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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Feb 16. 2022

눈과 컵라면

제설의 추억

[2021년 12월에 쓰인 글입니다]


이번 해에도 강릉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올해 1월인가 2월에도 눈이 꽤 왔었던 기억이 난다.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서 눈삽으로 눈을 퍼 멀리 던지며 길을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 있다. 단단한 플라스틱 눈삽을 눈이 내린 곳 깊숙이 넣고 발로 밟아 밀어 고정시킨 후 스쾃 자세를 잡고 눈을 퍼올리는 이 육중한 느낌은 아주 익숙하다.


본인은, 아는 사람들은 아는 대로, 군생활을 강원도 고성에서 했었다, 멀리 해금강과 외금강이 보이는 금강산과 매우 가까운 GOP와 GP를 오가며 지냈었다. 누구나 쉽지 않은 군생활을 했었을 것이고, 남들에게 풀어주고 나눌만한 썰이 많겠으니... 나도 그렇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동안에는 강원 영동지방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던 적이 있었다. 언론에서 떠들던 공식적인 기록은 3미터 정도였겠지만 나와 함께 군생활을 하던 부대의 지역에는 4미터에 가까운 눈이 내렸었다. 각부대에 보급품을 전달하거나 그 지역에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한 경계작전을 위해서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보급로와 경계로의 제설을 하는 것이 필수였기에, 나도 이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눈을 치웠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 싫어한다. '민간인'이 되어버린 지금은 어차피 내가 이 눈들을 다 치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서 마음 놓고 눈이 내리고 쌓이는 것을 구경하며 그 하얀 분위기를 뜨끈한 차 한잔과 함께 즐기지만 전투복을 입으며 지낼 당시만 하더라도 하늘에서 눈이 오기 시작하면 나와 함께 하던 장병들의 마음은 착잡함과 분노를 오가며 슬퍼졌다.


새벽 5시가 되기도 전에 비상 사이렌 소리가 부대에 울려 퍼지면서 '제설작전'을 위해 지금 당장 일어나서 간단하게 인원점검을 하고 따뜻하게 껴입고서 눈삽과 밀대를 잡고서 나오라는 당직사령의 방송이 생활관의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면 우리는 흑마법사에 의해 강제로 깨어나는 시체들처럼 자리에서 기어갈 듯이 일어나 눈을 치우러 나갔다. 하루의 제설작전이 종료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조명을 켜야 앞이 보일 정도로 땅거미가 어두컴컴하게 깔리면 그때가 하루 일과가 마침내 끝나는 시간이었다. 물론, 다음 날도 밖에 나와 그날 치우지 못한 눈을 마저 다 치워야 했지만. 그리고 그때 당시 우리는, 그러한 제설작전을 거의 2달 가까이 반복했다. 눈이 쌓인 것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시절이었다.


눈이 3미터, 4미터가 오면 어떤 느낌일지 실감이 잘 안 나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눈이 많이 와서 쌓였는데 아파트 2층 높이 정도로 쌓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치워놓으면 자연스럽게 눈벽으로 이루어진 하아얀 미로와 지붕, 통로들이 만들어지는... 아, 그만 얘기해야겠다, 오늘 아침에 마신 파나마의 깔끔한 맛이 목까지 올라오는 역류를 느끼기 시작하니까.


그래도 그때 당시, 소소하지만 눈을 치우는 우리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주는 음식들이 몇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GOP본부의 취사병들이 정성스럽게 끓였던, 알콜을 부르는 칼칼하고 따뜻한 김치찌개였고... 또 하나는 플라스틱 용기로 된 작은 모양의 육개장 맛이 나는 사발면이었다. 눈을 치우는 것도 작업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간식과 식사를 자주 하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금방 지쳐버리기 때문에, 제설작전 도중 마시는 믹스커피와 금방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육개장 맛이 나는 이 작은 사발면을 먹어본 사람은 누구나 이 맛을 알고 있다. 그리고 힘들고 추운 노동 중에 이 사발면을 먹어본 사람은 이 작은 음식의 진가를 잊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아무리 귀마개와 방한의류와 전투화로 몸을 감싸고 눈을 치운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를 침투해오는 한기, 그리고 고된 피로감.


'20분간 휴식! 쉬었다가 합시다!'라는 외침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면 '20분간 휴식이랍니다!'하고 복명복창을 하는 병사들의 소리가 GOP와 GP골짜기에 여기저기 울려 퍼지고 분주하게 들리는 눈발자욱 소리와 한 곳에서 날아오는 매캐한 담배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내 옆에 있는 눈벽 위에서 덥혀지는 매콤하고 고소한 사발면의 냄새. 탱글거리는, 구불거리는 면발에 묻은 빨간 국물이 먼저 따끈한 온기로 입과 속을 적시면, 이어서 뜨끈한 국물을 한입 마시면서 온몸에 온기가 퍼져 잠시 동안은 그 어떤 음식도 부럽지 않다. 그렇게 정신없이 뜨끈함과 서늘함을 오가며 사발면에 얼굴을 묻고 먹다 보면 짧은 20분이 지나고 '작업 개시!' '작업 시작이랍니다!'라는 아쉬운 울림. 몸을 따끈하게 덥힌 그 기분으로 다시 눈을 치우기 시작하는 우리였다.


지금도 추운 날이 오면 그때의 그 사발면의 맛이 생각나 집에서 물을 끓여 먹어보지만, 그때의 그 맛은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군에 재입대를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 힘들고 고되었던 추억의 맛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는 것이다. 굳이 군대에서 제설작전뿐이 아니라, 훈련과 작업, 여가 시간의 중간중간에 우리들의 지친 틈을 채워주던 그 소소한 따뜻함이 그리운 것이다.


지금도 나라를 위해 수고해주시는 군장병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하며, 나에게 그러했듯이, 작고 매운 사발면이 그대들의 마음도 위로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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