월만큼이나 오래되고 때가 묻은 간판은 초록색 혹은 붉은색 배경에 흰색의 바른 글씨로 '제일식당'이라고 쓰여있다. 지자체에서 수여하는 '모범식당'이라는 간판이 통유리들 사이에 붙어서 그만큼이나 오래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곳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동네주민분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앉아서 소주와 맥주, 막걸리를 곁들여 순댓국에 삶은 돼지부속들을 즐긴다. 큰 소리와 약간의 육두문자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년의 남성분들이 많은 것을 보니 맛이 제법 괜찮겠다는 직감이 오는 김고로. 가게 내벽을 둘러보니 여러 방송매체들과 신문, 잡지들에 출연했던 사진들이 가득이다. 가게의 입구 정면에 바로 큰 주방에서 부지런히 순댓국밥을 토렴하고 고기를 써는 분이 있고, 왼쪽 화장실로 나가는 외부 통로에는 커다란 재래식 가마솥이 3개나 뚜껑을 벗고 순댓국의 육수를 품고 있다.
"각자 순댓국 하나씩 먹고, 거기에 오소리감투 하나 시켜서 나눠드시죠."
"좋습니다."
김고로와 피자대장님이 메뉴 주문을 마치자 옆에 앉아있던 샌마르의 직원들이,
"아, 이거 냄새가 딱 소주 각인데."
"술 마셔도 돼요?"
샌마르 대장님 대신에 김고로가,
"그럼요, 운전은 제가 할터이니 걱정 마시고 드세요."라고 받아준다.
"그럼 이따 순댓국이랑 고기 나오면 먹어보고 시킬게요."
"그러시죠."
메뉴판을 보니 식당이 수도권 외곽의 '면'에 위치한 곳임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저렴한 가격이다. 순댓국이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 나오고 그릇 위에 돼지부속들이 쌓여오니 인심 좋은 착한 가격임을 입으로 느낀다. 함께 먹을 음식으로 주문한 오소리감투가 먼저 나오니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젓가락을 우수수 들어 올려 한 점씩 먹는다.
길쭉하게 썰린 돼지 위, 오소리감투를 들어서 눈을 감고 씹는 김고로.
우적우적 쫄깃쫄깃
어금니 사이에서 통통 튀어 오르는 식감과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육질, 그리고 돼지고기 특유의 구수함과 고소한 기름맛.
"캬."
"와, 역시 소주각이네. 이모~ 여기 소주 하나요!"
샌마르의 직원들 중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기 좋아하는 몇몇 직원들이 딱 봐도 좋은 안주임을 알 수밖에 없는 오소리감투를 지나쳐 술을 안 마실 리가 없었다. 한 점을 먹자마자 바로 손을 들어 소주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의 수대로 소주잔을 주문하는 직원. 한참을 오소리감투, 콩팥, 폐 등을 치아 사이로 터프하게 으적거리며 김치와 깍두기를 교대로 먹고 있다 보니 주 음식인 백암식 순댓국이 등장한다.
순댓국이 아니라 곰국이라고 착각할 만큼 뽀얗고 옅은 갈색빛이 감도는 제일식당의 순댓국, 화장실에 가면서 커다란 가마솥들을 봤었던 것이 좋은 힌트가 되었다. 경상도에서 먹는 돼지국밥처럼 돼지뼈와 부속을 끓이고 또 끓여서 고운 국물을 뽑아내셨을 거라는 짐작을 하는 김고로. 국물부터 먼저 떠먹어본다.
후룹
극히 진하고 진득한 식감의 육수가 고소함으로 입안을 가득 뒤덮는다. 한 숟가락으로는 아쉽다, 두세 숟가락을 연거푸 다시 먹어본다.
"와 찐하다. 국물 죽이네, 소주 미리 시키길 잘했어."
"짠 한번 더 하시죠."
옆에서 함께 국물을 먹으면서 첫 술을 뜬 '알코올파' 직원들이 숟가락을 그릇 안에 담근 채로 소주를 잔에 따라서 부딪치고는 한 모금 다시 꿀꺽 삼킨다. '크으'하는 시원한 목 넘김의 소리가 양 옆에서 서라운드 스테레오처럼 들리고, 김고로는 이제 혼자만의 미식 시간으로 빠져든다. 숟가락으로 그릇의 밑바닥을 뒤져보니 토렴 된 밥이 한 공기 이상 들어있고 손님을 무조건 배가 터지게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순대와 돼지부속들이 '육수반 고기반'으로 담겨있다.
"양이 엄청나네요."
"네, 생각보다 제법 많아요."
김고로는 순대를 하나 건져서 따로 맛을 본다. 순대 표면에는 돼지의 무거운 속을 감당했던 질긴 흔적들이 나무의 결과 같은 무늬로 남아, 속에 담긴 온갖 재료들과 검붉게 물들어 반짝인다.
와작
순대의 겉면이 쫄깃하고 탄력 있게 씹히면서 안에 있는 당면, 살코기 등을 비롯한 속재료들이 각자의 식감을 두드러지게 보이면서 씹힌다. 아삭아삭, 사각사각, 우적우적, 쫄깃쫄깃, 서로 다른 식감을 가진 식재료들이 돼지피 그리고 내장 안에서 하나로 섞여, 도리어 순대가 식사를 하는 이의 머리를 한 입에 삼키는 듯, 순대의 풍미 속을 빨려 들어간다. 내가 순대를 씹는지, 순대가 나를 소화시키고 있는지 순댓국에 '물아일체'의 상태가 되는 김고로. 순대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텁텁함이 있다면 그릇을 들어 뽀얀 육수를 들이켠다.
꿀꺽
새하얀 액체가 혀를 타고 들어오면서 다시 돼지의 영혼을 뽑은 고소함과 진득함으로 혀를 씻어낸다. 육수가 목젖 아래로 넘어간 뒤에도 육수의 깊음과 끈적거리는 찰랑거림이 계속 입안에 남아서 입을 쩝쩝거리며 다시게 된다.
백암 순대 외에도 순대를 보좌할 다른 부관들이 많다, 머리 고기에 다른 부위에서 떨어져 나온 살코기들이 순대로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는 포만감을 풍족하게 채운다. 순대의 탄력과는 다른 지방 부위의 쫄깃함과 지방의 고소함과 부속 사이에 걸쳐있는 살코기들의 부드럽게 갈라지는 육질은 왜 지금까지 순대와 돼지부속을 활용하는 요리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지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제일식당의 순댓국을 먹으며 모두가 공감했던 점은 이렇게 순대와 머리 고기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라던가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돼지고기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식당의 공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길거리에까지 풍기는 반면에 순댓국의 육수와 음식은 깔끔한 맛이라니. 머리 고기의 지방과 살코기, 폐와 콩팥이 말랑말랑 혹은 사각사각, 어금니로 깊게 파고들어 가는 돼지고기의 부드러운 육질은 진하고 짭짤한 육수에 다양한 식감을 더하면서 올바른 균형을 맞춰준다.
김고로도 시장했던지라 식탁에 올라온 고기들과 순댓국의 밥, 육수를 모두 비워내고 싶었으나 놀이공원에서 허기를 채우기 위해 미리 간식들로 속을 채워버린 탓에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반면 김고로보다는 간식을 덜 드셨던 피자대장님은 신들린 듯 숟가락질과 그릇 들어 올리기를 시전 하시더니 순식간에 스테인리스 국밥 그릇의 바닥을 반짝이게 만드셨다.
"대장님 엄청 잘 드시네요."
"예, 맛있네요. 배도 고팠고요."
모두가 만족스러운 순댓국으로 충분히 행복해지자, 김고로 일행은 각자의 집이 있는 강릉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식당을 나와 백암면의 길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